<8화>
능력을 박탈한다는 말은 사실 정확하지 않다.
방금 전 발동했던 아이템을 취소시켜, 각성자에서 다시 미각성자로 되돌려 놓을 뿐.
다시 사주창을 각성시키면 해결될 문제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나처럼 스스로 사주창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타인의 사주창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적었다.
그리고 이런 능력자의 대부분을 운명 보호국이 보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사주창을 확인하려면 운명 보호국과 계약을 맺거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우리는 이곳에 먼저 선별된 것만으로도 특혜를 받은 셈이었다.
“여전히 나가길 원하신다면,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소질이 있을지언정, 유일한 사람은 아니다.
운명 보호국이 싫다는 사람을 붙잡을 이유 따위는 없다.
게다가 여기에서 받는 훈련은 여러모로 이득이니 거절하는 쪽이 손해였다.
퇴소를 요청하던 남자가 우물쭈물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다들 겁쟁이에 바보네. 이런 설정에서 능력을 잃어버리면, 이후에는 밑바닥 인생이 될 게 뻔한데.”
독고준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 세상에서 능력을 박탈당하는 건 살인보다 더 가혹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가 신수아를 힐끗 보며 말했다.
“신수아는 안 나갈 거지?”
“네. 아무래도 바깥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인 듯하니……. 그런데 왜 반말하시는 거죠?”
“죄송합니다.”
둘이서 옥신각신하는 사이.
몇 사람은 안나비의 말에도 결국 이곳을 나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어딘가로 향하더니, 곧 안나비만이 돌아오게 되었다.
결국 퇴소를 한 모양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군요. 아직도 나가기를 희망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이번에도 침묵.
안나비는 말을 이어 갔다.
“좋습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여러분을 육성시킬 것이고, 여러분이 일정 조건을 충족할 경우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녀가 뒤로 몸을 틀었다.
홀의 한 편에 일곱 개의 문이 있었다.
“제 뒤에 있는 일곱 개의 문을 클리어하시면 됩니다.”
언뜻 보기로는 꽤나 고풍스러워 보이는 문이었는데 거기에는 각각 다른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것은 불이, 어떤 것은 칼이 그려져 있었다.
저 안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첫 번째 문을 클리어할 경우 두 번째 문이 개방되는 형식입니다. 개인이 아닌 파티의 형태로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안나비의 설명이 이어지던 중, 옆에 있던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신수아였다.
“그곳을 다 클리어하고 나가게 되면 아까 말씀하신 운명 보호국이라는 곳에서 일하게 되나요?”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능력이 특출하신 분들께는 저희가 입사를 제안드리고 있습니다.”
운명 보호국은 각성자 중에서도 엘리트만을 모아둔 곳이다.
그만큼 대우도 좋았고, 실제로도 보호국에 입사할 경우 얻는 것이 많았다.
보호국과는 어떻게든 연을 만들어 두는 게 유리했다.
안나비는 시계를 힐끗 보고 말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군요. 모두에게 매뉴얼 단말기를 드릴 테니, 혹 궁금한 것이 있다면 그쪽을 확인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은 단말기를 받자마자, 다급하게 매뉴얼을 띄워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 테지만 혹 다른 것이 있을까 싶어 나도 슬쩍 살펴보았다.
언뜻 봤을 때는 전생과 차이점이 없어보였다.
사람들이 매뉴얼을 읽던 중, 한 사람이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저, 저기. 저희는 이제 어디서 자면 되나요?”
“1층에 편의 시설이, 2층에 숙소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다들 지치셨을 테니 우선 편하게 쉬시길 바랍니다.”
안나비가 떠나가자 사람들 역시 눈치를 보다가 2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신수아가 그들을 힐끗 보다 말했다.
“저도 좀 쉬어야겠어요. 당장 나가는 건 무리인 것 같고…….”
신수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 먼지와 재, 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그러면 저도 쉬러 가보겠습니다.”
“푹 쉬세요, 강림 씨. 내일 뵙죠. 오늘은…… 고마웠어요.”
신수아는 짧은 감사 인사를 남기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나는 그 감사 인사를 듣고 잠시 굳어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고작 몇 시간 전.
신수아는 나를 지키다가 죽고 말았다.
그런데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다니.
물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것은 알지만 알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왔다.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 기묘한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방 안은 고급 호텔처럼 넓고 쾌적하였으나 내게 안정감을 주지는 못했다.
나는 소파에 주저앉은 채 눈을 감았다.
수많은 시체, 나를 지키려다 죽은 비호문의 사람들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시체의 산 위에 서 있던 백영.
내가 백영을 알고 있던가?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백영의 얼굴은 기억 속에 없었다.
그녀의 언행을 보았을 때, 개인적인 원한이 있기보다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내 이능 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사주 훔치기’ 때문에 나는 몇 문파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면, 사주 훔치기는 유용한 이능이다.
만약 내가 신수아와 그 간부들을 죽이고 그 능력을 모두 흡수한다면?
배신만 한다면 단기간에 빠르게 성장을 할 수 있다.
때문에 내가 죽기를 바라는 강자들이 많았다.
내가 누군가를 죽여 능력을 훔치기 시작하면, 그들도 곧 목표가 될 테니까.
내가 성장하는 것을 두려워한 타 문파에서 나를 죽이거나 납치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그것을 신수아와 비호문이 막아주곤 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나를 지키려다 죽었다.
멍청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이런 나를 굳이 문파에 영입한 것은 이 교육시설에서 이어진 인연 때문이었다.
사실은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안다면서 나를 데려갔다.
그렇게 굳이 쓸모없는 나를 문파에 영입하고, 벌레급인 나를 위해 죽었다.
더 이상은 이런 멍청한 짓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번 생의 목표는 단 하나.
어떻게 해서든 백영을 찾아내 죽이는 것.
이번 생에는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이 교육 시설만큼 빠르게 성장하기 좋은 곳도 없다.
여기서 최대한 성장하여 나가야 한다.
이번에는 기필코, 비호문이 멸문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 * *
[‘안나비’의 호출이 들어왔습니다. 12시까지 홀로 모이시길 바랍니다.]
뇌에 직접적으로 닿는 듯한 알림음에 나는 눈을 떴다.
밤새도록 생각에 잠겨 있다가 언뜻 잠이 든 모양이었다.
가볍게 씻은 뒤 홀로 내려가 보니 어제 봤던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그 사이에는 신수아도 있었다.
내 기억보다 앳된 얼굴에 왠지 모를 낯섦과 향수를 느꼈다.
대문파의 문주인 신수아도 5년 전에는 이런 느낌이었지.
신수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시선을 느꼈는지 인사를 건넸다.
“강림 씨. 안녕하세요. 푹 쉬셨나요.”
“안녕하세요.”
어쩐지 조금 어색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홀에 있는 시계가 12시 정각을 알렸다.
그러자 1층 복도 안쪽에서 안나비가 걸어와 홀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다들 푹 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어제와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안나비가 아침 인사를 건넨 뒤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오늘은 좀 더 세부적인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여러분의 사주창을 보시면 각자 세부 항목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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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력] 1단
[체력] 1단
[민첩] 1단
[감각] 1단
[마력] 1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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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능력치는 수련, 전투, 사냥을 통해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그 외의 방법을 통해 능력치를 증가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매뉴얼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능력치는 1단에서 시작한다.
충급이든 신급이든 각성 초기에는 모두 같은 지점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등급에 따라 1단을 올릴 때 들어가는 노력의 양과 시간이 다르다.
예를 들자면 충급이 1단에서 2단까지 성장하는데 필요한 경험치가 100일 경우.
인급은 80, 귀급은 60, 용급은 40, 신급은 20이 든다.
충급인 내가 기어가는 사이 인급은 걸어가고, 귀급은 뛰어가며, 용급은 날아가는 셈이다.
때문에 강한 각성자들 중에서는…….
[사주 등급이 낮아서 약하다고 말하는 건 다 핑계일 뿐이다! 다 노력이 부족해서 그래! 노력하면 충급도 강해질 수 있다!]
같은 헛소리를 하는 놈들도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신급 1단과 충급 1단은 능력치로만 봤을 때는 큰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싸우면 높은 확률로 신급이 이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주 등급이 높으면 좋은 이능을 갖기 마련이니까.
내가 대충 매뉴얼을 읽는 사이, 안나비는 설명을 이어갔다.
“입장 후, 들어왔던 문으로 나올 경우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
“저, 저기.”
이야기를 듣던 사람 중 하나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고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눈치였다.
안나비가 상대방을 향해 물었다.
“질문이 있으십니까?”
“아뇨, 그건 아닌데……. 저, 역시 퇴소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가능한가요?”
“네. 훈련 기간 중 언제라도 퇴소가 가능합니다.”
“그러면 퇴소하고 싶습니다.”
훈련 기간 중 언제라도 퇴소가 가능하다는 말에 사람들이 작게 술렁였다.
그 와중, 퇴소 요청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급히 그를 말렸다.
“정말 나갈 거야? 조금만 참자. 응?”
“그렇지만 집에 동생이 혼자 있단 말이야!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지난 생 내가 이곳에 막 입소하였을 때,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나가는 것은 훈련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돌봐야 할 가족, 우선시해야 할 꿈 같은 것들이 있는 자들은 새로운 능력을 포기해서라도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의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옆에 서 있는 신수아를 힐끗 보았다.
그녀 역시 바깥일에 관심이 없다는 듯, 그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신수아도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퇴소 요청자와 일행의 말다툼이 길어지자, 안나비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많은 분들이 바깥에 연락을 취하지 못해 불안하실 겁니다. 이해합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조건을 하나 걸고자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눈에 빛이 깃들었다.
퇴소 요청자도 잠시 멈칫하여 안나비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첫 번째 문입니다. 이곳을 첫 번째로 클리어하신 분께는…….”
안나비가 한쪽 손을 들어 첫 번째 문을 가리킨 뒤, 말을 이어갔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