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이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어둠은 느긋한 말투로 물었다.
이곳은 말 그대로 텅 빈 곳.
이 장소를 특정할 만한 그 무엇도 없다.
하지만 나는 입을 열어 대답했다.
“신성의 세계겠지.”
-하하. 그걸 알면서 어찌 그리 자신만만하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검은 구.
그것은 내 앞으로 날아오더니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건 맞지만, 너는 결코 나를 이길 수 없다.”
검은색의 장발.
냉정한 인상의 사내.
어둠은 사람의 형상을 한 채로 날 보았다.
“그게 너의 본모습인가?”
“본모습?”
그는 내 질문에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치 생소한 걸 만진다는 듯, 이상한 질문을 들은 듯한 태도였다.
“본모습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 내가 인간일 적의 모습이다.”
“상당히 재수 없게 생겼군.”
“지구에서 남자가 남자보고 재수 없다고 하는 건 칭찬이라던데?”
그는 빙글 웃으며 답했다.
“글쎄. 그렇게 지구에 대해 잘 아나?”
그와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 동시에 뒤로는 보이지 않는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나와 그의 뒤에서 각각 검은 안개와 황금빛의 안개가 풍겨 나오고 있다.
그것은 기운이니 뭐니 하는 수준을 넘어 우리가 가진 힘의 본질.
신격과 신격.
모든 것을 내보이고 마주한 이상 창과 칼, 주먹과 발이 오갈 이유는 없었다.
신의 싸움이란 이런 것이다.
상대의 힘을 흩트리고, 격을 잡아먹거나 무너트리는 것.
그것에는 폭력적인 행위란 전혀 없다.
신은 무엇으로 죽는가.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닐 때 죽는다.
난 백룡과 뇌룡의 격 그리고 지룡의 것까지 일부를 흡수했다.
마지막에는 흑룡까지 그 격을 내게 넘겼다.
비록 그들 모두 온전한 신은 아니었으나 그 양만은 광대한 편이었다.
반신과 신의 사이에 위치한 이들의 격 네 개.
반대로 어둠은 온전한 자신의 격 하나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 우위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양으로만 따지면 내가 어둠을 압도하고 있었으나, 질을 따지자면 내가 밀렸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네 개의 격을 온전하게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으니까.
어둠은 내 질문에 턱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익숙하다라?”
그는 자신의 얼굴을 쓱 쓸어내렸다.
삽시간에 그의 얼굴이 바뀌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나도 익히 아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호. 본 적 있나 보군?”
과거 도플갱어의 구슬을 통해 한 남자의 기억을 엿본 적이 있었다.
어둠이 바꾼 얼굴은 바로 그 게임사 직원의 얼굴이었다.
“회사도 세우고, 이렇게 유저까지 훌륭하게 모집한 운영자한테 지구를 아냐니? 너무한 질문인데?”
그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애초에 내가 그대들을 어떻게 이곳으로 부른 건지 잊은 건가? 난 지구로 넘어가 충분히 시간을 들여 조사한 후 그대들을 부른 거다.”
콰릉-.
잠시 내 격이 흔들린 틈을 타고 그의 격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난 인상을 쓰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멍청하게 반절을 뺏긴 거고 말이야?”
내 질문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의 격이 흔들린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아직 힘을 다루는 것에 미숙해 감정에도 흔들리는 나와 달리, 그는 노회한 신이었으니까.
“잠시 어울려 주려 했는데 별로 재미없군.”
그는 몸을 휙 돌렸다.
후욱-
그의 몸이 다시 흩어지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나도 그 모습을 보며 그가 했던 것을 분석하고 똑같이 따라 했다.
후우우우-.
이 공간에서 육체는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일 뿐이다.
애초에 이곳에는 육체고 뭐고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나도 몸을 흩어서 내 격으로 넘어갔다.
팔과 다리 대신 황금빛의 안개가 내 몸이요, 팔이요, 다리다.
‘어마어마하군.’
나는 맞은편 적의 군세를 보았다.
새카만 안개.
그 입자 하나하나가 어둠의 의지요, 격이며, 그를 이루는 구성 요소일지니.
그 자체로 그것은 군세나 마찬가지였다.
어둠의 군세가 나를 향해 다시 물밀듯이 밀려왔다.
나는 황급히 나의 몸, 즉 나의 군세를 움직였다.
현재 내 힘은 총 네 개로 나누어져 있다.
똑같은 황금빛이라도 은은하게 다른 색을 띠고 있었는데.
우선 아주 진한 황금빛. 제일 크고 단단한 힘이다.
그다음은 하얀빛을 띠고 있는 것. 백룡의 힘이다.
또한 검은빛을 띠는 힘이 있었고, 연한 갈색빛을 띠는 힘이 있었다.
‘하나로 합칠 시간은 없다.’
본래대로라면 모든 힘을 녹여서 나의 힘으로 만들어야 했으나, 전투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그런 걸 할 여유는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 장점을 살릴 방법을 생각했다.
후우우우웅-!
난 내 힘을 뇌, 백, 흑, 지라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 뇌의 힘을 앞으로 쭉 뻗었다. 밀려들던 어둠의 힘이 그것과 맞부딪쳤다.
하지만 딱 봐도 중과부적으로 보였다.
실시간으로 격이 깎여 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나는 바로 흑과 지를 양옆에 붙였다.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던 어둠의 힘이 주춤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뇌의 힘 중간중간에 얇은 구멍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백을 돌진시켰다.
후우우우웅-!
백의 힘이 의도적으로 낸 구멍을 통과해 어둠의 힘 곳곳에 파고들어 갔다.
순식간에 어둠의 힘이 내게 넘어왔다.
이것은 격과 격을 놓고 겨루는 줄다리기.
상대의 격이 낮아지면 내 격이 높아지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난 한번 기세를 탄 김에 백으로 있는 힘껏 어둠의 내부를 유린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화악!
판이 바뀌었다.
방금 내가 그린 장면은 힘을 다루기 위해 인위적으로 상상했던 장면일 뿐.
실제 다툼은 그와 다른 방식이었다.
한데 어둠이 아예 그 판 자체를 뒤집어 버렸다.
‘크윽…….’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 전까지는, 예를 들면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됐다.
넓은 판 위에서 서로의 집을 먹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둠이 그 판을 수십 개로 늘려 버렸다.
수직으로 수백 개의 층이 생겨나고, 자연스레 격도 사방으로 흩어졌다.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수백 개의 바둑판.
수천, 수만 개의 바둑알.
그것을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아아……!’
비명을 토해 내고 싶다.
한데 입에선 아무런 소리도 안 난다. 아니, 나는 입이 없다.
나는 어둠의 자신감이 무엇에서 기원한 건지를 똑똑히 느꼈다.
난 신의 힘을 지녔다.
신과 같은 무력을 부릴 수 있고, 기적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는 신이라 할 수 없다.
신의 눈이 하나라면 신도들을 어떻게 살필 수 있겠는가?
신의 손이 하나라면 어떻게 신도들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할 수는 있어도, 인간이 될 수는 없었다.
돼서도 안 됐다.
풍룡이나 흑룡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신이 아닌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개 개체와 개체들의 집단을 관리하는 관리자 사이에는 그만한 차이가 있다.
나는 이 순간 신의 자리에 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았기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수백 개의 판이 이제는 수천 개를 넘어 수만 개에 이르렀다.
내 힘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어둠의 힘과 다투고 있다.
그 수가 더 많은 만큼 확 밀리진 않았으나, 계속 이대로 손을 놓고 있다간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어둠은 말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말을 할 수 없다는 게 옳겠지.
신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미 깨달아 버렸다.
그렇기에 두려움을 느꼈다.
눈이 하나고, 팔다리, 몸이 하나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혼자서 수백, 수천, 수만의 몫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어둠과 나의 바둑판을 보았다. 내가 놓아야 할 수는 정해져 있었다.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리 없는데도 난 눈물을 흘렸다.
양팔과 다리를 넓게 벌리고.
나를 형성하던 ‘자아’를 흩트리고.
나를 버렸다.
추억, 감정, 애정, 고집, 욕심, 분노, 즐거움, 슬픔.
모든 것이 흩어지고 흩어져 나는 가루가 되었다.
한 번에 열 개의 판을 보는 것도 힘들었던 내가 백 개, 천 개, 만 개의 판을 동시에 움직인다.
그리고.
나는 사라졌다.
* * *
새로운 신이 태어났다.
네 개로 나누어져 있던 격이 한데 모여들며 밝은 빛을 발한다.
무(無)의 공간에도 빛은 있을지니.
빛은 신의 탄생을 이름이요, 대륙의 은총이로다.
어둠의 힘은 밝은 빛 앞에 마치 먼지처럼 흩어졌다.
위태롭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밀려난다.
하지만.
어둠은 절대 사라지진 않는다.
‘빛’이 태어났으니 어둠도 부활한다.
어둠은 처음부터 무엇을 노려 왔는가? 자신의 부활을 원했다.
부활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빛’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빛이 생겨났으니 이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
당연히 그것을 집어삼킬 것이다.
집어삼키고 흡수하여 이 대륙의, 이 세계의 오롯한 신이 되어.
유일신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끝났군.”
허공에서 홀연히 인간의 형체를 갖춘 어둠은 밝은 빛을 보았다.
새로운 신이 탄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다툴 필요는 없었다.
신이 된 후에 자아를 갖는 건 아주 오래 걸린다.
어둠만 해도 자아를 갖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그렇기에 저것은 어둠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어둠은 웃으며 그것을 보았다.
순수하고 깨끗한 신.
때 묻지 않고, 그렇기에 경계심이라곤 하나도 없는 신격.
그것이 무방비로 자신의 앞에 놓여 있었다.
어둠은 손을 뻗었다.
* * *
여긴 어디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하얀 빛이 가득한 공간.
금방이라도 나 자신이 소멸될 것 같은 밝은 빛.
나는 이유도 모르고 엉엉 울었다.
왠지 모르게 슬픔이 복받쳐 올라 아이처럼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진정되어서 벌떡 일어났다.
‘난 없어지는 게 아니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았다.
난 왜 없어진다고 생각한 거지?
나는 그 의문을 곰곰이 생각하며 걸었다.
주변이 온통 환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한 지점을 향해서 꾸준히 걸어갔다.
반짝-
저 끝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주변을 비추는 빛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걷다가 뛰었고, 그것을 잡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화악-!
그리고 어느 순간 손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검은색의 구슬.
‘구슬?’
구슬 세 개가 손에 잡혀 있었다.
나는 신기해서 그것을 이리저리 굴렸다.
한참 그러고 놀고 있자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야! 왜 혼자 노냐?”
난 누군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노란 머리를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아니, 그 옆에는 갈색 머리를 한 소년과 하얀 머리를 한 소년도 있었다.
“같이 놀자!”
소년들이 다가와 내게 어깨동무를 했다.
그제야 나는 나도 어린 소년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 구슬 가지고 있네! 구슬 놀이 할까?”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곧 같이 어울려 놀았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주변의 소년들이 어느새 청년이 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
어쩐지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기도 했고, 하나도 흐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노란 머리를 한 소년이 말했다.
“더 놀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
“그러게. 미안해.”
하얀 머리 소년이 이어서 말했다.
“미안하다. 너한테 모든 걸 떠넘겨서.”
“나도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었는데… 너무 일찍 가서 미안해.”
둘이 다시 내게 말을 했고, 조용히 있던 갈색 머리 소년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뭐, 네 얼굴을 한번도 제대로 못 보긴 했는데, 지금 보니까 꽤 괜찮은 놈인 것 같아. 뭐 본 것도 없는데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소년은 그리 말하며 큭큭 웃었다.
“모든 게 끝나면 모든 걸 내려놔도 돼.”
“풍아, 뒷일은 맡아서 책임질 거야. 넌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
“그, 힘내라.”
그리고 소년들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미안해.
-하지만 부탁해.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 * *
눈을 떴다.
그리고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둠을 마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