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풍룡은 초록빛 머리칼을 미친 듯이 나부끼며 내 근처에 멈춰 섰다.
“먼저 연락을 하려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됐군.”
그녀는 내가 든 검을 슬쩍 보며 말했다.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난 불쑥 치민 질문을 참을 수 없었다.
“당신이 우릴 소환한 건가?”
“그래.”
그녀는 선선히 내 말에 대답했다.
“힘이 부족했고, 그러니 소환했다. 이유는 그것뿐이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리 말하며 악마를 가리켰다.
“그러니 싸워라. 싸우지 않으면 너도, 네 동료도 모두 죽을 테니까.”
그녀는 그 말과 함께 훌쩍 날아가 버렸다.
빠득-.
난 이를 갈며 손을 들었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지금은 대화를 나눌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후웅!
악마를 향해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흑룡은 처음에 비교해 많이 지쳐 보였지만, 풍룡이 가세하자 저울추는 우리 쪽으로 확 기울었다.
‘용은 용이라는 거군.’
나는 싸우면서도 풍룡이 힘을 쓰는 걸 보았다.
또한 그녀의 별명이 ‘광룡’이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가 힘을 쓸 때마다 바람이 미친 듯이 나부꼈는데, 그 상태로 계속 공격을 퍼붓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멀쩡해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쿵-!
풍룡의 몸 주위로 짙은 초록빛 바람이 불어오더니 그녀의 몸이 흐릿하게 변했다.
쿠우웅-!
그 가운데에서 느껴지는 거친 진동. 동시에 그녀의 몸이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건.
-크라라아아아아아-!
초록빛 동체의 거대한 용.
그래. 그녀도 흑룡과 같은 용이다. 저게 본모습일 터.
그녀는 바로 어둠에게 달려들어 팔뚝을 물어뜯었다.
-크아아악! 이 버러지들이!
어둠은 진저리를 치면서 주변을 둘러싼 검은 안개를 더욱 짙게 풍겨 올렸다.
수세에 몰릴수록 오히려 안개는 더욱 강해지는 느낌이다.
처음엔 전격을 두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멀쩡했는데, 지금은 따끔따끔하다.
“신이시여-!”
반면에 제국 기사단의 상태는 꽤 심각해 보였다.
몇몇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안개에 닿을 때마다 몸을 크게 꿈틀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게 보였다.
확실히 이 안개는 보통이 아니다.
놈의 본체보다 저게 더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일반인이 저 안개와 접하면 바로 죽을지도…….
그래도 풍룡이 합류하고 난 이후로는 그들에게 보호막을 내렸는지 한결 편해진 듯했다.
-크으으으으!
어둠은 자신의 공격이 큰 효과를 얻지 못하는 걸 보고선 비명과도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오너라!
놈은 돌연 손을 뻗었다.
그의 양손에 뭉치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몸을 피하려 했지만, 다음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나의 권속들이여!
그의 손이 지면을 강타한다.
동시에 그 기운이 어딘가로 빠르게 날아갔는데, 곧 그게 무엇을 노린 건지 알 수 있었다.
콰아앙!
저 멀리에서 폭음이 터져 나오더니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온다.
그의 권속들이 전신에 안개를 두른 채로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다.
“알뜰살뜰하게도 써먹는구먼.”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놈들도 있었지만, 안개에 둘러싸인 놈들은 대부분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
강제로 폭주를 시킨 건가.
-크아아아아악!
심지어 사람의 모습을 한 이들조차 제대로 된 언어를 내뱉지 못하고 있다.
그저 미친 듯이 달려와.
콰아아앙-!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붓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에인헤야르들을 그들을 막는 쪽으로 돌렸다.
놈들의 공격은 명백히 풍룡과 흑룡의 거체를 향해 있었다.
아슬아슬한 균형을 깨트릴 수는 없으니 막아야겠지.
-부족해! 이걸로는 힘이 부족하다!
그때 풍룡이 비명을 지르듯 크게 외쳤다.
난 바로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겉보기로는 두 용이 어둠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 같은데, 둘의 표정은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난 우선 공격을 막 퍼부으면서도 주변을 둘러봤다.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것이…….
두두두두두-!
인상을 찌푸리고서 전황을 살피는데 어디선가 또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곧 그들의 정체를 알아챘다.
-키에에에에엑!
-크야아악!
비명을 지르며 짓밟히는 마물들.
사방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병력들.
-아우우우우우우!
울프 라이더들 그리고 일전에 흡수했었던 산양 고블린들이 돌진해 온다.
그들의 선두에 있는 건 이번에 울프 라이더조에 합류시켰던 트렌.
그는 바로 펜리르의 등에 탄 채로 늑대와 산양들을 이끌고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 바로 옆에는…….
“이호진! 내가 왔다!”
황금빛 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해 오는 남자.
그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그의 앞을 막고 있던 마물들이 갈가리 찢긴다.
뒤에는 그의 기사들과 최정예 병력들이 무기와 자신의 손톱, 발톱을 이용하며 마물을 말 그대로 갈아 버리고 있었다.
그다음 변화는 바로 어둠의 발밑에서부터 시작됐다.
드드드.
어둠의 발치 땅이 갑자기 거세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내 땅을 뚫고서 솟아오르는 초록빛의 기둥.
촤라라라락!
아니, 그것은 바로 거대한 식물이었다.
난 곧바로 누구의 힘인지 알아챘다. 내가 던전에서 구출했던 소년.
거대한 식물을 다루던 소년의 힘이었다.
스아아아아아아-!
그게 끝이 아니다.
땅을 타고 회색의 그림자들이 몰려들어 어둠의 몸을 타고 올랐다.
거칠게 몸부림치던 악마의 관절에 그림자가 몇십 개씩 달라붙어서 움직임을 제한한다.
순식간에 늘어난 원군 탓에 전황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키루루루루루-!
난 하늘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곳에는 뇌조가 마틴, 소년 그리고 그림자 요정 몇을 태우고 있었다.
“오! 자네, 이미 신의 힘을 이었구먼 그래?”
뇌조가 내 옆으로 날아와 멈추었다. 그 위에 타고 있던 장로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그가 말했던 잊힌 신.
그게 누군지는 백룡의 힘을 물려받으면서 알 수 있었다.
백룡은 어둠을 봉인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경에 틀어박혔었다.
그의 신도들은 자신의 신을 잃어버린 채 대륙을 떠돌아다니게 된 거고.
“어쩐지 신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더라니. 그것 때문에 나도 직접 나섰네.”
그와 얘기하는 건 반가웠지만, 시간이 넉넉지 않았기에 다시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런데 장로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리고 그 힘 때문에 옛 형제들도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 같더군.”
“옛 형제들이요?”
“그래. 저쪽을 보게나.”
난 장로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난 그곳을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마물들을 상대하고 있던 인원들이 여기까지 왔나 궁금했는데, 그 답이 그곳에 있었다.
“잊힌 신의 사제들!”
잊힌 신의 사제들. 일전에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았던 그들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부전선에서 공멸했던 게 아니군……!’
오랫동안 소식을 접하지 못한 데다가 신성 제국 연합에도 없길래 이미 전멸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수가 줄었을지언정 강력한 기세를 보이며 마물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 싸움.”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리가 이긴다.”
내 모든 힘.
단순히 나 하나의 힘이 아니라 지금까지 연결되었던 모든 인연이 이 자리로 모였다.
최후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그들이 나에게 보내는 존경, 믿음, 동료애, 신앙, 모든 긍정적인 감정.
그것들이 소용돌이쳐서 내게 빨려 들어온다.
전쟁은 격렬한 감정의 용광로라 할 수 있다.
피가 튀기고 살점이 휘날리는 전쟁. 그 끔찍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고, 반대로 고양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어째서 어둠이 이 전장의 한복판을 최후의 전투 장소로 정한 건지 깨달았다.
전쟁에서 터져 나오는 우울한 감정. 공포.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그를 강하게 한다.
모든 밝은 것들의 대척점에는 어둠이 있으니까.
하지만 나도 다른 이들에게서 힘을 얻는다.
그것을 전장의 한복판에서 모든 이들이 내게 보내는 감정을 받아들이며 느꼈다.
후우우우우웅-!
강렬한 힘.
내 내면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힘과 바깥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힘이 합쳐진다.
난 무기의 형태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 형(形)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손에 들려 있던 전격의 창과 검, 건틀렛을 놓았다.
그것이 빛의 입자로 흩어졌다가 다시 내 몸으로 모여든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신’에게는 각자 강력한 무기가 있다.
나의 힘은 전격.
한쪽 손에 강렬한 전격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다른 힘은 백룡이 다루던 힘. 반대 손에 하얀빛이 모여들었다.
난 홀린 듯이 어둠을 향해 날아갔다.
막 두 용과 난투극을 벌이고 있던 어둠의 눈이 정확히 나를 향했다.
-어떻게 벌써!
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난 그에게 다가가 양손을 펼쳤다.
무기에 형태는 필요 없다.
신의 싸움은 본래 그런 것이고, 나는 그걸 깨달았으니.
앞으로 벌어질 전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싸움에 들어가기 직전 난 주변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쿵! 쿵! 쿵!
어느새 크룩이 그 거대한 덩치를 앞세워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난 그녀를 알아보았다.
진세연.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그녀는 이전보다 압도적인 강함을 보이고 있었다.
확실히 악마 계약자들은 성장이 빠르다.
그 크룩과 거의 동수를 이루고 있을 정도니.
난 시선을 돌렸다.
케륵도 자신의 권속들을 이끌고 마물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난 시야를 돌렸다.
흑룡과 풍룡.
그들의 눈이 나를 향한다.
나는 그 둘이 왜 어둠을 밀어붙이면서도 완전히 없애지 못하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이미 일찍이 신의 ‘격’을 잃었다.
신의 자리에서 반신의 자리로.
그들이 자리한 위치는 딱 그 정도이다.
반신에 불과한 이들이 신을 죽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밀어붙일 수는 있어도 죽이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어둠을 죽이는 건 나의 몫이다.
난 어둠을 향해 다가갔다.
-크으윽! 안 돼!
어둠이 몸부림을 쳤다.
난 그것을 보며 한 가지 감정을 느꼈다.
‘무섭군.’
무섭다.
그의 힘이 온전히 보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반쯤 열린 신의 눈으로 그를 보기에 알 수 있는 감정이었다.
저렇게 처참하게 당하고 있는 건 어둠의 본모습이 아니다.
그는 그저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자신이 원하던 수확물이 완전히 무르익기를.
그렇기에 그가 지금 두려워하는 건 나의 ‘불완전한’ 각성.
바로 지금처럼.
나는 웃으며 그의 얼굴 앞으로 다가갔다.
양손을 그의 머리 위에 올리고서 눈을 빛냈다.
-이호진.
내 등 뒤에서 흑룡이 말을 걸어왔다.
-이 힘도 가져가라.
그의 말과 함께 내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밀려 들어온다.
그렇군.
검은 구슬이 바로 이런 용도였나.
난 그가 전해 주는 힘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신과 신의 싸움.
격과 격이 부딪힌 이후엔 단 한 명의 신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난 모든 육체와 굴레를 벗어던지고 감았던 눈을 떴다.
고요하다.
이곳엔 어떤 소음도 없다.
텅 빈 곳.
난 그곳에서 어둠과 단둘이 마주했다.
-예상보다 빠르구나.
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