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창을 뻗는다.
회수하고 검을 휘두르고, 건틀렛으로 악마의 몸을 두드린다.
악마의 거대한 몸에는 상처가 가득하고 곳곳에 전격이 들끓고 있다.
흑룡은 제국 측에서 붙들고 있으니 유리가 더 유리한 상황이다.
분명히 그럴진데…….
“정말 망할 새끼구만.”
난 이를 아득 갈며 악마를 노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몸 위를 감싸고 있는 검은 연기를.
그리고 악마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발광을 하는 걸 보았다.
-이거 놔라! 이건, 이건 계약 내용과 다르지 않느냐!
악마는 마치 무엇에 저항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뒤틀고 있었다.
그가 저항할 만한 상대가 누가 있을까.
‘어둠… 놈이겠지.’
녀석은 분명 ‘계약’이라고 했었다. 결코, 어둠의 일방적인 명령을 듣는 게 아니라는 소리.
그리고 놈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현재 놈은 몸을 감싼 저 연기, 어둠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듯했다.
또한, 그렇기에 난 지금 공격을 망설이고 있다.
악마는 분명 막강한 상대다.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나와 에인헤야르 전체가 달려들어 겨우겨우 몰아붙이고 있으니까.
만약 에인헤야르가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삼분의 이는 죽어 나갔을지 모를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딱 거기까지다.
굉장히 힘들긴 하지만 이길 수 있는 상대.
감당할 수 있는 상대.
그런데 저 ‘어둠’이란 놈이 과연 그런 상대를 데려온다고 온갖 폼을 다 잡았을까?
어쩌면 저 검은 연기 자체가 놈의 노림수가 아니었을까.
더 공격할수록 놈의 작전을 도와주는 격이 될까 봐 고민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놈을 계속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난 결정을 내렸다.
“에인헤야르! 머리를 노려라!
악마들은 머리가 터진다고 죽는 건 아니지만, 놈은 핵이 머리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어둠이 무언가 술수를 부리려 한다면 그 전에 죽인다.
그것을 목표로 삼아 나도 몸을 날렸다.
강력한 한 방.
바람을 불러 모아 내 뒤로 압축한다.
나는 전격이 된다.
달빛을 온몸에 받아 그 힘을 끌어내고.
넓게 퍼트렸던 백룡의 힘을 끌어모아 내 신체로 그 범위를 국한시켰다.
모든 걸 끌어모아 악마의 머리로 내달린다.
내 힘과 에인헤야르가 든 수십 개의 무기가 동시에 놈의 머리에 작렬한다.
콰-.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강렬한 반발감이 날 쭉 밀어내었다.
간신히 눈을 뜨자 그 파괴의 결과물이 눈앞에 드러났다.
악마의 머리부터 가슴팍까지.
본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공격이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먹혀든 것이다.
그런데…….
녀석의 몸 위로는 여전히 검은 연기가 들끓고 있었다.
없어지기는커녕 더욱 맹렬한 기세로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어깨가 생겨나고, 목이 생겨나고 머리가 생겨난다.
그걸 막으려 우리가 행한 공격은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결국 악마, 아니 어둠이라 해야 할까?
그것이 다시 눈을 떴다.
녀석은 주변을 보다가 입을 쩍 벌렸다.
-크하하하하하하!
머리를 울리는 광소에 난 인상을 찌푸렸다.
-고맙구나. 덕분에 몸을 차지하기가 더 쉬워졌어.
놈은 정확히 나를 보며 그리 말했다. 그는 자신의 손과 발을 까딱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이런 몸으로 고작 그렇게밖에 못 싸우다니. 보면서 얼마나 답답했던지. 자, 시작해 볼까.
녀석은 말을 끝내자마자 손을 움직였다.
후우우우우우웅!
그를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공기, 그리고 다시 그가 손을 휘두르자 반대로 무언가가 퍼져 나간다.
바로 검은 연기다.
-크르르르르르아아!
-키에에에에엑!
그 검은 연기에 닿는 마물들이 미친 듯이 발광하며 소리 지르기 시작한다.
한눈에 봐도 급격한 변화였는데, 놈들은 전보다 더 미친 듯이 상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정신만 바뀐 건 아니고 그 신체 능력도 곱절로 강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는 돼야 균형이 맞잖아?
악마의 몸을 차지한 ‘어둠’은 그리 말하며 날 보았다.
-그럼 우리도 슬슬 시작하지.
그 말과 함께 거대한 덩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뻗으면.
우우우우우웅!
쾅!
보랏빛의 기운이 광선처럼 날아들었다.
또한, 그가 팔과 다리를 휘두를 때마다 검은색과 보랏빛이 합쳐진 연기가 피어올랐는데, 이전의 사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기운이었다.
강력하다.
지금까지 칠 성이니, 팔 성이니 했던 모든 구분을 어린애 소꿉장난처럼 만드는 위력.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고, 초월적인 존재마저 뛰어넘어.
신의 힘이 무엇인지.
그는 단순히 주먹을 휘두르고 팔을 뻗는 것만으로 그것을 똑똑히 알려 주었다.
그의 움직임은 물리 법칙을 무시했고, 그가 내뿜는 기운은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반대로 마물들에겐 기운을 북돋아 주고 말이다.
이대로는 조금… 위험할지도.
처음으로 마음이 흔들리던 그때 돌연 어둠이 의문을 표했다.
-응?
그는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뭐냐, 도움이라도 청하려는 것…….
그리고 나도 똑똑히 보았다.
흑룡이 다짜고짜 어둠한테 아가리를 벌린 채 몸통 박치기를 하는 걸.
* * *
호진은 물론이고 흑룡과 싸우던 이들조차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굳었다.
제국의 기사들.
그들도 악마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빨리 흑룡을 처리한 후 도우러 가고 싶었지만, 흑룡은 실로 범상치 않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도 몇 번 제국을 공격해 왔던 흑룡을 상대해 봤지만, 그건 엄연히 분신.
본체와는 비교도 안 되게 약했다.
그리하여 그들도 고전하고 왔던 와중, 갑자기 흑룡이 악마가 있는 곳으로 날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흑룡이 호진을 노리는 거로 생각한 그들은 필사적으로 막아 세웠다.
그런데도 흑룡은 필사적으로 그 공격을 뚫고서 날아갔다.
그리고 악마에게 몸통 박치기를 했다.
“저건 또 뭐야…….”
그들은 악마와 흑룡이 갑자기 뒤엉켜 싸우는 걸 멍하니 보았다.
갑자기 흑룡이 미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가?
별의별 생각들이 그들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찌 됐든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고 그들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모두! 악마를 향해 돌격!”
그리하여 기사단장, 제국의 공작이기도 한 무신 아슈바르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에 기사단은 언제 당황했냐는 듯 일사불란하게 악마를 향해 날아갔다.
그들을 태운 그리핀과 드레이크는 용감하게 악마를 향해 돌진했다.
악마의 근거리에 있던 호진도 놀라기는 했지만, 결정을 내리고서 흑룡을 거들어 악마, 아니 어둠을 공격했다.
-뭐 하는 짓이냐아아아아!
어둠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흑룡과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당황한 기색을 보인 적 없던 어둠의 외침에 호진은 흑룡의 배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는 걸 눈치챘다.
-크라라아아아!
흑룡은 어둠이 뭐라 말하든 신경 쓰지 않고서 열심히 그를 물어뜯었다.
호진은 어둠에 다가가 열심히 창을 휘둘렀다.
-네놈, 네놈이 뭔가 술수를 부렸구나!
어둠이 갑자기 고개를 획 틀더니 호진을 향해 소리쳤다.
호진은 창을 휘두르면서 대답했다.
“응? 어, 그래. 내가 시켰어.”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우선 태연하게 허세를 부렸다.
-크아아아악!
흑룡은 적일 땐 몰랐으나 같이 어둠을 공격하는 지금은 아주 든든한 동료가 되었다.
처음 기습을 가했을 때처럼 압도적이진 못했지만, 호진을 비롯해 기사들이 합류하자 어둠은 수세에 몰렸다.
호진은 창을 어둠의 머리를 향해 내려찍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것은 분명 신화적인 전쟁일 것이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구성원 몇몇은 단신으로 왕국 하나는 밀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강자.
그야말로 모든 대륙의 역량이 이곳으로 모인 상태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예 다른 전투와 다른 양상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크라라아아아!
-크아아악!
“모두 옆구리를 노려라!”
전투는 치열했다.
그러나 어쩐지 호진은 지금의 전투에 과거 ‘이무기’를 사냥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이무기는 그 당시에는 강력한 괴수였다.
거의 패배 직전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녀석을 몰아붙여 승리했다.
이번 전투는 어떻게 될까?
그때처럼 결국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할 것인가?
아니면 이무기의 뱃속에 삼켜졌던 그때의 나는, 이번엔 저 어둠의 아가리에 삼켜져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할 것인가.
더는 날 도울 초월적인 존재는 없다.
뇌신의 유지는 모두 받아들였고, 나는 이제 그의 힘을 이은 채 내가 그 초월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
온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모든 플레이어의 귀환을 위해, 나의 귀환을 위해.
모든 것이 걸린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
-모두 목의 핵을 노려라!
그때 처음으로 흑룡이 모두에게 소리쳤다.
그 말에 모두 의심의 여지 없이 어둠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나도 에인헤야르와 함께 그 부분을 공격했다.
-크어어억!
악마의 거대한 몸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흑룡은 목덜미를 물어뜯은 채 위아래로 흔들며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한데 내 귓가로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호진.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흠칫 놀라 주변을 보니, 다른 이들은 전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너한테만 말하는 거다. 잘 들어라.
“흑룡, 네가 말하는 건가?”
-그래, 곧 어둠이 점령한 육체가 힘을 다하고 쓰러질 거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끝이 아니라고?”
-그래.
“그럼?”
-녀석의 육체가 소멸되는 순간. 그때가 녀석이 노리던 때다. 그 순간을 이용해 녀석은 주변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서, 다시 그 결과물을 이용해 자신의 육체를 완성하려 할 거다.
난 인상을 찡그렸다. 흑룡이 갑자기 말을 걸어온 건 그렇다 치고 그 내용 때문이었다.
“그럼 죽이면 안 되는 거 아냐?”
-아니, 어차피 벌어질 일이다. 놈은 최적의 순간에 몸을 터뜨릴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아직 힘이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앞서서 터트리는 거다.
“으음. 그래.”
정확한 원리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대충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알았다.
“막아야겠군.”
-그래. 백룡의 힘. 그리고 내가 힘을 보탠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준비하고 있어라.
난 우선 그의 말에 따라 힘을 끌어모았다. 모든 기운을 백룡의 힘을 구연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있냐 없느냐를 떠나서 백룡의 힘은 애초에 적을 억제하는데, 최적의 힘이다.
적어도 어둠을 상대로 사용해서 나쁠 건 없다.
하지만 그래도 물어보긴 해야지.
“근데 왜 갑자기 우릴 돕는 거지? 넌… 배신을 한 게 아니었나?”
-배신이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뭐, 당장 설명해 주기엔 시간이 부족하니 네가 대신 말해라.
뭔 소리야.
되물으려는데 저쪽 하늘에서 무언가가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초록빛 머리칼을 한 여자.
난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몇 번이나 봤었으니까.
“풍룡!”
그녀가 전장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