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신성-제국 연합의 위치는 제국과 그리 멀지 않다.
폴그룬과 제국의 중간쯤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제국에 훨씬 치우쳐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게 제국의 영토는 실로 방대해서 연합 근처의 황야에도 도시가 하나 있기 때문이다.
마을들은 꽤 많았고 말이다.
뭐, 결론은…….
“제대로 작정했었군.”
난 임시로 마련된 막사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전투가 끝나는 대로 제국의 도시 한 군데로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곧 예상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삼 분의 일이라.”
단 하루 만에 제국의 삼 분의 일이 쓸려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전략가라는 남자와 괴물들에 대한 소문도 있었다.
“쯧.”
사실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은 아니다. 애초에 제국은 내 동맹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니까.
또한 제국이 그렇게 허무하게 밀려 버릴지도 몰랐다.
아니, 지금까지 그렇게 꽁꽁 싸매 가면서 틀어박혀 있던 놈들이 한 번에 그렇게 확 밀려?
“후우…….”
난 분을 삭이며 그다음 정보를 떠올렸다.
다행히 제국은 하룻밤 만에 무너지진 않았다.
듣기로는 황실 소유의 기사들이 전선으로 파견되었고, 전선은 고착 상태라고 한다.
내 귀에는 전략가가 또 무얼 꾸미고 있다는 걸로 들리긴 하지만.
어찌 됐든 우리도 다시 거취를 정해야 한다.
우선 제국 측에 연락을 넣어 두긴 했다.
전략가 놈들도 이번에 확실히 승부를 볼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의 전력은 거의 전부가 이곳에 있다.
나도 지지부진하게 전쟁을 이어 가는 것보단 이번에 확실히 끝을 보고 싶고.
전쟁이 길게 이어지면 피해가 더 커질 테니까.
난 반나절 동안을 더 생각한 후 결론을 내렸다.
“우리도 제국으로 방향을 돌려 전장에 합류한다.”
파격적인 결정 속도였고, 어느 정도의 반발도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 말에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그러면 계획들을 더 상세하게 짜야겠군요.”
오히려 힘든 계획이니만큼 더 상세하고 확실하게 계획을 짜야 하지 않겠냐며 나를 재촉했다.
“그래.”
우리는 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그러고 보면 우리 왕국, 아니 제국의 구조도 상당히 기형적이긴 하다.
난 웬만한 모든 백성을 병사로 만들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노인, 아이들처럼 싸우기 힘든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수인 왕국이 자리를 잡은 엔트의 숲으로 이동시켰다.
즉 남은 우리 군은 지킬 곳 없이 들이박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보급이 자체적으로 가능하니까.’
우리는 식량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품을 상점을 통해 살 수 있다.
나도 시스템이 상당히 어그러지긴 했지만, 다행히 상점은 정상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보급을 받지 않고 이동하기에 속도도 빠르고, 거점이나 보급로를 방어할 필요도 없다.
‘어찌 보면 마물 군세랑 아주 많이 닮았네.’
난 급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피식 웃었다.
놈들도 보급로고 거점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물량 공세를 하는 놈들이지 않은가.
거기다가 이번에는 자신들의 병력까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해 보자고.”
회의는 빠르게 끝이 났다.
애초에 계획 자체가 빠른 대응을 요하는 만큼 길게 이어질 수가 없는 회의였다.
우리는 곧장 정해진 바를 연합 측에 통보했다.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합류가 있었다. 물론 연합 측 전부가 합류한다는 건 아니었다.
합류한다는 건 신성 연합 측의 고위 사제, 성기사들이었다.
“괜찮겠습니까?”
그들은 아주 강한 전력이었다. 그렇기에 연합 측에서도 별로 놓아 주고 싶지 않을 테고.
“예. 저희는 신의 말씀을 행해야 하는 바. 그분들의 말씀이 모두 제국 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들이 정말 신의 계시라도 받은 건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걸 확인해 볼 방법도 없고.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전력이 느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니.
우린 몇 시간 후 완전히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연합의 요새를 떠났다.
“건투를 빌겠습니다!”
연합, 그중에서도 제국의 황태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배웅했다.
사실 그도 내게 몰래 와서 참전을 원한다고 하긴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물론 그도 강한 전력이긴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는 연합 측에서 중요한 자였다.
사제나 성기사들이 빠지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반발이 있을 터.
그렇기에 그는 내 거절을 받아들이고서 배웅하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가자!”
우리는 제국으로 향하였다.
* * *
“멀지 않았군.”
“그렇지.”
“애초에 이렇게 길게 끌 필요가 있었나?”
“그렇지. 길게 끌 필요가 있었지. 아직도 내가 말한 계획을 못 알아들은 건가?”
“흐음.”
두 남자는 서로를 빤히 보았다.
다시 말을 꺼낸 건 말총머리의 사내였다.
“이제 모든 등장인물이 모인다. 이건 최후의 전쟁이야.”
“그렇지.”
“그 전쟁에서는… 새로운 별이 태어날 거다. 아주 밝게 빛나는 별이.
* * *
우리는 비교적 멀쩡한 제국의 영토를 넘어 마물들이 휩쓸고 간 곳에 들어섰다.
“끔찍하군.”
누군가가 그리 중얼거렸다.
나는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끔찍한 광경이다.
모든 게 파괴되었고, 모두가 죽었다.
마물들은 인간과 같지 않다.
아니, 그 어느 생물과도 다르다.
그들은 죽이기 위해 죽이고, 파괴하기 위해 파괴한다.
그것엔 이유도 목적도 없다.
그러하기에 그 결과물 또한 이리도 비인간적이다.
“계속 가지.”
진군 속도를 더 높였다.
우리는 제국의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국과 별개로 따로 진영을 꾸리려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제국 측에서 아무런 답변도 없었기 때문.
연합하여 같이 적을 상대하자는 요청이었는데, 답변이 없으니 별수가 없었다.
기껏 갔는데 제국 측이 거절한다고 다시 돌아갈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마물을 앞에 두고 서로 전쟁을 벌일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진영을 꾸리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뭐.
어차피 마물들도 우리의 이동 경로를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놈들은 우리가 접근하는 걸 알면서 과연 가만히 있을까?
내 생각은, 아니 우리 대부분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놈들은 분명 무언가 술수를 쓸 것이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건 말이 안 되니. 심지어 놈들이 가만히 있더라도 그것엔 어떤 의도가 있을 거다.
즉, 그래서 아예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놈들을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그것을 위하여 아예 행군 속도까지 조절하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쟁을 할 수 있게.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전략과 전술이 의미가 없어지겠지.’
이번 전투가 일반적인 전투가 아닐 것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어서다.
이동하면서 우리는 지난 전투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파괴적인 위용도.
‘악마가 나타났고, 그것을 한 남자가 단신으로 막아서고, 죽였다.’
‘한데 다른 남자가 나타나더니… 그들, 그들을…….’
악마의 종류도 이미 알아냈다.
내가 상대했던 놈보다는 급이 떨어지는 놈이지만, 그렇다고 약한 놈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악마를 단신으로 막아 낸 자가 있고, 전략가로 추정되는 놈은 자기 부하들을 불러 그자를 순식간에 죽였다고 했다.
즉, 나로서도 쉽사리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전투에서 전략이니 전술이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략가 놈이야 또 뭔가 음모를 꾸미겠지만.’
난 픽 웃었다.
그놈은 항상 그랬다.
하지만 곧 웃음은 사라지고 난 얼굴을 굳혔다.
게임은 게임으로 남아 있는 게 좋다.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의 무게를 나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곳에 온 지도 오래되었지.’
아주 긴 시간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항상 현실의 꿈을 꾸었다.
시간이 지나자 현실의 꿈을 꾸는 일이 줄어들었다. 가끔 꾸더라도 아주 희미하게, 단편적인 정보들을 떠올릴 뿐.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이곳의 기억이었다.
점점 현실의 기억이 밀려나고 이곳의 기억들로 채워진다.
‘이호진.’
난 내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이곳에서 난 족장이었다.
대족장이었고.
신의 대리자, 징벌자, 화신이었다.
그 이후에는 왕이 되기도 했고, 이제는 황제까지 됐다.
그 자리 어디에도 나는 없다.
그나마 화린과 철우와 함께 모여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는 게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두렵다.
‘나는 어떻게 될까.’
이번 전투에서 이기면. 이겨서 정말로 신의 자리에 오른다면.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신이 된 나는, 그 전의 나와 같은 나일까?
아니, 그것보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 같은 사람일까?
물론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고 경험에 따라 변한다지만, 이상한 불안감은 항상 날 따라다닌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후우…….”
나는 작게 숨을 내뱉었다.
입김이 공중으로 퍼져 나간다.
그러고 보면 이곳의 기후는 상당히 이상하다.
마경만큼은 아니어도 지역에 따라 그 기후가 다른 편이니까.
지금의 계절은 겨울쯤인가?
나는 불안한 기분을 가라앉히며 시야를 돌렸다.
시간이 흐른 후.
우리는 마물 군세의 뒤편에 도착했다.
* * *
긴 연설은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짧게 말했다.
싸우자. 싸워서 이기자.
뇌신의 말씀을 퍼트리자.
나아가 사악한 마물들을 무찌르자.
뭐, 조금 길게 늘여서 말하긴 했지만 요지는 그것뿐이었다.
그런 내 짧은 말로도 병사들은 환호했다.
저마다의 무기를 들며 의지를 북돋았다.
-크오오오오오오!
우리는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았다.
마물들은 이미 제국 측의 성벽을 공략하고 있었다.
계속 전해진 첩보에 의하면 전투가 시작된 지는 몇 시간이 채 안 됐다고 한다.
“자, 가자!”
그리고 우리는 망설임 없이 그 전투에 끼어들었다.
처음부터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크라아아아아아아!”
첫 시작은 크룩.
그는 앞으로 달려가며 바로 몸을 키웠다. 그 거대한 몸이 순식간에 전장을 꽉 채운다.
“바람의 숨결!”
“뇌신의 가호!”
순식간에 크룩에게로 버프 마법이 집중된다.
“돌겨어어어억! 케르르르!”
그 뒤를 잇는 건 케륵.
케륵은 마경에서 싹싹 긁어 온 자신의 군세와 함께 앞으로 달려 나간다.
거대한 크기의 괴수 수십 마리.
그중에서도 중앙에 위치한 백호는 특히 위용이 남달랐다.
놈들은 마물과 부딪히자마자 순식간에 피보라를 만들어 냈다.
그 뒤를 이어서 이렌이 네 마리의 정령을 동시에 불러내며 전장에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 낸다.
트렌은 단 한 자루 창을 꼬나쥐고서 한번에 마물 수십 마리를 토막 내 놓았다.
그리고 또.
“자, 다 함께 사용하는 겁니다.”
플레이어들이 모인 부대.
그들은 동시에 카운트다운을 하더니 동시에 외쳤다.
“신성 보호막 부여 사용! 버프 5종 세트 사용! 신성한 오러 사용!”
바로 상점에서 구입한 버프 아이템의 사용이었다.
그들로부터 시작된 빛이 아군 전체에게 내려앉는다.
굉장한 대범위의 버프 아이템이었다. 아마 지금까지 모은 신화 포인트를 박박 긁어모아 사용한 것이리라.
그렇게 난 하나하나 자신의 힘을 풀어내는 걸 보며 창을 꽉 쥐었다.
“에인헤야르. 소환.”
빛의 전사들을 부르며 눈을 부릅떴다.
이번 전투가 끝나고 난 후.
난 신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