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역시 단순히 물량만 믿고 덤벼들었을 리 없지.
나는 악마가 날뛰는 꼴을 보았다.
녀석은 현재 마물들이 모인 곳의 중앙에 소환된 상태다.
당연히 녀석이 날뛸 때마다 죽어 나가는 것도 마물들이고.
-쿠워어어어어.
하지만 주변의 마물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우리 쪽으로만 달려오고 있다.
지금이야 악마가 저기서만 날뛰고 있다지만, 여기로 오는 건 시간 문제라는 소리.
녀석은 마법이나 능력을 전혀 못 쓰고, 적아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다.
그리고 그 대신 무지막지한 물리력을 발휘한다.
가진 패널티가 강력한 대신 그만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소리.
애초에 저쪽에서는 마물들이 죽든 말든 신경을 안 쓴다는 소리인 거고.
본래 노렸던 목표 자체가 저 악마 놈을 우리의 본진에 드랍한다는 것이었을 터.
현재 우리 측의 상황을 보면 그 전략이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는 게 보인다.
연합 측의 수뇌부가 어찌 대처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다.
‘저놈을 쉽게 상대하려면 교황이나 황제쯤은 돼야 하니까.’
본래 신성 도시 연합의 최강자는 교황이었다. 제국에서는 황제였고.
둘은 전 대륙을 뒤져 봐도 찾을 수 없는 고수였으니까.
한데 교황은 도시 연합이 습격받기 며칠 전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 이후로 여전히 실종 사태이고.
그리고 공교롭게도 제국의 황제는 습격을 받을 당시 병환이 깊은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옥쇄하여 제국의 신민들과 황태자가 도망갈 시간을 벌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지금 이곳에는, 이를 테면 떨거지밖에 없다는 소리다.
‘이 상황에서도 몸을 사리다니.’
난 피식 웃었다.
기실 수뇌부가 목숨을 걸 각오까지 되어 있다면 이미 튀어나갔어야 했다.
확실하게 승리는 못 해도 적어도 저 악마를 잡을 수는 있었을 테니.
내가 떨거지라고 표현하긴 했어도 악마와 동수를 이룰 정도는 됐을 거라는 소리다.
나는 창을 잡으며 요새의 성벽 위로 올라갔다.
“갔다 온다.”
“예?”
내 바로 옆에 있던 케륵이 깜짝 놀라서 되묻는다.
“뇌신의 사도이자 대리자, 징벌자인 나 호진은 단신으로 악마를 무찔렀다.”
난 케륵에게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뭐,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성벽 밖으로 휙 몸을 날렸다. 높은 나무들을 밟아 가며 움직이니 순식간에 마물들의 한복판에 다다랐다.
신화 쌓기라.
그러고 보면 애초에 이 게임의 목표가 그거다.
신화를 쌓아서 계급을 올리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거.
결국, 신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그것의 연장선 아닌가?
이미 황제까지 달성했는데. 신이라고 안 될 게 뭐냐.
난 창을 가볍게 휘둘렀다.
후우우우우우웅-!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와 내 몸을 높이 띄워 올렸다.
본격적으로 신화를 쌓기로 마음먹었으니 아주 화려하게 보여 줄 생각이다.
이젠 더 이상 전력을 숨길 필요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이윽고 악마의 지근거리에 도착했을 때 녀석이 함성을 내질렀다.
-쿠오오오오!
그 소리만으로 온몸이 웅웅 울렸다.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울림통이다.
난 그대로 창을 꽉 쥔 채로 힘을 개방했다.
-우우웅.
몸이 하얗게 빛나며 내 주위로 수많은 인형이 생겨난다.
에인헤야르.
백룡의 유산을 받은 이후, 나의 기사들이 된 그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쥐며 악마를 노려보았다.
난 그들보다 앞서 몸을 날려 악마에게 창을 쭉 뻗었다.
콰르르르릉!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창끝에서는 전격이 피어오르고, 난 그 창을 그대로 악마의 몸뚱이에 꽂아 넣었다.
-크오오오오오!
한참 마물을 휩쓰는데 정신이 팔려 있던 녀석은 갑작스러운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바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녀석이 봐야 하는 건 내가 아니었다.
-하아아아압!
악마의 머리 바로 위에서 거대한 검을 든 전사가 떨어져 내린다.
푸욱!
그리고 검은 그대로 녀석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꾸워어어어!
악마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 내며 몸을 뒤흔들었다.
제법 아프긴 할 테지만 녀석에겐 딱히 급소랄 게 없어서 치명상은 아닐 거다.
그래도 계속 맞으면 아프긴 하겠지만.
난 하늘 높이 떠오른 달을 보고서 아예 무기를 검의 형태로 바꾸었다.
악마는 허공을 둥둥 떠다니며 자신을 공격하는 전사들을 공격했다.
물론 나도 악마에게 바짝 붙어 그를 수도 없이 난도질했다.
거대한 악마의 몸이 실시간으로 움푹 파였다가 회복되기를 반복한다.
누가 왔는지는 몰라도, 적들이 이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내 선전포고를 똑똑히 봤으면 한다.
더는 어중간하게 상대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똑똑히 알아들었으면 한다.
-크오오오오오!
난 비명을 내지르는 악마에게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 * *
마물들은 미친 듯이 산을 뛰어 올랐다.
갑작스러운 악마의 출현에 당황해하던 병사들도 정신을 차리고선 계속해서 활과 마법을 퍼부었다.
확실히 지형의 이점 때문인지 마물들은 손쉽게 전진을 못 하며 계속해서 죽어 나갔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마물들의 모습에 병사들도 기가 질릴 법도 했지만.
-크오오오오오!
저 앞에서 악마와 맞붙고 있는 사람을 보면 자연스레 없던 용기도 샘솟았다.
99명의 빛의 전사들과 한 명의 남자.
폴그룬의 병사들에게 있어서 그 남자는 자신들의 황제였고, 신의 대리자였으며, 분신이었고.
신 그 자체였다.
그들은 이런 신화적인 전투에 자신들이 한몫 거들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격스러웠다.
그리하여 그들의 검에는 점점 더 강한 힘이 실렸다.
파지지직!
일개 병사들조차 아득바득 성벽을 기어오르는 마물의 머리통에 전격이 튀어 오르는 검을 꽂아 넣었다.
연합 측의 병사들은 폴그룬의 병사들의 몸에 푸른 전격이 맴도는 걸 보고는 감탄했다.
아니, 연합의 수뇌부조차 그들을 보며 놀랐다.
일개 병사 하나하나가 아주 용맹한 전사들이었으니까.
“하아아아아압!”
게다가 폴그룬 측에는 강자가 얼마나 많은지 수비에 조금이라도 구멍이 생길라치면 귀신같이 달려가 마물들을 쓸어 버리곤 했다.
‘정말, 정말 피해 없이 막아 낼지도.’
모두의 마음속에 희망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희망. 용기. 감탄은 모두 한 지점을 향했다.
악마와 용맹하게 맞서 싸우고 있는 호진을 향해 ‘신앙심’이 모여들었다.
심지어 신성 도시의 사제들 신앙조차도 말이다.
신화가 쓰이고 있다.
호진은 모여드는 힘에 점점 힘이 떨어지긴커녕 차오름을 느꼈다.
모든 힘이 한곳으로 모임에 따라 신의 씨앗에 점점 양분이 공급된다.
호진은 맹렬하게 창을 휘둘렀고, 악마의 몸은 어느 순간부터 회복되는 것보다 상처가 느는 것이 더 빨라졌다.
그리하여, 마물들이 모두 성벽으로 돌진하기도 전.
쿠웅!
악마의 거대한 몸이 쓰러졌다.
호진과 그가 소환한 전사들은 악마를 쓰러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물들을 향해 다시 무기를 휘둘렀다.
마물들은 앞과 뒤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으며 제대로 타격조차 입히지 못한 채 계속해서 죽어 나갔다.
마물 세력의 삼분의 이나 되는 수의 마물들이 죽어 나간다.
그중에는 상급의 마물들조차 포함되어 있었고, 이 전투는 분명 마물 군세, 나아가 전략가에게 큰 피해를 줄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호진은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다.
‘망할.’
이 전투에서 그가 노리던 것은 거의 다 이루었다.
적의 세력을 쓸어냈고, 악마를 잡으며 신화를 쌓았다.
아군 측에게 피해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전략가가 노리던 것은 무엇일까?
설마 상대의 전력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그대로 당하기라도 한 것일까?
‘이것도…….’
아니다.
‘속임수였군.’
그저 이곳이 노리던 목표가 아니었을 뿐이다.
호진은 고개를 들어 제국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을 생각하며.
* * *
성녀의 기사.
호진에겐 풍룡의 가디언이라 자신을 소개했던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발밑에는 위엄 있게 등장했던 악마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자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눈앞에 나타난 적을 경계할 뿐이다.
“흐음. 확실히 풍룡이 살아 있긴 하는가 보군요.”
말총머리의 사내. 전략가는 어느 순간부터 홀연히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비명이 울려 퍼지고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전장인데도 이상하게 그의 주변은 고요했다.
모두 그를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주변으로는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다.
가디언은 가만히 전략가를 바라보았다.
전략가는 상대가 대답하든 말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때 확실히 끝내 놔야 했는데. 어찌나 잘 숨던지 머리칼 하나 안 보이더라고요”
그는 빙글빙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발밑에 있는 걸 툭툭 쳤다.
이곳을 지키고 있던 제국의 지휘관. 경악한 표정 그대로 잘려 나간 머리통이 장난감처럼 땅을 구른다.
“뭐, 어찌 됐든….”
전략가는 손을 펼쳤다.
그가 손을 뻗자 허공에 푸른 구멍이 일렁거리며 나타났다.
본래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던 남자의 능력인 차원 균열이었다.
전략가는 마지막 전쟁에 앞서 대규모 숙청을 개시했다.
그중 유용한 능력을 갖춘 이들은…….
그의 ‘일부’가 되었다.
“한번 능력껏 막아 보십시오.”
그의 주변으로 구멍이 점점 늘어났다.
수십 개를 넘어 수백 개.
그리고 그 구멍에서는 하나같이 막강한 기세를 뿜어내는 이들이 튀어나왔다.
마물 군세의 삼분의 이니, 삼분의 일이니 하는 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거느린 마물의 삼분의 이는 연합과 폴그룬이 위치한 곳으로 향했고, 이 제국으로는 삼분의 일만이 움직였다.
그 외에 아주 강력한 전력들.
악마를 비롯한 그의 간부들은 그대로 본진에 남아 있었다.
거기에 더해.
전략가는 일부러 호진에게 차원 능력자를 보여 준 적이 있다.
그의 능력을 보고 호진이 그 능력을 ‘그 정도’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적당한 크기의 마물들을 소환하며 그것만으로도 힘겨워하는 정도.
딱 그 정도로만.
그렇기에 이 순간 전략가의 계획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호진과 그의 전력이 마물들을 상대하는 동안 전략가는 모든 전력을 다 이곳으로 소환했다.
가디언은 전략가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속으로는 자신의 주인에게 말을 전했다.
-주인님, 모든 전력이 이곳에 나타났습니다.
-바로 호진에게 연락을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능력이 부족하여 이들을 막지 못하는 것을 사과드립니다.
가디언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어찌 됐든 그는 자기 일을 해야 한다. 주인의 다른 명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처음 내려진 명령을 수행해야 했다.
‘적들을 격퇴하고, 만약 불가능할 때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그는 잠시간 주인의 대답을 기다렸다가 곧 아무런 연락이 없음을 확인하고서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 하나하나가 막강한 힘을 가진 괴물들을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날.
제국 영토의 삼분의 일이 쓸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