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그대들이 이곳에 온 것은 그분이 행한 일입니다.”
남자의 말에 호진은 순간 몸에 힘이 탁 풀려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는 무엇이 잘못됐냐는 듯 호진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호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을 이곳으로 부른 게 풍룡이라고?”
“예, 정확히 말하면 전부는 아니지만요. 아까 말씀드렸듯 어둠도 자신이 부릴 전사들을 소환했습니다.”
“그러면, 그럼.”
호진은 열이 끓어올랐다가도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화를 내고 싶었다가도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엉망진창인 기분 속에서 호진은 잠시 입을 떠듬거리다가 가장 궁금했었던 질문을 꺼냈다.
“플레이어. 그러니까 우리를 선택한 기준은 무엇이지? 무작위인가? 그리고 왜 하필 ‘더 리얼’을 했던 사람 중에서만 뽑은 거지?”
호진은 자리를 잡고 플레이어들을 찾으며 소환된 사람들이 모두 ‘더 리얼’ 유저들이라는 것을 확인했었다.
짧게 플레이한 이는 있었어도 아예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는 없었다.
“더 리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군요.”
남자는 호진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리 말했다.
“풍룡께서 소환자를 택한 기준은 간단했습니다.”
그의 텅 빈 눈이 호진을 정확히 응시했다.
“어둠이 기존에 택했던 전사들. 그들을 중간에 가로채서 데려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자는 덧붙여 설명했다.
어둠이 어떤 기준으로 전사들을 고른지는 모른다.
풍룡은 어둠이 전사들을 데리고 올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게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둠이 본격적으로 전사를 소환하려는 걸 알아챘고, 중간에 난입하여 그중 절반을 자신이 선수 쳐서 데려왔다는 것이다.
“그럼, 아니 그 어둠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이지? 신인가?”
호진은 다른 질문을 꺼내려다가 계속 궁금했었던 것을 물었다.
뇌신에게도 어둠에 관해 설명을 듣기는 했었다.
강력한 힘을 가졌고, 불길하며 이 세계를 집어삼키려는 의지를 가진 자.
하지만 그 이상의 설명은 듣지 못했다.
“예. 신입니다. 그리고… 음.”
남자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호진의 재촉에도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야 입을 열었다.
“대화는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풍룡께서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나누자고 합니다.”
“뭐?”
“풍월검을 꺼내 주십시오. 본래 드리고자 했던 것을 드리겠습니다.”
“아니, 갑자기 왜?”
호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자세한 건 저도 모릅니다. 저는 그저 풍룡님의 명을 받들 뿐. 그리고 만약 꺼림칙하다면 안 꺼내셔도 됩니다. 대신 저희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질 수도 있지만요.”
남자의 말에 호진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도 검을 꺼내 놓을 수밖에 없었다.
강짜를 부리기엔 ‘풍룡’이라는 자의 정보가 호진에겐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눈앞의 남자. 가디언은 결코 협박이나 고문이 통할 타입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가 말하는 어투를 보면 정보도 남자가 아니라 ‘풍룡’에게서 나오는 것 같고.
“여기 있다.”
호진은 결국 풍월검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남자는 스스럼없이 검에 손을 뻗었다.
후웅.
그의 손끝에 푸른 바람이 일렁였다. 곧 그 바람은 검을 에워싸더니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끝났습니다.”
“…뭐가 변한 거지?”
호진은 의아한 듯 물었다.
거창하게 말하길래 뭔가 일어날 줄 알았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끝난 탓이었다.
“풍룡의 힘을 심어 두었습니다. 그분의 힘이 깃들었으니 한층 강력한 위력을 발하겠지요. 그리고.”
남자는 검을 탁자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말했다.
“때가 되면 풍룡께서 이 검의 흔적을 따라 그대를 찾아갈 겁니다. 궁금한 것은 그때 직접 물어보시지요.”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실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애초에 내 선택 같은 건 염두에 없나 보군?”
“뭐, 그렇지요.”
남자가 금방이라도 떠날 기색이기에 호진은 억눌렀던 기운을 다시 끌어올렸다.
“그럼 풍룡에게 전해.”
호진은 남자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우린 네년의 장난감 같은 게 아니다. 당장은 나도 어둠에 맞서 싸울 생각이긴 하지만 순순히 네 말에 따를 생각 같은 건 없어.”
호진은 사나운 기세로 그리 말했다.
남자는 그런 호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리 전하지.”
남자는 풍룡의 말을 다 전해서인지 어느새 본래의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이만.”
그리고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걷더니 그대로 벽을 통과해 어딘가로 사라졌다.
“정말 재수없는 놈이네.”
호진은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며 중얼거렸다.
바깥에 서 있을 사제가 아무런 말도 없는 걸 보면 이미 어딘가로 사라졌으리라.
마지막에 감정을 드러내긴 했지만, 남자의 태도를 보니 끓어올랐던 감정도 사그라들었다.
티끌만큼의 감정도 안 내비치는 이에게 화를 내서 무엇하겠나.
차라리 돌에 대고 화를 내고 말지.
“후우.”
호진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 * *
남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딱히 특이한 점이 없었다.
바하트리스로 파견되었던 철우 일행은 아무런 피해도 없이 마물 군세를 파괴했다.
특히 바하트리스 공작은 한층 더 강해진 폴그룬 인원들의 무력에 질렸는지 아예 기가 눌린 기색이라 했다.
여하튼, 폴그룬은 바하트리스에게 본래 약속되었던 보수를 온전히 받아내었다.
며칠이 지난 지금은 바하트리스로부터 폴그룬까지 계속해서 수레가 오가고 있었다.
주로 광물이나 보석, 귀중품 같은 것이었다.
반면에 폴그룬에선 바하트리스로 식량이 담긴 수레를 보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폴그룬으로 오는 수레에는 식량값 또한 상당량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나 돌아온 철우에게 보고를 들었다.
“어찌 됐든 바하트리스는 이제 우리 예하로 들어오기로 했다.”
집무실에는 나와 철우 형 둘만 있었고, 그는 나에게 편하게 말했다.
“응. 고마워 형.”
“뭘. 누가 내린 명령인데.”
철우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금세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그나저나 수인 왕국이랑 그쪽은 괜찮은 거야?”
바로 바하트리스와 정반대에 있는 수인 왕국과 마틴, 그리고 요정족의 영토를 가리켜 한 말이었다.
“어. 그쪽은 우선 폴그룬 왕국을 거치지 않으면 못 들어가니까. 그쪽에 병력을 따로 배치해 두기도 했고.”
“다행이네. 아, 얼마 전에 크룩도 수인 왕국으로 보냈다면서?”
“응. 크룩의 수행도 겸해서. 얼마 전에 마경 다녀온 이후로 좀 더 수련에 집중하고 싶어 하더라고.”
크룩은 본래 병력의 훈련을 맡아서 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슬슬 직접 훈련을 맡지 않아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왕국의 규모 자체도 굉장히 커졌거니와, 훈련을 맡을 인원이 굉장히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마 전 크룩의 바람대로 개인 수련에 집중하라고 수인 왕국으로 보내 주었다.
“아무래도 수인 왕국이 박투술이 많이 발달해 있잖아?”
“그렇긴 하지.”
수인 왕국에도 무기를 쓰는 이가 많긴 했지만, 그것보다 맨몸으로 싸우는 이가 훨씬 많았다.
검보다 날카로운 손톱이나 발톱, 이빨을 이용해 싸우는 게 과연 맨몸 박투술인가 하는 것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크룩도 맨몸이라기엔 어폐가 있다.
“그럼 그쪽은 됐고. 역시 문제는 제국 쪽인가?”
철우는 턱을 매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바하트리스로 원정 갔을 무렵 들었던 소문 때문이었다.
물론 나도 그에 대해서는 따로 보고를 받은 상태였다.
“멸망당한 쪽? 아닌 쪽?”
그런데도 나는 짐짓 능청스러운 어조로 말을 받았다.
“장난은. 당연히 안 당한 쪽이지.”
철우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듣기로는 수호룡이 얼마 전 모습을 드러냈다던데.”
“음.”
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지금 남은 제국에는 수호룡이 있었다.
아주 강력하고 대단한 위용을 뿜어내는 용이다. 하지만…….
“약속의 기한이 끝났다고 떠났다지.”
“그래.”
그는 과거 ‘더 리얼’에서도 어느 순간 모습을 감췄었다.
이번에는 그걸 직접 공표한 게 다를 뿐.
아직 제국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수호룡이 나타났다가 아예 모습을 감춘 것도. 그리고 마물들이 침공해 오는 현 상황에도.
“만약 제국이 마물들에게 적대적이라면 좋은 상황은 아니라는 거지.”
“그렇지. 그쪽 편이면 좋은 일일 테지만.”
수호룡은 분명 강력했을 터였다.
제국은 그 자체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용까지 합세했으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위세를 뽐냈을 터.
일촉즉발의 상황에 갑작스러운 변화는 무언가 찜찜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내 심각한 표정을 봤는지 철우도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앞뒤 다 떼고 한 질문이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수호룡이 모습을 감출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것 같단 말이지.”
수호룡은 사라졌다. 그리고 마물들은 일차 침공 이후로 다시 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듣기로는 제국에는 우리 왕국에 몰려왔던 것보다 족히 네 배는 넘는 수가 쳐들어갔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 마물들을 어떻게 막아 냈는지는 전혀 정보가 없다.
“불안해.”
나는 그래서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리 말했다.
* * *
계속 불안해하기만 하면 뭐 하나.
며칠 동안 우리는 왕국에서 계속해서 회의를 거듭하며 결론을 내렸다.
“소규모로 수색대를 조직한다.”
내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의 전력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모아온 신화 포인트의 2/3를 병사를 육성하는 것에 투자했다.
그리하여 기존 병력의 무력만 봐도 이전보다 족히 두 배는 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얼마 전엔 이렌과 트렌이 진화를 했다.
트렌은 계속해서 창 하나만을 우직하게 밀고 나간 게 영향을 줬는지 ‘창귀’라는 칭호를 달게 되었다.
이전에도 아주 강력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이렌은 능력이 발전해 한 번에 동시에 두 명의 정령을 부를 수 있게 됐다.
이번에 새로 계약한 정령은 바로 ‘화염’이었다.
그녀도 새로운 힘을 더욱 단련해야 한다고 생각해 요새는 화린과 거의 내내 붙어 다니고 있다.
화린은 정령에 대한 재능은 없었지만, ‘화염’ 속성 자체에는 아주 친화력이 높았으니까.
그것 말고도 새로운 이들이 속속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계속 포인트를 인재 개발에 투자해 온 보람이 있다.
어찌 됐든, 그 덕분에 왕국에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게 됐다.
이번엔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내가 직접 나설 수는 없고, 일부 인원들로 새로 수색대를 조직해서 직접 정보를 수집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럼 잘 부탁한다. 페일, 제크.”
“맡겨만 주십시오.”
“맡겨만… 주십시오.”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페일과 어쩐지 꿍얼거리는 듯한 말투로 대답하는 제크를 보며 웃었다.
이 둘은 아예 적진의 중앙을 탐색하고 올 제1수색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