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두 번째 전령의 급보에 분위기가 일변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모를까, 그 셋이 직접 나섰다면 적을 막는 것을 넘어 분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본래 간부 셋을 투입하려는 계획은 철회됐다.
대신, 간부 한 명과 휘하에 병력을 해당 방면으로 투입하기로 했다.
“다행히 여유가 생겼군요.”
어떤 사제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규모로 보나 속도로 보나 이번 기습이 적의 노림수이리라는 건 명확했다.
한데 그 부분에 왕국 최고의 병력이 향해 있으니, 다른 포인트들도 한결 여유가 생길 거다.
“그럼 병력 배치는 기존에 계획했던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병력 배치도 기존에 정해진 대로 배치하기로 했다.
호진이 마경으로 떠나기 전 전쟁이 시작되면 이리 병력을 배치하라 일러 뒀던 대로.
강제적이었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다.
확실한 건 이제 폴그룬도 온 대륙을 뒤덮은 전쟁의 화마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것.
플레이어와 원주민, 그리고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이들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대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 * *
“후우, 시작부터 화끈하네.”
난 물밀 듯이 쏟아지는 마물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마물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게 벌써 한 시간 전이다.
“크루아아아아아아-!”
“케르르르르!”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셋이서.
크룩은 그전 마경에서 한 번 보았던 것처럼 어마어마한 덩치를 자랑했다.
“크라아아!”
꽈아아아아앙-!
그가 한 번 주먹을 휘두르면 대지가 요동쳤고, 발을 구르면 신나게 달려들던 마물들이 모두 균형을 잃고 나뒹굴었다.
과거에 그를 공성 병기에 비교했다면, 지금은 거의 왕국 결전 병기 수준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일대다의 상황에서는 나보다 더 효율이 좋아 보이기까지 한다.
내가 무기 휘두르고 능력 쓰고 할 동안 쟤는 그냥 팔이랑 다리만 휘둘러도 되니까.
그렇다고 케륵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케르르를! 왼쪽!”
-크허어엉!
케륵이 마경의 심부에서 얻은 괴수들.
그들 모두는 분명 생전보다는 약화되었을 것이 분명한데, 그 상태로도 어마어마한 힘과 스피드를 보인다.
-크르르릉!
중앙에서 버티고 있는 백호는 접근해 오는 마물들을 말 그대로 분쇄하고 있다.
또한, 케륵은 비행형 괴수의 몸에 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는 강력해 보이는 마물들이 죽을 때마다 바로바로 주술을 써서 다시 상대에게로 돌진시키기까지 했다.
애초에 길게 써먹을 생각이 아닌지 되살아난 마물들은 제 몸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몸이 아예 가루가 될 때까지 날뛰다가 스러지곤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단 세 명이서 마물의 군세를 효과적으로 막아서고 있다.
다만, 한 시간이 넘도록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수에 기가 질릴 뿐.
처음에는 그 차원 술사가 어디서 계속 소환을 해 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주변을 탐색해 본 결과 그건 아닌 듯했다.
아마도 주변 어딘가에 마물을 쭉 소환해 뒀다가 한 번에 돌진시키고 자신은 빠진 듯했다.
하긴 저번에 그런 일을 겪고도 다시 똑같은 짓을 하면 그냥 멍청한 놈이지.
“후우우.”
나는 마지막으로 길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진정시키고서 몸을 일으켰다.
쿵-! 쿵! 쿵!
바로 앞에서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진다.
나는 흑룡 세 마리가 버둥거리며 날뛰는 것을 보며 서서히 힘을 회수했다.
이것이 바로 백룡의 힘이다.
상대방을 아예 다른 차원, 혹은 다른 공간에 가둬 두는 힘.
백룡이 힘을 쓰던 걸 보면 조금 다른 것 같긴 하지만,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뿐.
천년만년 가둬 둔다면 좋겠지만, 내 힘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기껏해야 이삼 분 정도. 그리고 가둬 두면 나도 따로 놈들에게 간섭할 수는 없으니.
-크라라라라라!
난 슬슬 옅어지는 공간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흑룡들을 보며 무기를 다잡았다.
“크루아아아악-!”
크룩도 마물을 상대하다 말고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슬쩍 보니 케륵이 지배하고 있는 마물의 수가 꽤 많이 늘어나 있었다.
저 정도면 우선 자잘한 마물들은 걱정할 필요 없으리라.
“좋아.”
그럼 어디 한번 다시 싸워 볼까.
난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셋이서 흑룡 하나를 상대했었는데.
이제는 둘이서 흑룡 셋을 상대한다.
하긴 그때도 우리가 지레 겁을 먹어서 그렇지, 셋이서 한 마리를 상대할 정도까진 아니긴 했지.
후우우우우우웅-!
난 커다란 몸을 앞세워서 날아오는 흑룡을 노려보았다.
콰르르르르릉!
창에서 우렛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나는 동시에 뇌신의 힘을 깨웠다.
백룡은 뇌신이 이 힘을 ‘에인헤야르’라고 불렀다고 했었다.
물론 후대에 아무것도 모르고 제물이 된 이들까지 아우르는 말은 아니고, 본래 그가 힘이 강성한 시절 휘하에 뒀던 이들을 지칭하는 것일 테지만.
어떻게 이 세계의 주민일 뇌신이 지구의 신화를 알고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츠츠츠츠츠-!
곧 내 몸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일정한 형체를 갖추었다.
백룡의 힘까지 흡수한 지금은 그들은 더욱 형태가 뚜렷해졌다.
난 창을 한 바퀴 휘두르며 휘감긴 기운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파지지지직!
수많은 전사의 무기에 전격이 휩싸인다.
“돌진!”
내가 몸을 날리며 소리치자 영혼 병사들이 내 뒤를 따라서 흑룡에게 달려든다.
-크라라라!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흑룡이 입을 쩍 벌려 온다. 동시에 바로 옆에 있는 놈은 긴 꼬리를 휘둘러왔다.
나머지 한 마리는 케륵과 맞붙었고.
난 창을 반 바퀴 회전시키며 그대로 앞으로 찔렀다.
꽈르르릉!
창에 휘감겨 있던 전격이 그대로 흑룡의 아가리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뒤이어 날아든 꼬리는 위로 몸을 움직여 피하고, 영혼 병사들은 흑룡의 몸에 우수수 달라붙었다.
-키르르르르르!
흑룡이 괴로워하며 몸을 비틀었다. 단순히 몸을 트는 것만으로 달라붙었던 영혼들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후웅!
하지만 그들 중에는 여전히 달라붙어 용의 거죽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이들이 있었다.
또한, 날아갔던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흑룡에게 달라붙었다.
휘이이이이이이!
난 세 마리 모두를 시야에 두고서 움직였다.
바람을 일으켜서 흑룡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콰르르르르르르릉!
벼락을 떨어트려 적을 공격하고 아군에겐 기운을 북돋웠다.
-키하아아아악!
마침내 한 마리의 목을 직접 베어 내기까지 했다.
용의 몸에서 검은 구슬이 빠져나와 날아가려는 것을 붙잡아 인벤토리에 넣고서 다른 놈들을 보았다.
용은 처음 나타났을 때의 위용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목숨을 잃어 갔다.
특히 하이라이트는 크룩이 용의 머리를 붙잡고 힘을 주어 아예 몸과 분리하는 모습이었다.
척추가 쭉 딸려 나오는 모습은…….
음. 그리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다.
난 구슬 세 개를 모두 붙잡아서 인벤토리에 넣고서 남은 마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마물도 점점 정리되었고, 두 시간이 넘었을 때쯤 모두 정리가 되었다.
적들이 회심의 공격을 하려던 건지, 아니면 그냥 찔러 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별 피해 없이 그걸 막아 냈다는 것이다.
“크루아아아아악!”
난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는 크룩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속으로는 약간의 걱정을 하면서.
‘이 정도면 놈들도 우리의 전력을 확실히 알았겠군.’
이제 슬슬 보여 줄 생각이긴 했다.
대륙이 돌아가는 정황을 보면 곧 커다란 전쟁이 있을 터이니.
이제는 얕잡아 보였다간 오히려 손해만 볼 터.
그렇기에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힘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건 물론 좋은 일이다.
다만, 그저 걱정될 뿐이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할지.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날 때쯤이면 우리의 게임도 끝이 나긴 하는 건지.
만약 전쟁이든 뭐든 모든 게 끝나고서도 게임이 끝나지 않는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지.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그저. 걱정될 뿐이다.
* * *
높은 절벽 위.
한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마지막 흑룡이 죽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흐음.”
그녀도 분명 저 ‘분신’들이 죽는 것이 계획 일부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왠지 아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 정도면 왕국 하나쯤은 점령하고서 편히 살 텐데.’
그녀의 수장이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할 자가 아니라는 게 아쉬울 뿐.
그녀는 곧 아쉬운 마음을 접고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용을 잡았던 남자에게로.
“그나저나 쟤는 더 괴물이 됐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는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왔나 생각하긴 했었다.
시간이 흘러 그녀도 이제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의 성장 또 하나 그녀의 예상 범위를 훌쩍 넘어 있었다.
“이호진.”
진서연. 그녀는 호진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팔짱을 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당장 호진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가 그걸 바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바로 ‘계약’ 때문이었다.
이호진이 왕이 되면 바로 찾아가기로 했던 계약.
그것은 단순히 종이가 아니라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마법 계약서다.
만약 어긴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계약서.
서연의 수장뿐 아니라, 그녀와 계약한 악마조차도 그 계약서를 무효로 돌리는 것은 힘들었다.
다만 어느 정도 억제만 해 놓았을 뿐.
그렇기에 그녀는 여전히 호진에게 가고 싶다는 충동을 직접 감내해야만 했다.
‘그나마 왕이 되면 죽는다거나, 부하가 되야 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서 다행이지.’
그런 것이었다면 지금 느끼는 충동보다 훨씬 강렬한 충동을 느꼈으리라.
물론, 당시 호진도 그녀의 배후에 있는 악마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테지만.
아니. 다른 것보다 그녀가 ‘전략가’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호진에게로 찾아갔을 수도 있다.
서연은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다가 자신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생각했다.
분명히 자신은 ‘게임’을 하고자 했던 것뿐이다.
그것도 정당한 계약금을 받고서 게임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결코, 그 계약에는 이런 말은 없었다.
그 남자의 말에는 이런 말 따위는 없었다.
“후우.”
서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제 와서 후회해서 무엇하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미 일은 벌어졌고, 그녀도 나름대로 자신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배팅을 했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호진이 흑룡의 구슬들을 수습하는 것까지 본 후에야 등을 돌렸다.
그녀의 오늘 역할은 어디까지나 계획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나 확인하는 것뿐.
구슬들이 모두 호진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으니 일은 끝났다.
저 호진이라는 남자와 부딪치는 것은 아직 먼일이다.
휘이이이-
곧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그녀의 몸에서 물씬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휘-
그리고 다시 바람이 불 때 그녀의 몸은 안개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