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마경의 심부.
거대 괴수들과 마물들의 각축장인 이곳에는 그 넓이만큼이나 많은 괴수와 마물이 산다.
그렇기에 이곳에는 제대로 된 집단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웬만한 규모의 무리는 거대 괴수에게 발각되는 즉시 궤멸당하기 일쑤고.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이들이라면 대부분 괴수를 피해 외곽으로 도망갔었으니.
“크르르으으.”
그렇기에 호진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대부분이 괴수나 마물들이었다.
“하.”
호진은 질린 얼굴로 앞을 보았다.
분명 마경에는 집단이 거의 없다.
괴수나 마물들도 거의 무리를 짓지 않는 편이다.
“숲에 있는 놈들은 다 온 거 같네.”
그래서 호진이 보고 있는 광경은 더더욱 이질적이었다.
최소 수십 마리.
시야에 보이는 곳 전부에 괴수와 마물들이 서 있다.
그것도 보통 괴수들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바깥으로 나간다면 재앙급일 괴수들이었다.
그런 괴수들을 한 트럭 상대하려니 호진으로서도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힘들 것 같으면 포기해도 좋다.
게다가 간간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또 얼마나 재수 없는지.
호진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답했다.
“포기할 거였으면 이미 한참 전에 했지.”
그는 창에 묻은 피를 획 털어 냈다.
그의 뒤로는 이미 수십 마리의 괴수와 마물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호진은 짐짓 허세 섞인 말투로 말했다.
“이 정도면 준비 운동 정도밖에 안 돼.”
-준비 운동치고 많이 힘들어 보이는…….
“거, 좀 방해좀 하지 마쇼.”
호진은 그 말을 끝으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콰르릉-!
전격이 몰아치고.
휘이이이이이이-!
매서운 바람이 그의 주변을 감싼다.
시간은 마침 저녁.
하늘에는 밝은 달이 떠올라 있다.
스아아아아아-!
달려 나가는 호진을 중심으로 어둠이 내려앉는다.
그 어둠 안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빛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키헤에엑!”
성질 급한 괴수 하나가 호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괴수는 곧 호진의 주변에 퍼진 어둠으로 들어갔고, 그 거대한 덩치가 잠깐 완전히 가려졌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난 후 호진이 다시 전진했다.
“케헤…….”
다시 모습이 드러난 괴수가 비틀거리며 낮은 울음소리를 흘린다.
쿠웅!
이내 괴수가 바닥에 쓰러졌다.
괴수의 몸 곳곳에는 깊게 베인 흔적이 있었고, 곳곳의 털들은 까맣게 타 있었다.
무엇보다 얼굴의 정중앙이 완전히 함몰된 것이 결정타인 듯했다.
스아아아!
호진은 쭉 나아가 괴수들의 중앙으로 파고들었고.
어둠이 걷힐 때마다 괴수들의 시체만 쌓여 나갔다.
그렇게 숲의 중앙에 있는 빛기둥으로 시체로 이루어진 길이 쭉 이어졌다.
-흐아아아아압!
다만, 호진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영혼’들의 변화였다.
호진의 그릇에 담긴 첫 번째 힘.
그것은 바로 영혼들을 다루는 것이었다.
다만, 그 수준이 매우 조잡하여 사령술과 크게 분간이 가지 않는 정도였는데.
-벼락!
괴수와 마물들을 상대할수록 영혼들의 형체가 뚜렷해지고 그들의 움직임이 더욱 자연스러워졌다.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전사들처럼.
그들은 호진의 주변을 맴돌며 착실히 괴수와 마물들을 사냥했다.
과거 뇌신은 자신의 이 힘을 지구의 한 신화에서 따와 ‘에인헤야르’라 지었었다.
* * *
백발의 사내.
그는 주변이 거울로 이루어진 것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 곳곳에 호진, 크룩, 케륵 그리고 마경 곳곳의 광경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그중에서도 호진이 괴물들과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호진이 영혼들을 바깥으로 불러내고 그들이 괴물들과 싸우며 점점 강해지는 모습을 보고선 고개를 주억거렸다.
“뇌룡 녀석. 안 빼먹고 잘 전달했구나.”
그는 씁쓸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맨 처음 ‘이 세상’에는 사후세계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신들이 하나씩 생겨나고 그들의 힘으로 비슷한 것들이 생겨나긴 했지만.
그것은 결코 말 그대로의 사후세계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저마다 각자의 목적으로 만든 것일 뿐.
본래 영혼은 육과 함께 세상에 나왔다가, 육이 죽는 순간 흩어지는 게 자연의 섭리였다.
사내는 생각했다.
뇌룡이 처음 에인헤야르를 만들었던 때를.
‘놈’에게 영혼을 보낼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품에 안겠다며 본격적으로 신성을 발아했을 때를.
뇌룡은 그렇게 뇌신이 되었다.
사내는 고소를 지었다.
몇천 년 전의 일이 다시 되풀이되려 하고 있다.
‘그때는 비록 실패했지만.’
그는 호진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다짐을 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엔 꼭 끝낸다.’
누구도 듣지 못할 다짐을.
* * *
크룩은 족장과 사흘 밤낮을 싸웠다.
백발 사내가 말했던 대로 족장은 그 힘이 굉장히 강해진 상태였다.
그 용력은 크룩에 밀리지 않을 정도였고, 속도는 비록 크룩보다 느리지만 크게 흠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크룩을 부담스럽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크루룩.”
“간격을 잘 재라. 건틀릿이면 맨주먹으로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을진대, 그렇게 무턱대고 들이대면 제 목을 내주는 꼴이 아니냐?”
족장은 짐짓 크룩을 가르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도끼술. 그리고 엄청나게 똑똑해진 지능.
그야말로 크룩으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도대체 뭘 처먹었길래 그리 똑똑해진 겁니까? 크룩.”
“한번 죽고 나니까 이리되던데 뭘.”
둘은 계속해서 도끼와 건틀릿을 부딪쳐 가며 겨뤘다.
크룩으로서는 굉장히 힘겨운 싸움이었으나, 싸움이 길어질수록 그도 느끼는 바가 있었다.
“쳇.”
이 싸움 자체가 자신의 성장을 위해 안배한 것이라는 걸.
족장은 끝낼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공격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수비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게다가 도중 자신의 자세나 습관 등을 지적해 주기까지.
도대체 백발 사내가 누구기에?
크룩의 머릿속에는 자동적으로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가 의문을 해소할 틈도 없이 족장과의 싸움은 긴박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숲의 다른 한편.
우직하게 직선으로 전진하는 호진과 달리 필사적으로 전진을 하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케륵.
“케르를.”
케륵은 날카로운 눈으로 앞을 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호랑이 두 마리가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케륵이 되살린 놈들 중에는 어느 정도 지성을 유지한 놈들도 있었는데, 놈들의 말에 의하면 저놈들은 ‘산군’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이 일대의 지배자이며 폭군이요, 막강한 괴물들이라 했으니.
‘저놈들을 지배하면 당분간은 위협될 것이 없다.’
케륵은 저들을 지배하에 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케르르!”
케륵은 신중하게 손짓 발짓을 해 가며 지시를 내렸다.
그의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9마리의 괴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홉 대 둘.
숫자는 압도적이었으나 정보에 의하면 방심할 수는 없다.
저놈들은 단둘이서 마경 심부의 서부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는 놈들이었으니.
“케를.”
곧 케륵의 명령하에 그들은 은밀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가장 먼저 이동한 것은 바로 하늘 위에서 날고 있던 커다란 독수리 형태의 괴수였다.
휘이이이익-!
독수리 괴수가 산군의 위를 지나간다. 그리고 그가 발톱으로 쥐고 있던 것을 그대로 놓았다.
후웅-!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 내린다.
산군이라는 놈은 강력한 만큼 필히 감각도 그만큼 예민할 테고, 그렇기에 첫 번째는 원거리 공격으로 개시를 한 것이다.
-크릉?
하지만 산군이라는 놈도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크허엉!
놈은 어떻게 알아챘는지 바위가 땅에 박히기도 전에 제 동료를 깨워선 옆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콰앙!
-크허어어엉!
하지만 아무리 날렵하게 움직였다 해도 바위 전체를 피할 수는 없었다.
한 놈의 다리 한쪽이 그대로 바위에 깔린 것이다.
-크헝!
놈은 바위를 옆으로 밀쳐 빠져나오긴 했으나 다리 한쪽을 절뚝이기 시작했다.
“켈!”
케륵은 망설임 없이 나머지 괴수들에게 돌진을 명했다.
늑대와 여우, 다양한 형태의 괴수 여섯 마리가 산군에게 돌진한다.
“키헤에에엑!”
게다가 놈들이 얽히는 틈을 타서 두 마리의 원숭이 괴수는 나무를 타고 올랐다.
등에는 커다란 보따리를 메고서 그곳에는 돌덩이들을 가득 채운 상태로.
휘익!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크허어엉!
분명 산군은 강력한 놈이긴 했다.
저들보다 배나 많은 괴수를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 더더욱 그러했다.
만약 보통의 싸움이었다면 구 대 이의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겼을지도 모른다.
“케르를, 마하, 벨, 투하, 메켈!”
하지만 이곳에는 케륵이 있다.
케륵은 커다란 항아리 앞에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가 지배하게 둔 건 아홉 마리의 괴수지만, 사냥을 한 수는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더 수를 늘리지 않은 건 효율의 문제였다.
지금처럼.
휘이이이익!
항아리에서 핏물이 울컥 치솟더니 한참 산군과 뒤엉켜 싸우고 있는 괴수들에게로 엉겨 붙었다.
그러자 괴수들의 몸 곳곳에 나 있는 상처들이 아물기 시작했다.
바로 케륵이 사냥한 괴수들의 피를 모아서 회복용으로 쓰는 것이다.
어차피 아홉 이상이라면 효율이 떨어질 거라 판단해 그 이후로 사냥한 놈들은 이리 보조용으로만 보관해 둔 것이다.
그래도 역시 산군은 쉽사리 당해 주지만은 않았다.
“커엉!”
막 한 마리의 대가리가 그대로 함몰되었다.
이미 사체라지만 머리통이 완전히 부서지면 되살리는 건 힘들다.
애초에 그의 주술은 두개골과 피를 매개로 하는 거였으니.
산군은 그걸 보고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머리를 노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 수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마하둘, 베를, 케르루!”
하지만 케륵은 당황하지 않고 주문을 계속 이어 갔다.
지금은 불리해 보여도 딱 한순간, 기다리는 순간이 오면 모든 게 뒤집힐 것이라 믿고서.
그리고 잠시 후 케륵이 기다리던 때가 왔다.
-커허허어엉!
산군 하나가 목덜미를 물어뜯겨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이제 남은 비율은 일 대 사.
어찌보면 크게 전황이 바뀌진 않은 것 같지만.
케륵이 있다면 다르다.
“마하켈! 바하두! 메투! 파룸!”
그는 항아리로 치료를 하는 걸 멈추고서 급히 바닥에 누운 시체를 향해 주술을 외기 시작했다.
들썩-
그 결과는 산군에게도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별안간 바닥에 쓰러진 동료의 몸이 꿈틀거리더니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커흥?
“커허허어엉!”
그리고 그 시체는 바로 산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은 당황한 기색을 금치 못하면서도 열심히 발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전황은 획 기운 상태였다.
생전에 강했던 만큼 놈은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제 동료와 그리 크게 차이 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다른 괴수들까지 한 놈을 공격하고 있으니.
-커흐응.
곧 놈은 구슬픈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케르르를.”
케륵은 전투가 끝난 후에야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로서도 강력한 마경의 괴수들을 지배하려니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었다.
바깥에서는 수십 마리의 괴수도 조종하곤 했던 그가 이곳에서는 열 마리의 괴수를 유지하는 것조차 벅찼으니.
어찌 됐든, 케륵은 강력한 괴수들을 거느린 채로 중앙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