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흑룡도 어둠의 권속이라.’
난 복잡한 표정으로 흑룡과 뇌신의 전투를 보았다.
둘은 거의 박빙으로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이것은 과거의 기억.
뇌신은 힘을 잃기 전이었고, 그야말로 전율이 이는 무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데 흑룡은 그런 뇌신을 상대로 맞서 싸우고 있다.
‘저거 이길 수 있는 거 맞아?’
절로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놈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처지니.
둘이 싸우는 와중 흑룡의 분신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앙!
그 추락에 주변이 초토화가 됐다.
하지만 흑룡도 당한 만큼 뇌신에게 갚아 주었다.
기습적으로 성공해 낸 분신이 뇌신을 획 패대기친 것이다.
둘의 싸움이 이어지던 중. 돌연 현기증이 확 일었다.
난 바로 다음 이어질 상황을 알았기에 눈앞의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았다.
후우우웅-.
곧 정수리부터 강한 흡입력이 느껴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 * *
난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언제나 그렇듯. 정신을 차리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후우.”
진한 탈력감에 숨을 내뱉었다.
난 천천히 봤던 장면을 복기했다.
그래도 과거 모호했던 상황에 비해선 훨씬 명확한 상황이었다.
흑룡은 어둠의 권속이 되었고.
뇌신은 그것을 알아채고 맞서 싸웠다.
‘지룡이 흑룡에게 죽은 건 그 이전인가?’
과거 봤던 기억 중에는 지룡이 흑룡에게 죽임을 당하는 상황 또한 있었다.
또한 뇌신의 영역에 침투했던 그림자에 대해 회의를 할 때 흑룡은 어땠었나.
‘직접 뇌신의 영역으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했었지.’
풍룡, 광룡이라 불리던 초록 머리의 여자는 그 말에 밖으로 뛰쳐나갔었고.
“흐으음.”
그렇다면 그 풍룡은 어디로 간 걸까.
또한 소재가 불분명한 건 풍룡뿐만이 아니라 한 명 더 있다.
‘그 백발의 남자도 있었지.’
뭐, 이름은 대충 백룡이라 하자.
그 둘은 지난 기억 속에서 딱히 최후를 맞이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뇌신이 따로 언급하지도 않았었고.
‘뭐 기억에만 없지 이미 죽었을 수도 있지만.’
내가 본 기억에 모든 것들이 나왔던 건 아니니까.
기억 속에 나온 흑룡의 무력을 생각하면 우리 쪽에도 용 한 명쯤은 같이 싸워 줬으면 싶지만.
“용은 무슨.”
말도 안 되는 바람은 접어 두고 할 일을 해야지.
달그락.
난 여전히 손에 들린 검은 구슬을 보았다.
우선 이게 단순히 장식용 구슬이 아니란 건 알겠다.
분명 무언가 쓸모가 있겠지.
난 구슬을 다시 인벤토리로 넣었다.
슬슬 무언가가 일어나려 한다.
갑작스러운 흑룡의 출현.
전략가는 제국의 수도에 자리한 채 주변으로 마수를 뻗치고 있고.
전쟁이 멀지 않았다.
‘아쉽지만 이제 불러들여야겠군.’
그러니 우리도 이제 방어를 준비해 둬야 한다.
그리고 미루고 미뤘던 것을 해치워야지.
이거 원, 왕인데 자리를 비울 때가 더 많으니 왠지 직무유기를 하는 것 같네.
“여봐라.”
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제를 불러 명했다.
트렌에게 연락을 넣어 ‘모든 인원’을 데리고 수도로 오라고 전하라고.
‘두 명 정도는 수도에. 중요 거점에 배치하는 게 낫겠군.’
물론 그들은 숨길 때까지 숨겨 둘 생각이긴 하다.
그렇지만 아끼려다가 더 큰 걸 잃을 수는 없으니.
내가 자리를 비워도 그들이 방어를 맡아 준다면 큰 위험은 없으리라.
뭐, 어차피 이곳에서 그리 거리가 먼 곳은 아니니.
난 의자에 푹 몸을 기댔다.
* * *
케륵과 크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로 돌아왔다.
난 그들에게 다시 여정을 떠날 준비를 하라 명했다.
그리고 화린도 늦지 않게 인원들을 데리고 수도에 도착했다.
“두 명은 이곳에. 나머지는 각각 바하트리스 국경, 벨루곤, 수인 왕국 인근 쪽에서 대기하게.”
“알겠습니다.”
플레이어들은 별 불만 없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인원이 모인 상태에서 몇 가지를 더 얘기했고, 다른 인원들이 물러난 후 난 케륵과 크룩만 불러 말했다.
“우린 마경의 심부로 갈 거다.”
둘은 깜짝 놀랐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케르륵. 그렇습니까?”
“음. 더는 미룰 수가 없어서. 후방에 위험 요소를 놔둘 수도 없고.”
“크룩. 알겠습니다.”
얘기는 빠르게 끝났다.
어차피 셋이 떠나는 거고, 대비는 이미 충분했다.
며칠 후. 우리는 조용히 수도를 빠져나왔다.
백성들에게 굳이 왕의 부재를 알릴 생각은 없었기에 우리가 떠나는 걸 안 건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가자.”
-알겠습니다.
이번엔 오랫동안 쉬고 있던 펜리르도 함께였다.
아무래도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선 그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엔 나는 타지 않고 케륵과 크룩만 위에 탈 거다.
난 장비를 점검하고 몸을 푼 후 펜리르에게 말했다.
“아. 나보다 늦으면 오늘 저녁 없다.”
콰릉-!
발끝에서 전격이 피어오르고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자, 잠깐만요!
뒤에서 당황한 펜리르의 음성이 들려온다.
난 웃으면서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전력을 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변의 광경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이건 반, 반칙입니다!
펜리르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제법 잘 따라오고 있었다.
이런 탁 트인 평야에서 날 따라오고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엄살 피우지 마라!”
-엄살은 무슨!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금세 마경의 외곽에 도착했다.
그 후로도 쭉 달려서 마경을 통과하고, 제1부족, 2부족의 자리도 그대로 지나갔다.
멈춰 선 곳은 막 해가 져 갈 때, 심부와 외곽을 가로지르는 경계선 바로 직전이었다.
-케헥. 케헤헥.
바닥에 널브러진 펜리르는 무게 잡는 것도 잊고서 헥헥대고 있었다.
“오랜만에 뛰니까 재밌지?”
-케헤엑. 이게, 헥, 재밌어 보입니까?
녀석은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도 원망 섞인 눈으로 나를 보았다.
“재미없어? 아, 그러고 보니 나보다 늦으면 저녁 안 준다고 했었지?”
-헥, 예?
내 말에 펜리르의 눈빛이 일변했다. 녀석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넙죽 엎드렸다.
-아주 재밌었습니다. 주인님과 오랜만에 달리니 상쾌하기도 하고요. 헤엑.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어디, 안 본 지 오래됐다고 기어오르려고 그래.
난 픽 웃으면서 인벤토리에서 큼지막한 고깃덩이를 꺼내 주었다.
녀석은 신나서 그것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잠시 자리를 비웠던 케륵과 크룩이 돌아왔다.
“어때?”
난 둘, 그중에서도 케륵을 보면서 물었다.
케륵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케르륵. 여전히 강력한 결계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
난 턱을 긁었다.
애초에 심부로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 결계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혹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뭐, 애초에 크게 기대했던 것도 아니니. 내일 직접 가서 봐 보자.”
쉽게 못 들어간다고 포기할 생각은 아니다.
직접 보면 무언가 해결할 방법이 떠오를 수도 있고.
“그럼 오늘은 그만 쉬자.”
“예.”
미리 준비해 둔 식사를 꺼내 다 같이 나눠 먹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준비를 모두 끝낸 채로 결계로 향했다.
바로 앞이었기에 난 곧 앞을 가로막은 푸른 막을 볼 수 있었다.
“흠.”
푸른 막은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위용으로 광활한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난 우선 그냥 손을 뻗어 보았다.
파지직-.
처음 손을 댔을 때와 마찬가지로 강한 반발감이 들었다.
여기서 전격을 끌어올리면.
파앙-!
더욱 강한 반발감이 내 손을 확 뒤로 밀어냈다.
“크윽.”
난 저릿저릿한 느낌에 손을 털었다. 확실히 보통의 결계는 아니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콰르르르르르릉-!
난 모든 기운을 끌어모아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결계와 기운이 닿는 순간 결계가 울렁거리더니 크게 들썩였다.
콰앙-!
막대한 반탄력에 몸이 뒤로 날아갈 뻔했지만, 발을 땅에 박아 넣으며 버텨 냈다.
우웅-. 웅웅-!
“오오!”
뒤에서 누군가가 감탄한다.
앞에는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펜리르라도 무리 없이 통과할 정도의 크기다.
우웅-.
하지만 그것은 실시간으로 다시 막히려 하고 있었다.
난 이번엔 다른 성격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후우웅-!
그릇에 담긴 힘.
휘이이-!
반투명한 형상들이 뚫린 구멍의 경계선에 달라붙는다.
좁아지던 구멍은 오히려 더 넓어지더니 딱 적당한 크기에서 멈추었다.
“들어가자.”
난 옅은 탈력감을 느끼며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다른 이들도 바로 그런 내 뒤를 따라 구멍을 통과했다.
구멍은 모두가 통과하고 나서도 잠시 유지되다가 곧 원상복구되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결계네.’
난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솔직히 이 정도 힘이면 아예 영구적으로 구멍이 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릇의 힘까지 썼는데도 원상복구가 될 정도면 이걸 뚫을 사람은 손에 꼽을 거다.
뭐, 어찌 됐든.
우리는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조심해라.”
“케르를. 알겠습니다.”
“크룩. 예.”
-네.
우리는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문득 저번에 결계 안쪽에서 나타났던 괴수들이 떠올랐다.
‘제법 강해 보이긴 했었지.’
펜리르의 말에 따르면 심부에는 그런 괴물들이 널리고 널렸단다.
나도 많이 성장한 만큼 그런 괴물을 상대하는 게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예 걱정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애들이 널리고 널렸으면 그것보다 강한 놈들도 많을 테니까.’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다치는 것도 주의해야 하니.
조심하면서 가자.
휘이이-.
걷다 보니 후덥지근한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이곳의 기후는 열대우림 지역과 비슷하다. 식물도 그렇고.
마경이야 원체 기후나 지형이 제멋대로니.
그래도 의외인 점이라면 제법 오래 걸었는데도 마땅한 생물체를 보지 못했다는 거다.
“당장이라도 괴수가 뛰쳐나올 것 같은데.”
난 그리 말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작은 동물이나 곤충 같은 건 보인다.
평범한 숲의 풍경이고, 그래서 더 경계심만 커진다.
이러다가 확 무언가가 튀어나올까 봐.
우리는 무기를 꽉 쥐고서 더욱 안으로 걸어갔다.
계속해서 걷고 또 걷고.
드디어 무언가 다른 점을 발견한 건 몇 시간이 지나서 오후가 됐을 때쯤이었다.
‘벽돌?’
바로 울창한 열대우림의 한복판에 벽돌이 깔린 바닥이 나타난 것이다.
탁탁.
발을 내디뎌 밟아 보니 정말 평범한 돌바닥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공적인 흔적에 의아해하면서도 그것을 따라 걸었다.
뭐가 있을진 몰라도 기껏 찾은 단서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곧 우리는 그 돌바닥을 따라 걸어가다 왜 갑작스레 인공적인 흔적이 나온 건지를 알 수 있었다.
“신전인가?”
“케르륵. 그렇습니다.”
돌바닥의 끝에 딱 봐도 신전처럼 보이는 건물이 서 있었던 것이다.
건물의 주변으로는 나무나 풀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지만, 희한하게도 신전엔 풀 한 포기 안 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잘 관리하는 것처럼.
난 짧게 생각하고서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들어가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