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후.”
작게 내쉬어지는 한숨.
흑발의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 정도면 된 것 같군.”
“그렇습니까?”
남자의 중얼거림에 건너편에 앉은 이가 웃으며 답했다.
머리를 뒤로 쭉 당겨 묶고, 안경을 쓴 남자.
바로 전략가였다.
“그래. 열세 군데.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세 군데는 제법 힘을 실었지.”
“좋군요.”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다시 말을 꺼낸 것은 전략가였다.
“그래서 기분은 어떻습니까?”
그의 질문에 흑발의 남자는 턱을 기울이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글쎄.”
흑발 남자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게 의미가 있는가? 내가 느끼는 건 자네도 똑같이 느낄 텐데.”
“하하. 글쎄요.”
날카로운 질문에도 전략가는 그저 빙글거리며 애매하게 답할 뿐이었다.
흑발의 남자.
흑룡은 그런 전략가를 가만히 보았다.
이번 모든 사태에 있어서 둘은 중심에 있다.
아니, 둘이 거의 그 전부라고 볼 수도 있겠지.
흑룡은 느릿하게 말했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네.”
느릿하면서도 무게가 담긴 목소리로 전략가에게 말했다.
“또한 그렇게 느리게 흐르지도 않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을 거야.”
전략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투명하게 빛나는 안경알 너머 흑룡을 빤히 보며 말한다.
“이제 모든 게 시작될 테니까요.”
둘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말이 없어진 둘을 두고서, 나는 시야를 달리하였다.
높이 아주 높이 날아올라서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무너진 제국.
찬란한 인류의 보고였던 이곳엔 이제 마물과 죽은 자들이 가득 차 있다.
제법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기도 하지만, 또한 별것 아닌 일이기도 하다.
이곳은 시작일 뿐이니까.
모든 장기 말을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이제 게임이 시작되리라.
난 멸망한 제국의 수도를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아직 내가 일어날 때가 아니니 조금 더 잠들어 있어야 되리라.
눈을 떴을 땐 모든 게 달라져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 * *
“끌어내!”
폴그룬의 수도.
수도이면서 동시에 가장 많이 적의 침입을 받기도 한 도시.
난 도시 위에 떠서 거칠게 몸부림치고 있는 흑룡을 보았다.
내가 이곳에 도착한 지 벌써 두 시간째.
드디어 흑룡 사냥이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하아아아압!”
난 빛으로 이루어진 줄을 잡아당겼다.
이 줄은 흑룡의 몸 전체를 감싼 그물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전 사냥 때 썼던 전격 그물과 비슷하면서 더욱 강력한 위력이 담긴 것이었다.
“와아아아아아-!”
또한, 더욱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 있었다.
성벽 위에 자리를 잡은 사제들은 모두 나와 같은 줄을 손에 잡은 채 열심히 바닥으로 당기고 있었다.
-크오오오오오!
흑룡은 몸부림을 치며 빠져나오려고 한다.
게다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놈의 입에서 거대한 기운이 모여드는 걸 보고 난 잠시 줄을 놓고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좀! 끝내자!”
우우우웅-!
건틀릿을 낀 채로 모든 힘을 끌어모은다.
막 벌어지고 있는 녀석의 아가리 바로 밑에서 주먹을 위로 쳐올렸다.
꽈아아아앙-!
녀석의 입이 억지로 다물어지며 모여들던 기운이 그대로 흩어졌다.
난 거기서 그치지 않고 녀석의 몸 위에 올라타서 몸을 내려찍기 시작했다.
콰앙!
쾅!
쾅!
위에선 내가 내려치고, 밑에선 사제들이 줄을 잡아당긴다.
녀석은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우웅-!
거체가 추락하고, 다행히 놈의 몸은 성벽 바깥의 평야를 향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곧 그 몸이 땅과 닿으며 거대한 굉음과 진동이 일었다.
내가 오기 전 다섯 시간, 온 후 두 시간.
장장 일곱 시간 동안이나 이어진 전투가 끝이 난 것이다.
“헉, 허억.”
난 거칠게 숨을 내뱉으면서도 녀석의 머리통으로 달려가 그대로 검을 박아 넣었다.
놈은 그 충격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몸부림치더니 곧 축 늘어졌다.
“더럽게 끈질기네.”
녀석의 몸 밑으로는 액체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이후는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놈의 몸은 곧 액체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고, 난 어딘가로 날아가는 구슬을 잡아 인벤토리로 집어넣었다.
‘그 전 놈보다 더 강하군.’
난 그 과정을 모두 끝난 후에야 녀석을 상대하며 느낀 점을 되짚어 보았다.
분명 그 생김새는 거의 똑같았으나, 가진 힘은 달랐다.
그전 놈은 전혀 쓰지 않았던 ‘브레스’까지 썼으며, 가진 힘 또한 굉장했다.
‘사기 아니야?’
난 인상을 찌푸렸다.
듣기로는 분신이 이곳에만 나타난 것도 아닌 듯했다.
그렇다는 말은 한 번에 분신을 몇이나 만들 수 있다는 뜻인데.
이런 힘을 가진 놈이 다섯 마리만 돼도 상당히 골치가 아플 것 같다.
‘이번에 분신이 얼마나 나타난 건지 한번 확인해 봐야겠군.’
왠지 이번 한 번으로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는 건 대응 방법을 고민해 봐야 한다는 소리.
그건 그렇고.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아까 전과는 다른 느낌의 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선 미래의 일은 미래의 일이고.
난 몸을 돌려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
날 향해 환호성을 보내는 이들에게 화답했다.
당장 위기는 끝났으니 신전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살펴봐야겠다.
난 훌쩍 성벽을 넘어 중앙에 있는 신전에 안착했다.
“오셨습니까.”
신전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푹 고개를 수그리며 인사했다.
난 그들에게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약간의 식량을 풀어 사람들이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조처를 하라 명했다.
“알겠습니다.”
곧 내 시중을 들 사제 한 명만 남고서 모두 흩어졌다.
그리고 남은 한 명도 집무실 앞에서 대기하라 명한 다음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골치 아프군.”
난 당면한 상황을 되짚었다.
흑룡이 제국의 수도를 파괴했다.
그리고 이번엔 한 번에 몇 마리나 나타나 각 나라들을 침공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건가.’
전략가. 제국. 거기에 흑룡이 추가되었다.
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어둠’이란 무엇인가.
뇌신은 전략가를, 제국을 조심하라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어둠’과 그것에서 비롯된 모든 것들을 조심하라 말했다.
모든 것은 그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으로 끝날지니.
내 역할은 흩어진 뇌신의 힘을 모으고 숨겨진 다른 신들의 유산을 수습해 어둠을 막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그런 이야기들을 뇌신에게 전해들었다.
뇌신은 마지막 만남 이후로 전혀 응답이 없다. 영원히 잠에 든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게 힘을 넘겨주고 소멸한 것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더는 기댈 것 따윈 없다는 거다.
심지어 ‘시스템’조차.
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상태 창.’
속으로 그것을 불렀다.
지직-
하지만 나타난 것은 일그러지고 뒤섞인 기묘한 무언가였다.
시스템이 이렇게 된 것은 바로 내가 뇌신에게 ‘그릇’을 물려받은 다음부터였다.
‘다 쓸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우선 알림이나 인벤토리 같은 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작동이 안 되는 건 우선 상태창과 메뉴 창이다.
웃긴 건 ‘신화 포인트 상점’도 당연히 사용이 안 될 줄 알았는데 이건 또 작동된다는 거였다.
‘좀 바뀌긴 했지만.’
다만 이전처럼 메뉴의 형태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은 그냥 ‘이름’과 ‘구입한다’라고 속으로 말하면 이루어지는 형태이다.
“후우.”
복잡하다 복잡해.
난 고개를 내젓고서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렸다.
확인할 게 한 가지 더 남아 있다.
바로 흑룡의 구슬.
‘흠.’
난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구슬을 살펴보았다.
두 구슬은 내가 기운으로 억누른 이후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분명 이게 그 흑룡의 능력과 연관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정작 그게 뭔지 확인할 수가 없으니.
‘아니면.’
난 구슬을 손에서 굴리다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이 구슬들은 내 ‘기운’에는 억눌리기만 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힘이 그것만 있는 건 아니지 않나?
‘혹시?’
난 구슬을 쥐고서 이번엔 다른 힘을 퍼 올렸다.
바로 그릇에 담긴 신격의 힘을.
우우우웅-
그리고 마치 그것이 정답이었다는 듯 구슬에서 곧바로 반응이 일었다.
처음 흑룡을 죽였을 때 발광하듯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내가 기운으로 억눌렀을 때의 반응도 아니었다.
그저 공명하듯 부드럽게 움직일 뿐.
난 그것을 호기심과 경계심이 섞인 눈으로 보았다.
후우우우우웅-!
그리고 그것에서 점점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고서 문득 떠올렸다.
‘이거 왠지.’
강렬한 흡입력이 느껴진다.
‘엄청 익숙한……?’
그리고 시야가 어둡게 물들었다.
* * *
“허억!”
난 숨을 토해 내며 몸을 일으켰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 후에야 나는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걸 느꼈다.
울창한 숲속. 내가 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고 내 몸은 반투명하게 변해 있다.
‘이번엔 무슨 기억이지?’
바로 이전에 겪었던 기억 속으로 들어온 현상인 것이다.
난 조심스레 일어나서 주변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다른 점이 하나 있긴 했다.
그전에는 기억 속으로 들어왔을 때 주변에 누구 한 명씩은 있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숲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콰아아앙-!
그때 어디선가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깊게 생각할 것 없이 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울창한 풀숲을 지나 쭉 걸어가다 보니 곧 무언가가 보였다.
“흑룡-!”
그리고 누군가의 외침을 들었다.
난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찌 네가!”
분노에 찬 음성. 잔뜩 일그러진 얼굴.
주변으로 푸른 전격을 내뿜고 있는 남자. 바로 뇌신이었다.
-크오오오오오!
그와 맞서고 있는 건 바로 전까지 내가 상대했었던 흑룡이었다.
그런데 그 크기가 내 기억과 달리 무지막지하게 컸다.
족히 세 배는 되는 크기다.
콰르르르르르릉-!
뇌신은 분노에 찬 얼굴로 벼락을 내던졌다.
수십, 수백, 수천의 벼락이 흑룡의 몸을 난타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흑룡이 어렵지 않게 그것을 막아 내고 있다는 것이다.
-크오오오!
게다가 잠시 흑룡의 몸이 일렁거린다 싶더니 그의 몸이 뇌신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크기가 줄었어?’
흑룡이 둘이 되었다. 그리고 그 크기는 줄어들었다.
난 예상치 못하게 마주한 흑룡의 능력에 입을 벌렸다.
‘그럼 그 구슬은?’
흑룡의 힘의 조각인 건가?
-뇌룡.
흑룡은 양쪽에서 뇌신을 몰아붙이며 입을 열었다.
-나를 원망하지 말고 너의 어리석음을 원망하라.
우우우우우웅-!
흑룡의 두 신체가 동시에 기운을 끌어 모은다.
바로 브레스를 내뿜으려는 것이다.
-나는 본래부터 어둠의 권속. 내가 이리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었나?
콰과가가가가가가-!
이어서 거친 기운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나는 그 위력에 전율했다.
내가 봤던 것은 저런 위력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저런 위력이라면 감히 막을 엄두를 못 냈으리라.
흑룡은 계속 공격을 이어 가면서 충격적인 말들을 이었다.
-어둠이 강림하시니 나는 선봉장이 되어 너희 수호자들을 말살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