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이곳에 관한 이야기는 전부터 들어 왔었다.
계속 포섭을 하고자 눈독을 들였었는데 이제야 찾아온 이유는 이곳이 바하트리스 너머에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사람 한두 명을 포섭하는 거라면 모를까, 부족 전체를 다른 나라의 영토를 거쳐서 데려오기엔 무리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금은 전혀 문제가 없지만.
“그럼 계속 올라가자고.”
나는 먼저 앞서서 걸어 올라갔다.
허탕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니 발걸음도 더 가벼웠다.
괴수의 시체를 넘고 나니 분위기도 약간 달라졌다.
그 전까지는 일반적인 산과 크게 다를 바를 못 느꼈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조용하군.’
조용하다. 그것도 이상할 정도로.
산이나 숲 같은 곳은 조용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절대 조용할 수가 없다.
나무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 소리, 작은 동물들이 돌아다니며 내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곤충이 우는 소리.
숲에는 그런 다양한 소리가 가득하다.
그런데 이곳에선 그런 소리가 일절 없었다.
오직 고적한 바람 소리만 이따금 들릴 뿐.
괴수의 시체도 그렇고, 놈들이 우릴 마냥 환대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소문에 나온 것처럼 무턱대고 달려들지는 않는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들은 호전적이었으니까.
“케르르르를-.”
갑자기 고블린 특유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내 바로 뒤에 있는 케륵이 낸 소리는 아니었다.
소리는 우리 앞, 그것도 꽤 거리가 있는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였다.
두두두두-.
동시에 무언가가 땅을 박차는 소리도 들린다.
드디어 마중을 나오는 것인가.
우리는 각자 무기를 들어 올렸다.
환영 인사를 할 셈이라면 우리도 마땅히 마주 인사를 받아 줘야 하니까.
두두두-!
울려 퍼지는 소리는 고블린들의 발소리라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 무게감도 다르고, 두 발보다는 네 발로 뛰면서 나는 소리에 가까웠다.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
나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케륵과 크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거친 산 지형.
일반적인 탈것이 다닐 만한 곳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탈것이 아니라면?
우리 울프 라이더만 해도 산이고 뭐고 거칠 것 없이 뛰어다니는데.
파악!
앞의 풀숲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무언가가 확 뛰어나왔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회색빛의 털 뭉치. 머리 위로 구불구불 솟은 뿔.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고블린이었다.
탈것의 도약력이 상당한지, 놈들은 내 머리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무기를 내리고 손을 뻗었다.
덥썩.
발굽으로 그대로 나를 내려찍으려던 짐승의 발목을 붙잡았다.
잠시 녀석들이 당황해하는 게 보였지만 난 그대로 한 바퀴 돌렸다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콰앙!
“쿠에에에엑!”
…뭔가 엄청난 소리가 난 것 같지만.
괜찮을 거다. 아마도.
나는 녀석들이 달려드는 족족 다리를 붙잡아 주변으로 던져 버렸다.
크룩과 케륵은 내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놈들을 확실하게 제압했다.
관성 때문인지 앞에서의 상황을 바로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은 스무 마리가 그렇게 당한 후에야 돌격을 멈추었다.
부스럭.
“케, 케룰.”
앞의 풀숲에서 빠져나오려던 고블린이 슬쩍 뒷걸음질 쳐 사라진다.
주변에는 쓰러진 고블린들이 끙끙 앓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아니, 동료들이 이렇게 당했으면 다시 달려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먼저 가 봐야 하나 생각을 하는 찰나에 앞에서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는 누구냐.”
화려한 가면을 한 고블린이었다.
그 복식 또한 굉장히 화려했는데, 곳곳에 색색의 장신구를 달고 있었다.
“네가 족장이냐?”
난 녀석을 한 번 훑어보고는 툭 질문을 내뱉었다.
“아니. 난 주술사다.”
녀석은 지팡이를 위협적으로 흔들며 말했다.
흠. 주술사와 족장이 나뉘어 있다면 생각보다 더 규모가 클 수도 있겠다.
본래 케륵의 사례에서 보다시피 작은 규모의 부족들은 주술사와 족장을 굳이 따로 나누지 않는다.
효율의 문제였는데, 무리가 작은 경우 대가리가 둘이면 명령 체계에 오히려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
“족장은?”
“케루룰. 위대한 전사는 고작 이런 일에 나서지 않는다.”
녀석은 날카로운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내 말에는 꼬박꼬박 대답했다.
이런 일에 나서지 않는다는 건 두가지 경우일 거다.
족장의 권력이 확실하거나 주술사가 생각보다 영향력이 크거나.
여러 경우를 생각하며 난 슬슬 본론을 꺼냈다.
“그러면 네 부족에 좀 안내해 봐. 확인할 것도 있고 족장이랑 얘기도 해야 하니.”
난 거만한 말투로 놈에게 턱짓했다. 가면에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놈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 정도는 보였다.
“이런 건방진 놈들.”
그리고 녀석의 발밑에서 푸른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곧 산들바람으로, 산들바람은 돌풍으로 바뀌었다.
저게 바로 녀석이 바로 달려들지 않고 시간을 끌던 이유였다.
나와 대화를 하는 척하면서 주술을 준비하고 있던 거다.
물론 나는 그걸 알면서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왕 힘의 격차를 보여 줄 거면 확실히 보여 주는 게 좋으니까.
“감히 우리 영역에 침범한 대가를 치러라!”
주술사는 지팡이를 휙 앞으로 뻗으면서 바람을 쏘아 내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주변의 것들을 찢어발기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람이라.
생각보다 시시한데.
휘이이이이이이-!
난 그냥 앞으로 손을 뻗었다.
자신만만해 보이는 주술사를 슬쩍 보고서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퍼엉-.
들이닥치던 바람이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휘-.
아주 가벼운 바람이 우리 주변을 스쳐 지나갔다.
주술사의 가면 너머로 깜짝 놀란 기색이 보였다.
바람에 관한 주술이 아니라면 더 재밌었을 텐데.
하필 바람으로 나에게 덤비다니 운도 없다.
“뭐 해.”
난 웃으며 말했다.
“안내해.”
* * *
우리는 산등성이를 타 올랐다.
앞에는 ‘산양’을 탄 고블린들과 터덜터덜 걷는 주술사가 있었다.
놈은 힘의 차이를 보여 준 후에도 끈질기게 덤벼들었지만, 난 그것을 압도적으로 찍어 눌렀다.
거기에다가 케륵이 나서서 가벼운 정신 계열 주술까지 걸자 놈은 바로 복종했다.
산의 경사는 제법 가팔랐지만, 이 중에 그것을 힘들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완만한 경사인 곳에 다다랐고, 곧 부락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제법 크네.”
“그렇게 말입니다. 크루룩.”
크룩도 약간 놀란 표정으로 부락의 전경을 보았다.
부락의 크기는 예전 바람 부족보다도 더 커 보였다.
지금이야 우리가 왕국이라고는 하지만, 과거 부족을 다스리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 규모는 아주 큰 축에 속했다.
바람 부족은 마경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였으니.
‘괜히 고블린이 다스리는 산이라는 얘기가 나온 게 아니군.’
난 고개를 끄덕이며 부락을 감싼 울타리로 다가갔다.
“누구냐!”
가까이 가자 경계를 서고 있던 고블린이 크게 소리쳤다.
난 주술사를 보았고, 주술사는 시선을 느꼈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앞으로 나섰다.
“내 손님이다! 문을 열어라.”
경계병은 뒤늦게 주술사를 발견하고선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곧 울타리의 가운데에 있는 문이 열렸다.
주술사는 지금 정신 계열 주술에 복종당한 상태.
만약 주술까지 동원하지 않았으면 놈은 죽으면 죽었지 우릴 데려오지는 않을 기색이었다.
그렇기에 경비병도 주술사를 보고선 문을 열어 준 거겠지만.
‘뭔가 이상하긴 하네.’
부족의 규모를 확인하고 나니 의문이 생겼다.
부락의 경계나 시설들은 생각보다 훌륭했다.
또한 산양을 길들여 타고 다니는 전사들의 수준도 훌륭했고.
반면에 주술사의 실력은?
‘분명히 뛰어나긴 하지만.’
딱 그 정도일 뿐.
물론 바람과 관련된 주술을 쓰는 것 때문에 더 손쉽게 제압당한 게 있긴 하다.
그러나 그걸 제외하더라도 놈의 실력은 과거 대지 부족의 주술사보다 못했다.
대지 부족의 규모가 이것보다 훨씬 작은 걸 생각하면.
‘마경이 가지는 특수성 때문인 건가?’
분명 마경에는 규모에 비해 강한 전력을 가진 이들이 많긴 했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것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으로 오시지요.”
우리는 주변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을 느끼며 쭉 부락의 내부를 걸었다.
그가 안내한 곳은 제법 크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난 주술사에게 족장한테 안내하라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이 안에 족장이 있다는 거겠지.
“그럼.”
난 바로 건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은 아무런 저항 없이 열렸고, 곧 그 내부가 드러났다.
그리고 난 건물의 내부, 가장 안쪽에 앉아 있는 한 고블린을 보고선 아까 전 떠올렸던 의문의 답을 얻었다.
‘족장과 주술사.’
난 머리 두 개가 있는 꼴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보통은 그게 일반적이니까.
하지만 저 고블린의 기세를 보니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서 오십시오.”
늙은 고블린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녀석에게선 고블린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중후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저는 산 부족의 족장이자 대주술사, 케투훌이라고 합니다.”
녀석은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대주술사.
즉 족장과 주술사가 아니라 대주술사와 그의 제자인 주술사라는 거다.
부족의 규모에 비해 주술사의 실력이 부족한 이유가 밝혀졌다.
애초에 놈은 수장도 뭣도 아니었으니.
“난 벼락 부족과 바람 부족, 대지 부족, 그 외 마경의 모든 부족을 통합하고 왕국을 세운 자. 폴그룬 왕국의 이호진이다.”
나도 그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그는 공손한 태도로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우리 부족한 제자가 귀한 분들에게 폐를 끼친 것 같군요.”
케투훌은 슬쩍 시선을 돌려 주술사를 보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걸린 주술을 풀어 주어도 되겠습니까?”
그는 주술을 풀어 달라는 게 아니라, 풀어도 되냐고 물어봤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그는 슥 손을 들어 주술사를 가리켰다.
뭐라고 입을 달싹이며 중얼거린다 싶더니.
“케루루룰?”
주술사가 갑자기 번뜩 정신이 든 것처럼 당황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주변을 휙휙 보고 나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은 듯했다.
“조, 족장님.”
“되었다. 나가 보아라.”
족장 케투훌은 단호한 음성으로 그리 말했다.
주술사는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문을 닫고 나갔다.
“아. 이곳에 앉으시지요.”
케투훌은 주술사가 나가자 다시 우리를 돌아보았다가 어딘가에서 의자를 가져왔다.
난 그 의자에 앉은 후 케투훌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 아래로 들어와라.”
앞뒤 맥락도 없는 말이었지만, 그는 질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형편이 안 됩니다.”
“그럴 형편이라는 게 뭐지?”
그는 잠시 난감한 기색을 보이더니 곧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전략가라는 자의 부하들이 다녀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