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에바 왕국은 기습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그 저력을 보여 주었다.
난 벼락을 쏟아내며 전장의 흐름을 살폈다.
‘생각보다 조직력이 좋네.’
궁병들이 화살 비를 쏟고, 크룩과 철우 형이 전장을 휘젓고 다닌다.
그런데도 의외로 에바 왕국의 병력들은 제법 분전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에바 왕국은 보병이 강한 편이긴 하지.’
바하트리스는 궁병으로 유명하다.
또한, 공국인 것치고 강자의 수가 제법 많은 편이었다.
반면에 에바 왕국은 보병들이 강하다.
그 이면에는 또 검성의 영향이 일부 존재했는데.
검성 같은 경우는 그 유명세에 비해 의외로 권세 높은 귀족은 아니다.
물론 왕국에서도 그 실력에 맞게 대접을 해 준다고는 하나, 검성 자체가 그리 권력에 큰 욕심이 없는 성격이라고 했다.
하지만 검성은 병사들에게 제법 인기가 많았다.
검성도 본래는 군인 출신이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검술 비결 같은 것도 왕왕 병사들에게 가르치기도 했고, 일반적으로 창병이 대세인 다른 왕국과 달리 에바 왕국엔 검병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꽤 많았다.
특히 그 검병 부대가 몇몇 전투에서 큰 활약을 보여 그 위력 또한 검증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상황에선 별수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불리하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검병이 강하면 뭐 하나.
독 안에 든 쥐처럼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는 데다가 크룩과 철우 형이 제대로 된 지휘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휘젓고 있는데.
딱 생각보다는 잘 싸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놈들의 전략의 핵심인 ‘감성’이 없지 않나.
가끔 제법 강해 보이는 이도 있긴 하다.
“크아아아아아!”
지금도 한 명이 창을 높게 들더니 함성을 내지른다.
그의 창 주변으로 새하얀 기류가 모여들며 심상치 않은 느낌을 뿜어냈다.
저대로 두면 우리 병사들의 피해가 예상되는 바.
파지지직-!
난 창을 당겼다가 그대로 쏘아 내었다.
콰릉!
우렛소리와 함께 창이 날아가 순식간에 남자의 목덜미에 꽂힌다.
“크윽?”
남자는 뒤늦게 자신의 목에 박힌 창을 더듬더듬하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이 전투에서 내 역할이 이런 거다.
조금이라도 심상찮은 낌새가 보이면 바로 요격해 버리는 것.
그 결과 적들은 변변찮은 반항도 하지 못했다.
난 혼란스러운 전장을 살피다 한 남자를 발견했다.
휘황찬란한 금발. 척 보기에도 제법 화려해 보이는 갑옷.
이런 전장에서는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사내의 주변에 있는 이들도 만만치 않게 화려한 갑옷을 걸치긴 했으나, 남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왕?’
난 머릿속에 있는 정보와 남자를 비교해 보았다.
‘맞는 것 같은데.’
세세한 특징을 알고 있는 건 아니나, 보면 볼수록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남자 또한 나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얼굴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난 슬슬 주변의 상황을 보아 더는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되겠단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저놈은 내가 직접 사로잡는 게 나으리라.
행여 크룩이 흥분해서 그대로 죽일 수도 있으니.
후웅-.
난 주변의 바람을 조작해 남자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 막아라!”
내가 접근하는 걸 보고 남자의 주변에 있는 이들이 소리쳤다.
‘호위 기사들인가.’
그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그대가 에바의 왕인가?”
난 검을 치켜든 기사들을 무시하고서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자는 패배감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난 그에게 다가갔다.
“하압!”
기사들이 그런 나에게로 달려 든다. 보통 때라면 몇 번 합이라도 나눠 줬겠지만.
콰르르르릉-!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런 여유를 부릴 생각은 없다.
유리한 상황이라 해도 이왕이면 빨리 끝내는 게 나을 테니.
“크으으윽!”
달려들던 기사들이 전류의 파도에 몸을 뒤튼다.
보통 놈들이라면 이 한 방에 무력화됐을 테지만, 기사들은 바로 쓰러지지 않고서 곧 회복했다.
그래도 3성은 넘는 놈들인 듯했다.
난 무기를 검으로 바꾸며 바로 제일 앞에 있는 놈한테 달려들었다.
콰앙-!
놈의 검과 내 검이 부딪치며 굉음을 일으켰다.
내 검은 멀쩡했지만, 놈의 검은 그 일격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난 다리를 휘둘러 그의 정강이를 그대로 걷어찼다.
기사의 다리를 감싸고 있는 갑옷이 와직- 하는 소리를 내며 우그러들었고.
빠각!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덤이었다.
“끄아아악!”
“아직 수행이 부족한가 보군.”
비명을 지르며 허물어지는 사내에게 한마디를 해 주며 바로 발을 옮겼다.
다리가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였으니 몸을 일으키기 힘들 거다.
난 검과 건틀렛을 자유자재로 바꿔 가며 기사들을 상대했다.
그래도 3성이 다섯 명이나 돼서 그런지 제법 시간은 걸렸다.
한 십 분 정도?
왕으로 추정되는 놈은 기사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난 바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파직-
전격과 함께 순식간에 사내의 뒤를 점했다.
난 슬쩍 사내의 옆에 있는 이를 보며 검을 휘둘렀다.
카가각-!
내가 휘두른 검이 처음으로 막혔다.
사내는 기사들과 내가 전투를 벌이자마자 도망가긴 했지만, 혼자서 도망간 건 아니었다.
검은색의 갑주를 걸친 기사.
난 한껏 비아냥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얘 보모냐?”
내가 생각해도 좀 경박한 말투인 것 같다.
하지만 기사는 그런 내 말에도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검을 휘둘러 왔다.
캉-!
검을 옆으로 쳐내며 전격을 가득 담아 다시 검을 찔렀다.
카가가각-!
사내는 검을 세로로 든 후 몸까지 살짝 틀며 검을 흘려내었다.
단순히 검을 맞대는 것만으로는 막을 수 없을 거란 생각에 갑옷의 곡면까지 이용해 방어한 것이다.
‘다른 기사들과는 다르군.’
방금 전의 보통 기사들은 검 한 번 제대로 막지 못하고서 박살이 났다.
제법 흥미가 동하긴 했지만, 이놈이 막는 동안 금발의 사내는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쯧.”
난 혀를 차고서 기운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콰르르-
막대하게 솟구치는 전격을 그대로 주변으로 퍼트렸다.
그것만으로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기사도 겉으로는 멀쩡한 척을 하고 있지만, 검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포기하지 그래? 어차피 이미 끝나가는 마당인데.”
난 기사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며 검을 휘둘렀다.
그는 제법 분전하면서도 합을 겨룰 때마다 지쳐 가는 게 보였다.
단순히 검과 검이 부딪치는 게 아니라, 부딪칠 때마다 남자에게 전격이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다.
콰앙!
쾅!
난 그를 쉴 새 없이 몰아붙였고, 기사는 곧 한계를 드러냈다.
휘익!
기사가 검을 휘두르고, 난 그걸 검으로 쳐 올렸다.
그의 품이 활짝 열린다.
내 검은 각도상 그 빈틈을 공격할 수 없었지만, 건틀렛은 다르다.
콰앙!
검을 그대로 건틀렛으로 바꿔 기사의 가슴팍을 가격했다.
기사는 그 일격에 뒤로 튕겨 나가 몇 번 일어나려 하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끝이군.’
생각보다 오래 버티긴 했다.
금발 사내의 주위엔 어느새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들 몇 명이 에워싸고 있었고, 성벽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으니.
뭐.
그래 봤자 소용없는 짓이지만.
난 몸을 띄워 기운을 끌어올렸다. 굳이 창을 휘두를 필요도 없이 전력을 끌어모아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 꽂았고.
콰르르르르릉-!
굉음과 한 번의 번쩍임.
그것으로 전투는 끝났다.
* * *
난 공작의 항복 선언을 받은 후 바로 전 병력을 벵칼 안으로 진입 시켰다.
바하트리스 공작이 우리가 성내에 진입해 학살이라도 벌일까 봐 불안해하는 통에 계약서까지 하나 써 주어야 했다.
그것도 그냥 종이로 된 계약서가 아니라, 마법적인 효력이 담긴 물건으로.
그렇게 우리는 성내에 진입한 후 병력을 흩트려 숨겨 놓았다.
‘에바 왕국 놈들이 순순히 진입할 거라곤 생각 안 했지만.’
그러나 지금처럼 왕국의 병력이 이렇게 바로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머리라는 게 달려 있으면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볼 만하고.
그런 의심 같은 걸 없애기 위한 계획을 몇 가지나 짜 놨었는데.
놈들은 그냥 들어왔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대체 왜?’
전투가 한창일 때 처음 느꼈던 의문이다.
바하트리스의 패배야 그렇다 치자.
놈들은 우리의 전력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대비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밀린 거니까.
그런데 에바 왕국 놈들은 왕까지 데려와서는 어린애도 안 속을 만한 계략에 당한 것이다.
그래서 전투가 끝난 후에도 완전히 방심을 풀지 않고 병력을 제대로 배치해 뒀다.
“흠.”
병력이 배치된 걸 확인한 후.
난 바하트리스의 성으로 들어왔다.
공작에게 볼일은 없고, 이번에 잡힌 포로들을 심문하기 위해서다.
일반 귀족들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 놓았지만, 단 한 명만은 내가 직접 심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제법 넓은 방 안.
완전히 무장 해체당한 채 흰 천 옷만을 걸치고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바로 에바 왕국의 왕이었다.
“…….”
금발의 사내는 그런 내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놈의 이름은 레온 뭐시기.
왕이라 그런지 이름이 너무 길어서 그냥 레온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레온. 똑같은 왕이고, 넌 포로로 잡힌 몸이니 그냥 편하게 말하지.”
난 의자에 몸을 뒤로 기대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내 질문에 그는 처음으로 나를 슬쩍 보았다.
그의 입이 열렸다.
“속셈?”
“그래. 속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왕이 있는데 군대 꼴이 왜 그 지랄이지?”
난 신랄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네 호위 기사는 제법 강하긴 했어. 하지만 그게 다야.”
난 몇 가지 걸렸던 점을 지적했다.
우선 병력의 수에 비해 강자의 수가 매우 적다.
“그리고 아무런 방비 없이 성에 진입한 걸 보면 제대로 머리 쓰는 놈도 없는 것 같고.”
레온 왕은 바로 대답할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난 우선 생각했던 것들을 죽 늘어놓았다.
그의 표정이라도 살펴볼 요량으로.
그는 무표정한 채로 내 말을 쭉 듣더니 마지막에야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자네들이 생각보다 더 강하더군.”
뭔가 말이 더 이어질 줄 알았는데 그는 그 말을 하고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난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끝인가? 생각보다 더 강해?”
“그래.”
난 멍하니 그를 보다가 뒷덜미를 긁었다.
얼마 전 제크를 통해 에바 왕국에 대한 정보 몇 가지를 더 들었다.
그중에서는 신빙성이 낮지만, 최근에 도는 소문들도 몇 가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난 그중 하나를 떠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에바 공작은 도대체 왜 없는 거지?”
내 질문에 처음으로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에바 공작.
어떤 면에서는 검성보다도 더 유명한 인물.
다른 이들의 보고를 통해서도 에바 공작이 전장에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확인했다.
나도 못 봤고.
레온 왕은 나를 보더니 곧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묻고 싶군. 도대체 에바 공작은 어디로 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