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날갯짓 같은 소리가 났다.
벌의 날갯짓.
우우웅-!
공간을 격하며, 가로막는 모든 걸 그대로 지나쳐 원하는 지점을 타격한다.
퍼억!
귓가로 또 한 번의 공격이 지나간다.
귀 끝이 그 공격에 일부분이나마 뜯겨 나갔다.
‘겨우 그 정도’라고 평가할 수도 있는 피해였지만, 이 상황에서 그 정도나마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난 전장의 상황이 나아짐에 따라 전방에 내리던 뇌우를 멈추고, 그 힘을 오롯이 검성에게만 집중시켰다.
콰르르르르르릉-!
그것은 강력했고, 무엇이라도 재로 만들 것 같은 위력을 담고 있다.
일례로 이 힘을 귀궁에게로 돌린다면 그는 일 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검성은 그 힘을 계속 막아 내는 것뿐만 아니라 반격까지 하는 것이다.
‘대단해.’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크윽.”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검성은 시시각각 한계에 몰리고 있었다.
비록 난 그릇에 담긴 힘이 미약하다 하나, 그것이 없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을 얻었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이미 뇌령은 고갈될 대로 고갈되어 쓰러진 후겠지.
하지만 난 여전히 건재하다.
반면에 검성은 어떤가.
우웅!
여지없이 공격은 날아오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약해졌다.
수십 줄기의 검격이 허공을 격하고 날아오지만, 그 날카로움은 이미 무뎌졌다.
그래서 난 창을 쥐었다.
다시 주변을 떠도는 영혼들을 모아 창끝으로 밀어 넣었다.
이번엔 광범위 공격이 아니다.
그렇기에 힘을 오직 한 점으로만 모으면 된다.
이대로 지속적으로 힘을 깎으면 더욱 안정적으로 꺾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무언가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검성을 위해서라도.
창에서 환한 빛이 퍼져 나가고 난 그것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과거 모든 힘을 긁어모으고, 그러고 나서도 쓰고 나면 픽픽 쓰러질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떤가.
난 창에서 발현되는 힘을 충분히 억누르며 그것을 정확히 조준한다.
온전한 내 통제하에 두고서 창을 뒤로 당겼다가.
앞으로 찔렀다.
우우우웅-!
앞으로 쏘아져 나간 푸르고 노란 빛. 그것은 서로에게 엉겨 붙으며 일정한 형체를 띤다.
상서로운 빛, 투명한 눈. 거대한 아가리.
말 그대노 용의 모습이요, 그 기술의 이름도 ‘신기 뇌룡’이다.
이제는 죽어 없어진 용의 이름을 한 기술이 검성에게 떨어져 내린다.
검성 발렉투스는 그것을 보고서도 검을 들어 올렸다.
그는 검을 휘둘렀고, 무언가 기술을 시도했지만.
콰아아아아아아앙-!
그것은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하고 스러졌다.
그래도 의미를 찾자면, 그는 끝까지 검사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호진의 기술은 화려했고, 이 전장 모든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상서로운 빛을 뿜어내는 용이 지상에 강림했다.
그것은 연합 측의 사령관은 아니지만, 가장 강한 장수인 검성을 집어삼켰고.
검성은 죽었다.
“아, 아아…….”
병사들은 그저 신음할 뿐이다.
마물의 등장도, 갑작스러운 저 용의 등장도 그들에겐 생각지 못한 일이었고, 익숙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들을 독려할 장수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남은 건 귀궁 황 윤뿐이지만, 그 또한 자신의 전투를 하느라 병사를 지휘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도망가지도 못한 채 그저 절망했다.
“모두 마물들에게 돌진하라!”
반면에 폴그룬 왕국의 병사들은 모두 알아챘다.
적의 기세는 꺾였다.
저들은 알아서 자멸하거나 항복할 것이고, 남은 건 아직 기세등등하게 덤벼드는 저 마물들뿐.
“크르라아아아!”
크룩은 항상 그렇듯이 제 몸을 키운 채 마물들에게 달려들었다.
이렌은 병사들 모두를 아우르는 초록색의 빛을 퍼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지막으로 호진은 창백한 얼굴의 남자를 보았다.
“제임스라고 했나?”
호진과 남자의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호진의 목소리는 남자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이제 자네 차례네.”
* * *
제임스.
그게 그의 본명은 아니었다.
그저 아무것이나 주워섬긴 것일 뿐. 딱히 이름을 밝힐 생각도 없었기에.
그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테스트 제의를 수락했다.
적당한 보수와 이 게임에 대한 적당한 추억이 그를 끌어당겼다.
그는 ‘게임’이라고 생각한 것에 접속해 처음엔 제법 성과를 얻어 냈다.
과거 게임을 즐겼을 적 시도했었던 ‘공간 술사’ 테크 트리를 훌륭하게 따라갔다.
문제는 도저히 밖에 나갈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그는 자신의 힘이 강력하다고는 하나, 가장 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전투보다는 보조에 적합한 역할이었고, 장수보다는 하나의 장기 말에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어찌 됐든, 그는 이 혼란스럽고 야만적인 세계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그렇기에 전략가에게 투신했다.
그의 생각에 전략가도 그저 플레이어일 뿐,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딱히 악하다 선하다 하는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로그아웃할 수 없다 하나 이건 게임이 아닌가?
그것은 기실 전략가의 밑에 있는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닮아 있었다.
이것은 게임이다.
우리가 악한 짓을 해도, 사람을 죽여도.
이것은 게임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습게도 사람들은 그런 말을 계속해서 떠올리며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했다.
제임스도 그런 많고 많은 사람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절망.
‘말도 안 돼.’
제임스는 창백한 얼굴을 들어 허공을 보았다.
마치 신과 같은 모습으로 지상에 벼락을 내리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전략가는 제임스를 불러 말했다.
‘그곳 왕국에는 꽤 강자가 많은 것 같다. 우선 소문으로는 4-5성일 것 같긴 하지만…….’
전략가는 무언가 탐탁지 않은 듯 턱을 쓰다듬었고, 그에게 칼날 마귀 열 마리를 약속하였다.
‘말도, 말도 안 돼.’
그런데 그 칼날 마귀들이 벼락에 찢겨 나가고 있다.
고작 이런 전장에서 저렇게 쉽게 죽어 나갈 만한 놈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공간의 힘은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이다.
그렇기에 이번 계획의 골자는 이랬다.
우선 강한 마물들을 쏟아 내어 적의 주전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다.
그다음은 비교적 약하고, 흔한 놈들을 쏟아 내어 적과 부딪치게 한 뒤, 자신은 강한 마물들을 회수해 복귀한다.
그런데 그 계획이 처음부터 무너졌다.
-키에에에에에엑!
마물들이 ‘포털’을 나서기 무섭게 죽는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놈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죽음이 내렸고.
자신은 무력하게 포털로 마물을 쏟아 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지?’
포털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론 그저 저 거대한 힘에 짓눌릴 뿐이다.
무언가 수를 써야 하는데, 뭔가 변화를 주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다.
남들의 죽음 앞에선 이곳이 게임이라 합리화하던 그였지만.
‘아아.’
그는 턱밑까지 치달은 죽음 앞에서 생각했다.
‘죽기 싫다.’
이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그저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그리고 재밌는 건 전략가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그런 감정에 반응하는 마법을 심어 놓았다는 것이다.
우우웅-!
포탈에서 강대한 기운이 발산되어 나온다.
터업.
무언가가 포털의 양 끝을 붙잡고 제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제임스는 그 기운에 몸을 떨었다.
절망이 아니라 환희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지금 포털에서 나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저 압도적인 힘과 강렬한 악의를 발산하는 것은 누구인가.
제임스는 얼굴을 부들부들 떨어 대며 웃었다.
제임스. 그는 전략가의 부하 중 한 명일 뿐이다.
하지만 전략가의 밑에는 단순한 부하가 아니라 ‘장군’들이 있다.
병력을 통제하고, 지휘하는 것을 넘어서 최전선에서 싸우는 괴물들.
마물들을 이끌되 마물이 아닌자 .
마물이 아니되 괴물이라 불리는 자들.
제임스는 웃었고, 호진은 포탈을 빤히 보았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모습을 드러낸 자는 찬찬히 주변을 보았다.
그 몸짓 하나하나에는 여유가 있었고, 주변으로 발산하는 기운에는 여유를 뒷받침하는 기세가 있었다.
‘저 정도였나.’
난 그걸 노려보았다.
이런 광대한 힘을 얻었다 해서 최강자가 되었으리라는 착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게임을 떠올렸다.
4성이니 5성이니, 그런 것은 보통 NPC들에게 붙는 분류였다.
그리고 게임에선 강한 NPC들이 아주 많았다.
그중에는 이곳에 실존하고 있는 인물도 있고, 아닌 인물도 있다.
그것과 별개로 그들이 강하다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최강자의 칭호는 결코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게임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들이었으니까.
8성이니, 9성이니 하는 괴물 NPC를 뛰어넘는 플레이어는 없었지만, 애초에 그런 NPC들은 거의 보기도 힘들다.
세상에 관여하지도 않고.
반면에 인간 국가들의 주력을 차지하는 강자들은 대부분 5, 6성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유저들은 후반부에는 웬만하면 그 정도 수준들은 되었다.
날 지금 굳이 평가하자면 아마 7성 초입일 거라 생각한다.
물론 모든 힘을 사용할 때만. 그렇다면 저 괴물은 어느 정도일까.
온몸에 걸친 검은 옷 때문에 더 희어 보이는 피부를 가진 여자.
양손에는 기다란 손톱 같은 클로를 끼고서 등에는 피막이 달린 날개를 펼치고 있는 자.
난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마족이 벌써 나오는 건 사기 아니야?”
내 목소리는 작았고, 남들에게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나에게 시선을 돌렸고 이내 씩 웃었다.
악마와 마족이니.
엄밀하게 따지면 복잡하지만, 저들에겐 아주 간단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더럽게 세다.
후웅!
여자는 날개를 한 번 펄럭였고, 그다음 순간에 내 앞에 와 있었다.
그녀가 내 앞에 오는 사이에 나는 3번의 전격을 쏘아 내었고, 그녀는 그걸 다 막은 후 한 번 반격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내 앞에 서서 활짝 웃었다.
“나는 악몽대 대장 플리오레.”
웃으면서도 공격이 날아온다.
나도 그에 지지 많고 손을 놀려 그녀에게 공격을 쏘아 보냈다.
오가는 공방 속에 난 그녀의 힘을 분석했다.
‘공격이 굉장히 빠르다.’
가끔 사각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미리 인지하고 있지 않으면 치명적인 일격이 될 터.
‘그리고 무언가 독 같은 걸 다루고 있어.’
또한, 그녀의 공격이 살짝 스칠 때마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문제는 난 지금 전신에 갑옷을 걸치고 있다는 것.
그녀는 그걸 뚫고서 타격을 줄 만한 미증유의 힘을 가진 것이다.
그 모든 걸 종합해 보자면.
‘6성 초입.’
그녀는 나보다는 확실하게 아래에 있다.
하긴, 일개 대장 중 한 명이 나보다 강하면 그것대로 문제긴 문제다.
이런 여자 대여섯 명만 있어도 난 감당할 수 없을 테니.
게다가 전략가 놈 밑에 있는 수많은 마물들도 무시할 수 없는 말이다.
아주 짧은 순간에 수십 합의 공방이 오갔고, 그녀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략가가 전하라 한 말이 있다.”
콰앙!
그녀는 기운을 강하게 발출하며 잠시 거리를 벌린 후 말했다.
“엠페러. 선물이 마음에 들었나?”
누군가를 흉내 내는 듯한 말투로 말한다.
“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