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난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검성 발렉투스.
에바의 유일한 5성 검사.
사실 난 발렉투스가 전선으로 바로 투입되었다는 걸 들었을 때 살짝 놀랐었다.
5성의 검사라는 것은 그만큼 귀중하며 강대한 전력이다.
에바 왕국은 기껏해야 멜리움 왕국과 엇비슷한 규모의 국가.
그런데도 그 윗줄로 평가를 받았던 이유는 순전히 발렉투스 때문이었다.
‘인간 중에서 5성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 수는 온 대륙을 다 합쳐도 두 자릿수.
그것도 대부분은 거대 국가인 두 제국에 속해 있으니, 왕국에 속해 있는 이들은 더 적을 수밖에 없다.
“생각보다 더 젊군.”
발렉투스는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좀 어려 보이긴 하지.”
나도 스스럼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전히 전장에선 피와 비명이 난무하고, 우리가 있는 곳 또한 그 전장의 한복판이란 걸 생각하면 매우 기묘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기묘한 대치도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난 그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는 걸 보며 창을 꽉 쥐었다.
휘-
바람이 불었다.
전투에 앞서 거창한 말을 하진 않았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으니.
그저 전투는 급작스레 시작되었다.
스아악!
허공에서 불쑥 파공성이 일었고, 난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검성이 명성을 날린 데에는 물론 그의 고절한 검술 실력이 으뜸이었으나.
검술 실력만큼이나 유명한 기술이 있으니 바로 ‘무형 검’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름의 그럴듯함은 둘째치고, 직접 상대하는 처지가 되니 결코 경시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슥!
그는 검을 든 자세 그대로 서 있는데 여지없이 허공에서 검 격이 날아온다.
난 그것을 몇 번이나 피하며 그에게 접근했다.
보통 검과 창의 대결이라 하면 검사가 거리를 좁히려 하고, 창을 든 자는 간격을 유지하려 하는 게 일반적일 텐데.
타닷!
그는 가까이 가려 할 때마다 여지없이 신묘한 보법을 밟아 가며 거리를 벌렸다.
사악!
물론 그럴 때마다 공격이 뒤따르는 건 당연지사.
다행인 건 나 또한 순수하게 창을 휘둘러 싸우는 타입은 아니라는 거였다.
키릭-
이제는 익숙해진 소리가 가슴에서 울려 퍼진다.
근래 마물을 상대할 때도 쓰지 않던 강력한 힘이 치솟아 오른다.
이제는 굳이 기술명을 일일이 외울 필요도 없었다.
파츠츠측-
온몸이 전격에 휩싸였다가 종래에는 전격 그 자체가 된다.
난 한 점으로 빨려들 듯이 발렉투스에게 접근했다.
펑!
공간을 점하며 날아드는 공격.
하지만 그것은 내 몸을 전혀 스치지 못한다.
콰앙-!
반대로 발렉투스 또한 내 공격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까이 접근하자 검을 기묘한 각도로 내려 베었다.
그것의 효능은 바로 드러났다.
스스스스!
앞을 가득 메우고 날아드는 검격. 보이지 않았으나 그것의 흉흉함은 똑똑히 느껴졌다.
난 위로 몸을 피했다가 그대로 그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쾅!
그는 옆으로 몸을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앞과 뒤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난 뒤로는 전격을 뿜어내 공격을 무로 돌리며, 앞의 공격은 몸을 틀어 피해 냈다.
그가 다시 거리를 벌리려는 걸 보고 난 그대로 바닥을 창으로 내려찍었다.
파츠츠츠츠-!
전격이 땅을 타고 흐른다.
일전엔 단순히 전격을 퍼트려 다수의 적에게 타격을 입히고 마비시키는 용도였으나.
콰르르르-!
내 힘이 강대해진 만큼 그 공격의 위력도 달라졌다.
전격이 흐르는 길을 따라 땅이 갈라지고 터져 나간다.
막대한 전력은 단순히 퍼져 나가는 게 아니라 목표를 향해 내달렸다.
자신을 덮치는 막대한 전력과 땅의 파도에 발렉투스도 처음으로 얼굴을 굳혔다.
그는 검을 세로로 들더니 원을 그리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휘이이이-
난 문득 느껴지는 불길함에 저도 모르게 허공으로 훌쩍 몸을 띄웠다.
그리고 곧 그 행동이 옳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파아아악!
순간 밑쪽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그를 향해 뻗치던 내 공격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순히 막아 낸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검성이라는 칭호를 그냥 얻은 건 아닌가 보군.”
난 습관처럼 그에게 비아냥대며 뇌룡섬을 쏘아 보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검을 휘두르며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대에 대한 소문도 그냥 생긴 건 아닌 듯하군.”
“내 소문이라. 하긴 슬슬 유명해질 때가 됐긴 했지.”
딱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워 삼켰다.
발렉투스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적처럼 눈에 띄게 강력한 기운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화려하지도 않고, 파괴적이지도 않다.
그저 그는 검을 베고 찌를 뿐.
그것만으로도 이제껏 상대해 온 어떤 적보다도 강한 압박감을 주었다.
아, 뇌신은 제외하고.
우리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로를 공격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파츠측!
난 전방으로 뇌전의 구체를 쏘아 내며 지그재그로 내달렸다.
뇌전 구체는 얼마 전에 마물을 상대하면서 만들어 낸 기술이다.
딱히 복잡할 건 없지만, 굳이 특징을 뽑자면.
우웅-
그 범위가 굉장히 넓다.
콰아아아아앙-!
뇌전 구체가 발렉투스의 근처에서 폭발하며 사방으로 전격을 뻗쳤다.
난 검을 휘둘러 전격을 걷어 내는 발렉투스의 왼편으로 접근하다가 그대로 몸을 꺾었다.
휘이이익-
내 몸은 그대로 길게 늘어졌다가 순식간에 그의 우측 후방을 점했다.
자세를 잡을 탐도 없이 난 그대로 허리를 꺾으며 창을 뻗었다.
카가가가각-!
처음으로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검을 대어 내 창날을 미끄러트리고는 다시 검을 베어 왔다.
스으-
그와 동시에 내 발쪽에서도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콰각!
난 땅을 디디기 무섭게 옆으로 뛰어오르며 그의 검을 창대로 내리쳤다.
그 반탄력으로 몸이 한 바퀴 회전하며 그의 좌측 전방으로 이동했다.
파측!
창을 건틀렛으로 바뀌며 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굉음과 함께 나와 그는 뒤로 튕겨 나갔다.
공격이 적중하기 직전 그가 검을 휘둘러 나를 밀쳐 낸 것이다.
분명 공격을 하는 걸 보면 극히 평범해 보이는데도, 그 안에 담긴 위력은 경시할 수 없으니.
오히려 상대하기가 더욱 까다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기운 쏟아 내면서 총력전을 펼치는 게 편하지.
상대의 수를 읽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아마 뇌신이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있다면 답답해서 속이 터지려 하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본 실력을 모두 드러내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공수를 교환하며 맞부딪쳤다.
다른 이들의 상황이 궁금하긴 했으나 검성을 상대하는 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직접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그저 주변의 병사들의 사기로 보아 전선의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판단할 뿐.
무엇보다 슬슬 그때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오고 있다.’
창을 휘두르면서 난 감각을 예민하게 벼려 냈다.
검과 창이 부딪치고, 검과 검이 부딪치고, 검과 건틀렛이 부딪친다.
수없이 많은 합을 나누면서도 승패를 가리기는 어려웠다.
두두두두두-
그렇기에 우리가 끝을 내기 전에 그들이 먼저 도착을 했다.
-키아아아아아아아!
불길한 괴성.
땅을 울리는 소리.
그것은 명백히 적이나 우리의 지원군 같은 게 아니었다.
-키아아아악!
드디어 마물들의 군세가 전장에 나타났다.
* * *
평야를 새까맣게 물들이며 다가오는 마물의 군세.
-키아아아아!
마물의 괴성은 듣는 것만으로 사람을 괴롭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으, 으으!”
특히 베아트리스의 병사들은 그 괴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푸욱!
“어디 한눈을 팔아!”
반면에 폴그룬의 병사들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무기를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전장 곳곳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 전황을 파악한 황 윤을 비롯한 베아트리스의 지휘관들은 이대로 싸움을 계속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가려고!”
황 윤은 상대하던 철우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싸우던 채로 마물들의 공격까지 받으면 피해가 막대하리란 건 불 보듯 뻔했다.
우선은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병사들을 물려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다행히 적들도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닌지 병사들을 조금씩 물리며 마물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마물들은 미칠 듯이 달려들다가 양 병력이 천천히 물러나 자리를 잡는 걸 보고는 점점 속도를 늦추었다.
이내 그들은 일정 거리를 둔 채 완전히 멈추어 섰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에 더욱 큰 이질감을 느꼈다.
‘마물들이 저렇게 질서 정연하게 행동한다고?’
바로 인간들을 앞에 두고서도 얌전히 대열을 갖추는 마물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마물들은 대열은커녕 인간을 앞에 두면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게 보통이다.
저 모습은 마물이라기보단 잘 훈련된 병사들을 닮아 있었다.
결국, 세 군세의 묘한 대치가 이루어졌다.
폴그룬 왕국. 바하트리스, 에바 연합. 마물들의 군세.
호진과 검성 또한 마물이 대열을 갖추는 걸 보고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현재 상황은 어떻지?”
호진은 만신창이가 된 크룩과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철우에게 물었다.
“크룩. 제가 한 명, 철우가 한 명을 죽였습니다.”
크룩은 아직 전투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상기된 얼굴로 그리 말했다.
철우도 옆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훌륭하군.”
나는 씩 웃었다.
넷 중 무려 둘이나 죽였으니 아주 큰 이득이다.
‘남은 건 검성과 귀궁인가.’
검성이 살아남은 건 당연한 일이었으나, 귀궁이 살아 있는 건 의외였다.
분명 철우 형이 귀궁과 처음 맞부딪치는 걸 봤기 때문이다.
“어떻게 죽였지?”
나는 그 점을 물었고, 철우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황 윤과 싸우던 중 크룩이 상대를 죽였고.
철우의 근처에는 또 한 명의 4성 검사가 있었다.
막 자유의 몸이 된 크룩은 바로 그에게 달려들었고, 철우는 황 윤과 싸우는 척을 하다가 그대로 그 검사를 합공했다는 것이다.
기습을 받은 그 검사는 허무하게 죽어 버렸고.
4성 둘이 죽었는데 3성은 살아남다니.
역시 전장에서는 약자와 강자가 따로 없다.
그저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일 뿐.
“그나저나 저놈들은 왜 저기서 기분 나쁘게 쳐다보고 있는 겁니까?”
크룩은 철우가 얘기를 끝마친 후 마물들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나야 모르지.”
그에 난 간단히 답했다.
물론 추측을 할 수는 있지만 그래 봤자 남들과 그리 다른 특별한 추측은 아닐 거다.
양측의 군대가 전투를 멈춘 걸 보고 달려드려는 걸 멈춘 거일 수도 있고.
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
우리는 전열을 가다듬으며 둘 중 한 군데라도 다른 반응을 보이길 기다렸다.
-키이이이이!
가장 먼저 변화가 보인 것은 마물들의 군세였다.
군세의 중앙에 있는 마물들이 슬금슬금 옆으로 밀려나더니 그 사이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온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검은색의 로브를 두른 채 우리에게 양손을 활짝 벌려 보이며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