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136화 (136/170)
  • 136화

    전선은 고요했다.

    또한,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고요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병사들은 짙은 두려움을 느꼈다.

    상부에서 모든 정보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어림짐작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무언가가 벌어질 거라고.

    그리고 그런 불안함을 느끼는 건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지휘관들이 모인 막사에서 격렬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쾅!

    탁자를 강하게 내리치는 소리.

    지휘관들이 모여 있는 막사지만, 그 지휘관 사이에도 엄연히 고하는 있는 법.

    당연히 소리를 친 남자는 제법 지위가 높은 자였다.

    “분명히 상대는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는 야만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지위가 높다고 꼭 훌륭한 사람인 건 아니다.

    턱은 살에 파묻혀 있고, 불룩 튀어나온 배는 그가 흥분해서 움직일 때마다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그의 이름은 오스웰.

    백작의 신분을 지닌 남자이자, 바하트리스의 삼대 상단 중 하나인 오스웰 상단의 주인이었다.

    그가 이렇게 큰소리를 내는 데엔 단순히 그가 백작의 직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쟁에는 돈이 든다.

    그것도 막대한 돈이.

    오스웰 백작은 이번 전쟁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고, 그 결과 제법 발언권을 얻은 상태였다.

    “오크와 트롤, 고블린이 주력인 왕국이니 야만인이라는 말은 맞습니다.”

    그런 오스웰에게 차분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른다는 것엔 어폐가 있군요.”

    둥근 인상의 사내.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은 언뜻 보기엔 온화해 보였지만, 그의 정체를 아는 이들은 결코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는 본디 바하트리스를 대표하는 두 전사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귀궁(鬼弓) 황 윤.

    본래 동대륙 출신이라 알려진 그의 가문 ‘황’은 약 150년 전 바하트리스 공국에 자리를 잡은 후, 가문 대대로 신들린 듯한 실력의 궁수를 줄줄이 배출하고 있었다.

    바하트리스 공국이 궁병으로 유명한 것은 황 가문의 영향 또한 적지 않았다.

    귀궁 황 윤은 그런 가문의 역사 속에서도 기재로 평가받는 이였는데, 주력 무기가 활이 아니었다면 이미 4성을 달성했을 거란 얘기가 나오곤 했다.

    황 윤은 느릿한 어조로 ‘폴그룬’에 대해 계속 말했다.

    “그들은 고작 두 달 만에 멜리움 왕국을 무너트렸습니다. 멜리움이 비록 내분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곤 하나…….”

    그는 슬쩍 테이블 한편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가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듣고 있는 걸 확인한 그는 다시 오스웰을 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그 저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지요.”

    황 윤의 말을 들은 오스웰은 그 두툼한 턱을 부들부들 떨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어째서 놈들이 성을 몇 개나 함락할 동안 가만히 있었습니까?”

    이번에는 그 전에 오스웰이 고함을 질렀을 때보다 분위기가 더 싸늘해졌다.

    오스웰을 진정시키려던 황 윤조차 그의 말에 질릴 정도였다.

    ‘오스웰이 이 정도로까지 무너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스웰을 바하트리스의 삼대 상단 중 하나라 하지만, 사실 전 가주 때까지만 삼대 상단이라는 건 없었다.

    원래는 오스웰 상단이 바하트리스의 상권을 모두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의의 사고로 전대 가주가 급사하지만 않았다면…….’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지만, 황 윤이 보기에는 저놈이 가주로 있는 한, 당장 이번 대를 넘기기도 힘들어 보였다.

    “오스웰 백작.”

    결국,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다른 이가 입을 열어야 했다.

    “그대가 이곳 국경의 방어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단 걸 모르는 사람은 없소.”

    그 진중한 목소리에 오스웰도 이번엔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입을 연 남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오스웰을 보았다.

    “이제 와 그대를 책할 생각은 없소. 이곳은 과와 오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앞으로의 일을 논하는 자리이니 그만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어떻겠소?”

    “아, 알겠습니다.”

    오스웰은 결국 파리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성이 드높은 황 윤도 쉬이 하지 못한 말을 직설적으로 내뱉은 이는 바하트리스의 사람이 아니었다.

    검성 발렉투스.

    에바 왕국을 넘어서 온 대륙에 이름을 떨친 검사.

    “모두 아는 대로 폴그룬의 전력은 절대 약하지 않소.”

    검성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기습적인 공격이라곤 하나 성 네 개를 함락당한 건 단순히 방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알려진 건 우선 셋. 대사제 크룩, 철우, 그리고… 폴그룬의 왕.”

    이렌은 뒤늦게 전장에 도착했기에, 이들이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건 그 셋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한 부대가 더 합류했소. 이름이 알려진 자 중에 또 합류한 이가 있을 수도 있지.”

    폴그룬의 간부들에 대한 정보가 온 대륙에 널리 퍼진 건 아니지만, 바로 옆 나라인 바하트리스에는 제법 유명했다.

    특히 이번에 선봉에 서 바하트리스를 침공한 셋은 특히 유명한 이들이었다.

    “기실 그들 누구 하나 만만히 볼 수 없는 이들이오.”

    발렉투스가 이 전장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한 것도 적들의 전력을 파악하는 이들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과 직접 부대를 지휘했던 오스웰의 말을 토대로 적의 전력을 파악했다.

    “거대화 능력을 갖춘 오크, 기이한 능력을 지닌 마법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이라는 자는.”

    발렉투스는 호진이 직접 힘을 사용했던 장소를 살폈었다.

    까맣게 타 버린 초원. 깊게 파인 구덩이들.

    벼락의 힘을 다루는 자.

    “나조차도 그 끝을 쉬이 파악할 수 없을 정도더군.”

    그는 단순히 전투의 흔적을 봤을 뿐인데도 상대방의 가공할 만한 힘을 고스란히 느꼈다.

    “왕국에서 추가 병력이 출발했다지만, 도착하는 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소.”

    에바 왕국에서는 부랴부랴 검성 발렉투스를 보냈다.

    그리고 뒤이어 병력을 파견했는데, 그들이 이곳까지 도달하는 데엔 자연히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발렉투스는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우리는…….”

    콰앙!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별안간 바깥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파악!

    검성을 비롯한 몇 명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막사 밖으로 달려 나갔다.

    콰앙! 쾅! 쾅!

    막사 밖으로 나온 후에야 발렉투스는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었다.

    콰르르르르릉!

    맑은 하늘에서 난데없이 울려 퍼지는 우렛소리.

    그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새로운 빛줄기가 지면을 강타했다.

    발렉투스는 바로 입을 열어 크게 소리 질렀다.

    “적- 습- 이- 다-!”

    호진이 기습적으로 적의 본진을 공격해 온 것이다.

    * * *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벼락 줄기. 그 모습은 일견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크루룩.”

    크룩과 철우는 납작 엎드린 채 적의 본진을 살폈다.

    이번 기습 작전에서 병력의 지휘권은 이렌을 비롯해 몇몇 사제들에게 넘겨졌다.

    호진과 크룩, 그리고 철우는 선제 타격을 위해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꽈르르릉-!

    정확히 말하면 호진이 적 본진에 벼락을 내리쳐 혼란을 만들어 내면 크룩과 철우가 합세하기로 했다.

    “슬슬 움직여야겠지?”

    “그럴 것 같습니다.”

    적의 본진은 이미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 듯 보였다.

    특히 아까 전 제법 강해 보이는 인간들이 막사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와 벌게진 눈으로 호진을 찾고 있었다.

    호진은 원거리 타격을 좀 더 하다가, 크룩과 철우가 본진에 깊숙이 침투한 후에 돌입할 것이다.

    “그럼 먼저 간다. 크룩.”

    크룩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달려 나갔다.

    혼란에 휩싸여 있다 하나 수많은 병력을 향해 홀로 돌진하는 오크의 등은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크으아아아아!”

    -아아아아아!

    하지만 그 오크의 몸이 순식간에 거대해지며 적 본진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런 걱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콰앙!

    그야말로 양 떼를 헤집는 늑대와 다를 바 없는 모습.

    크룩이 팔이나 다리를 휘저을 때마다 최소 열은 넘는 병사들이 허공을 날고 땅에 처박혔다.

    철우 또한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eoq… ro… be…….”

    크룩이 달려 나간 순간부터 철우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막 크룩이 전장을 휩쓸 땐 그 주문을 완성했다.

    그 주문을 가장 먼저 알아챈 건 적의 병사 중 한 명이었다.

    “히, 히익……!”

    하늘을 보며 가느다란 비명을 내지르는 병사.

    크룩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병사들의 머리 위로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철구가 둥둥 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철우의 뜻에 따라 바닥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퍼버버버벅!

    그것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실로 파괴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무겁고 단단한 구슬은 떨어져 내릴 때마다 병사들의 팔이나 다리, 머리통을 말 그대로 짓이겨 버렸다.

    적의 본진은 말 그대로 아무런 반항도 못 하고 유린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적들의 지휘관도 가만히 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피잉-!

    철우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반사적으로 머리를 옆으로 꺾었다.

    그의 옆으로 아슬하게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철우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핑! 핑! 핑!

    그러나 궁수를 확인하기도 전에 연달아 화살이 날아왔다.

    철우는 어떤 것은 피하고, 어떤 것은 막아 내며 달렸다.

    쿠웅!

    그는 이따금 인벤토리에서 거대한 나무 기둥 같은 걸 꺼내 들기도 했다.

    파바박!

    그럴 때마다 수 대의 화살이 날아 들어와 박혔으니, 철우나 궁수나 호락호락한 솜씨가 아니었다.

    철우는 화살을 막으면서도 끈질기게 상대방에게 다가갔다.

    결국, 둘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귀궁.’

    철우는 고요한 눈을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귀궁 황 윤.

    철우도 모험가로 활동할 적 몇 번이나 이름을 들어본 남자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수법은.

    휘이-

    화살을 원격에서 조종하는 것이었다.

    철우는 반사적으로 몸 주위로 방패 여러 개를 소환해 냈다.

    파바바바바박!

    그 직후 귀신같이 화살이 수 방위를 점하며 날아들었다.

    앞, 뒤, 옆 모든 방향에서 날아온 화살의 출처는 명확했다.

    바로 전에 쏘았던 화살들인 것이다.

    “제법 재밌겠는걸.”

    철우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웃었다. 그는 무기 여러 개를 꺼내 들며 귀궁에게로 달려갔다.

    -크라아아아아!

    정신없이 적진을 헤집던 크룩에게도 누군가가 달려들었다.

    “흐아아압!”

    크룩은 근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웬 회색빛의 피부를 한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바로 ‘경화’ 능력과 ‘괴력’ 능력을 사용하는 남자였다.

    그는 크룩을 향해 달려들었고, 크룩 또한 그를 기꺼이 맞이했다.

    겁에 질려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병사들도 슬슬 자신들의 지휘관을 도와 적들을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와아아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앞에서 폴그룬의 지원군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전신에 초록빛의 기운을 띤 채로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이렌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평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 모든 혼란속에서.

    “자네가 폴그룬의 왕인가.”

    “그렇다면?”

    검성과 호진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