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왕국의 전령은 오래 걸리지 않아 폴그룬의 도착했다.
폴그룬 왕국의 수도.
그곳에 도착한 전령은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긴장한 기색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파리하게 질린 안색과 잘게 떨리는 손까지.
고르고 고른 전령인 그가 감정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하고 있는 건 전적으로 그의 앞에 서 있는 오크 때문이었다.
“크루룩.”
떡 벌어진 어깨.
흉악한 눈매. 툭 튀어나와 있는 어금니.
덩치는 어찌나 큰지 오크가 아니라 오우거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래서 항복 아니면 전쟁이다. 그 말인가?”
전령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속으로 되뇌었다.
자신은 전령이다. 아무리 흉악한 오크라 할지라도 자신을 해치진 않을 것이다, 라고.
“그, 그렇소. 자애로우신 우리의 국왕 전하께서는 항복할 기회를 드린다고 하였소.”
“그렇군.”
크룩은 전령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령은 그래도 생각보다 온건한 크룩의 반응에 안도했다. 하지만 크룩은 이어서 말을 했다.
“그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무엇이오?”
크룩은 씩 웃었다.
“그대는 충성심이 깊은가?”
“무슨 당연한 질문을. 저로 말하자면…….”
전령은 자신의 충성심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크룩은 그의 말을 툭 끊었다.
“아니, 그것까지는 관심 없고.”
별안간 크룩의 오른팔이 환하게 빛났다.
“국왕을 위해 죽어 줄 만큼 충성심이 깊은가. 그게 궁금해서 말이야.”
“예, 예?”
전령이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크룩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령이 그가 몸을 일으켰다는 걸 인식했을 때쯤엔 이미 크룩은 전령의 바로 앞에 당도해 있었다.
“크룩. 대답해 보게.”
전령은 바로 앞에서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크룩을 보았다.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던 허장성세는 순식간에 깨져 나갔다.
단순히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고, 얼굴 옆으로 스치는 숨소리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 그, 그…….”
그런 바, 전령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크룩은 굳이 전령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허리를 살짝 뒤로 젖혔다가 맹렬한 속도로 오른 주먹을 휘둘렀다.
파앙-!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전령은 잠시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크룩은 차가운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전령을 보았다.
“한심한 놈이군.”
전령은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크룩이 주먹을 휘두른 것에 지레 놀라 기절한 것이다.
그는 쯧쯧 혀를 차고선 크게 소리쳐 밖의 시종을 불렀다.
“여봐라! 들어와서 이놈을 치워라.”
곧 시종들이 들어와 쓰러진 사내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죽이진 않았군요.”
그리고 누군가가 나가고 있는 시종들과 교차하며 들어왔다.
“크루룩. 죽이고 살리는 것은 호진 님이 정하실 거다.”
“그렇군요.”
백발의 사내. 철우는 방 한쪽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 호진 님에게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크룩 대사제께서 전령과 얘기하는 동안요.”
“그런가? 무슨 얘기를 하셨지?”
“바로 출진을 하라더군요.”
크룩은 그 말에 눈을 번뜩였다.
이번 전쟁이 끝난 이후로 지루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특히 크룩은 그게 더 심했다.
“정말인가?”
“예. 놈들이 제대로 방비를 하기 전에 선공할 거라더군요. 호진 님은 이미 출발하셨답니다.”
그전까지는 호진이 모든 전투에 참여했지만, 지금은 휘하의 간부들이 모두 각각 한 군단씩을 맡은 상태.
그리하여 호진은 어느 한곳에 속하는 것보다 개별적인 전투 활동을 주로 하게 되었다.
“빨리 가야겠군. 크루룩.”
크룩은 철우의 말에 다급한 말투로 말했다.
“늦으면 할 게 없을지도 몰라.”
철우는 크룩의 반응에 픽 웃었다.
그의 말마따나 호진의 무력은 일인 군단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다.
지금 당장 출발하더라도 그사이에 성 하나쯤은 이미 함락되어 있을 거다.
“그러죠.”
* * *
폴그룬의 약 절반 정도의 병력이 바하트리스와 접한 국경으로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건 이렌의 부대였다. 그리고 그녀가 도착했을 때쯤 호진은 이미 혼자서 두 개의 성을 점령한 후였다.
그 외에도 크룩의 부대가 하나, 철우의 부대가 하나를 점령해 총 네 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바하트리스 공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급해졌다.
폴그룬에서 먼저 공격해 오리란 걸 아예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 속도가 매우 빨랐거니와 강력하기까지 했다.
일반적인 국가에선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긴밀하며 파괴적인 진격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네 번째 성은 거의 동시에 함락당하기까지 했으니.
바하트리스 공국과 그 연합인 에바 왕국에서는 급히 자기네 나라의 강자들을 국경으로 보내었다.
“그놈들이 얼마나 강하길래 기다리는 거지? 크룩.”
폴그룬의 병력 절반이 모여 있는 평야. 그중에서도 지휘관 막사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법 강하겠죠. 멜리움을 칠 때처럼 호락호락하진 않을 겁니다.”
철우는 크룩의 불만을 점잖게 받아넘겼다.
“그렇게 판단하셨기에 호진 님도 이리 대기 명령을 내리신 거겠죠.”
“끄응.”
호진의 이름을 거론하자 크룩도 더 불만을 터트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크룩 님과 철우 님은 전투라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오자마자 이러고 있는데요.”
그다음에 끼어들어 말한 것은 이렌이었다.
그녀의 부대는 도착하자마자 무한정 대기에 들어갔다.
크룩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호전적인 이렌으로서는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호진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과 별개로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셋은 아쉬운 대로 현재 전장의 상황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트렌과 화린은 여전히 다른 곳에 있었고, 케륵은 왕국의 방어를 위해 출진하지 않았다.
이번엔 이 셋이 각각 군단 하나씩을 맡아 지휘한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길 한참.
“다 모여 있군.”
호진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셋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호진은 손을 내저으며 막사의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확인한 결과 놈들은 네 명을 먼저 파견한 듯해. 나머지는 아마 군대를 끌고 오고 있겠지.”
호진은 자신이 직접 본 정보를 말했다.
바하트리스에서 셋. 에바 왕국에서 하나.
에바 왕국은 바하트리스 너머에 있는 만큼 오는 데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러니 우선 상대해야 할 건 네 명의 강자.
“저번에 상대했던 팔치온과 동급이 하나. 그보다 못한 놈이 둘. 마지막으로 그보다 강한 놈이 한 명이다.”
바하트리스엔 본래 네 번 승급을 한, 즉 4성급의 강자는 없었다.
고작해야 3성이 두 명.
그런데 본래 멜리움 소속인 귀족 한 명이 바하트리스에 투신을 해 셋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에바 왕국에선 최강자라 일컬어지는 검성 발렉투스를 보냈다.
무려 5성의 강자.
예전의 호진이었다면 전력을 다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한 자였다.
상대의 전력은 제법, 아니 객관적으로 강력한 편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우려를 표하는 이는 없었다.
“딱이군요. 크룩.”
오히려 크룩은 씩 웃기까지 했다.
“제가 두 번째로 강한 놈을 맡겠습니다. 다른 둘은 여기 두 명이 맡으면 될 테고요.”
그는 가슴을 쫙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뭐, 적어도 아쉽지는 않겠네요.”
철우도 여유로운 태도로 웃었다.
이렌도 그저 담담한 표정이었고.
“다들 싸우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모양이네.”
호진은 그들의 반응에 똑같이 씩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뭐, 그런데 그 넷뿐이면 일부러 진군을 멈추지는 않았을 거야. 문제가 하나 더 있어.”
그는 턱을 한번 쓰다듬고선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마물들이 무리 지어 이쪽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더군. 절묘하게 딱 바하트리스와 우리 중간쯤으로 말이야.”
“마물이 말입니까?”
철우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래. 오는 길에 있는 다른 왕국의 군대들을 우회해서 진격하고 있다던데.”
그것참 이상한 일이었다.
마물의 본대는 아직 서부전선의 근방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
마물들이 조직적인 행동을 보이며 움직인다는 건 누군가가 지휘를 하고 있다는 뜻인데.
‘굳이?’
제국 정도나 치러 간다면 모를까.
폴그룬도, 바하트리스도 대륙 전체로 두고 보면 그리 중요한 위치나 국가는 아니었다.
굳이 군세를 따로 떼어서 공격할 정도는 아니란 거다.
호진은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전투 중에 놈들이 끼어든다면 꽤 골치 아플 거다. 그래서 바하트리스랑 에바 놈들도 가만히 있는 거고.”
만약 마물들이 아니었다면 호진네가 가만히 있었어도 상대편에서 공격을 해 왔을 거다.
그렇다고 전쟁을 하는 와중에 사이좋게 마물을 칠 수는 없으니 서로 눈치를 보고 있다.
“그러면 마물이 들이닥칠 때까지 계속 기다리는 겁니까?”
“아니.”
물론 그렇다고 놈들이 쳐들어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다른 걸 떠나서 마물을 지휘하는 놈이 있는 이상 놈들은 계속 안 쳐들어오면서 간만 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대기 기간이 늘어날수록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기에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마물이 오자마자 바하트리스를 친다.”
“예?”
호진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 크룩을 보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마물을 상대하는 건 우리가 더 유리하더라고. 다른 걸 떠나서 병사들의 질에서 앞서니까.”
수가 네 명 대 네 명으로 딱 맞으니 중간에 마물이 끼어든다면 곤란을 겪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호진네 병력들은 그 하나하나가 정예 병력이다.
마물이나 거대 괴수를 사냥한 경험도 꽤 있고, 중간에 마물이 습격해 오더라도 어느 정도는 버틸 것이다.
반대로 상대편은 평범한 인간으로 이루어진 군대.
그 수가 폴그룬보다 명백히 많긴 하지만, 마물에 대응하는 능력 자체는 부족할 것이다.
“아마도 바하트리스 놈들은 우리가 쳐들어오지 않을 거로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 틈을 노리는 거지.”
급하게 행동할 필요까진 없지만, 그렇다고 여유를 부릴 이유도 없었다.
이번에 바하트리스, 에바 연합의 일선을 무너트려도 뒤에는 추가 병력이 버티고 있으니까.
폴그룬이 취할 전략은 연합이 제대로 대응하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밀고 나가는 것.
정체된 시간이 길면 그대로 잡아먹힐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우선 각 사제에게는 밥을 짓고 휴식을 취하라고 해.”
상대방도 이곳을 정찰할 터.
당장은 전투를 할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다.
“마물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호진은 테이블 위로 펼쳐진 지도를 슥 보고서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곳은 제스트 대평야라는 지명이 적혀 있었다.
“놈들의 본진을 친다.”
바로 바하트리스, 에바 연합의 본진이 위치한 곳이었다.
호진은 단 한 번의 전투로 놈들의 일선을 무너트리고 다시 진격할 생각이었다.
마물들은 그저 이번 전투의 들러리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