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아, 살겠다.”
난 뒤로 푹 몸을 뉘었다.
보드랍고 긴 털이 뒷덜미를 간질인다.
-고생하셨습니다.
“맞아, 고생 좀 했지.”
난 펜릴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진짜 고생도 생고생이 따로 없었다.
특히 마지막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계속 싸우기만 했으니.
손만 뻗어 인벤토리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후우.”
날 마중 나왔던 이들은 따로 늑대를 타고 따라오고 있다.
이 넓은 등 위에는 오직 나뿐.
두 달이나 자리를 비웠지만, 보고를 듣는 것도 미뤄 놓고 가만히 누워 하늘을 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난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햇살이 새어 든다.
평화롭다.
난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파직.
꽉 쥔 주먹 사이에서 전격이 튀어나온다.
난 다시 손을 펼쳤다.
평화로웠던 햇살은 지금에 와선 푸른 전격 아래 왜곡되어 흩어진다.
나는 멍하니 손을 보다가 아예 흩어 버렸다.
딱 오늘까지만.
오늘까지만 평화를 즐기자.
* * *
나는 바로 폴그룬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던전에 들어간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넓은 영토. 새롭게 복속된 수많은 백성.
무엇보다 놀란 점은 간부들이 내 생각보다 훨씬 일을 잘해 주었다는 것이다.
“훌륭하군.”
나는 여섯 번째로 점령했다는 도시를 둘러보며 말했다.
“크룩. 감사합니다.”
“음, 아냐, 정말 훌륭해. 이 정도 규모를 그냥 집어삼키다니.”
난 콧김을 훅 내뿜는 크룩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듣기로는 크룩이 거대화 능력으로 마법사들을 일거에 쓸어버린 탓에, 교전하지도 않고 전투가 끝났다고 한다.
이번 두 달간 커진 규모는 그 전까지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그럼 나는 다른 곳으로 가 볼게. 일주일 후에 보자고.”
“알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크룩을 뒤로 하고 나는 앞으로 걸어갔다.
간부들은 모두 도시 하나하나에 자리를 잡고 있다. 외부에서 돌아다니는 트렌과 화린을 제외하고는.
나는 성벽을 좀 걷다가 바깥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휘이-
날카로운 바람이 내 몸을 감싼다.
난 눈을 감았다가 허공을 걷어찼다.
투웅-
푸른색으로 변한 몸이 쏘아져 나갔다. 난 그저 몇 번씩 방향 전환을 할 뿐.
딱히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비행.
그러나 그 속도만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다.
자동차로 달리다가 비행기를 탄 느낌이랄까.
이젠 뇌룡 질주라는 이름도 안 어울리겠는걸.
그곳에서 나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텅-
난 습관적으로 갑옷을 두드려 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곳에서의 마지막 순간. 그 이후로 뇌신은 전혀 반응이 없다.
정말로 영영 사라져 버린 걸까.
그는 내 어떤 모습을 보고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
잘 모르겠다.
한참을 이동하다가 중간에 땅에 내려섰다.
이 정도 거리로는 휴식도 필요 없었지만, 그냥 쉬었다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난 적당히 그늘이 진 나무 아래로 걸어가 인벤토리에서 먹을 걸 꺼냈다.
대충 불을 지펴 음식을 따뜻하게 데운 후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우.”
음식을 깔끔하게 비운 후 그릇을 인벤토리로 회수했다.
난 고개를 들어 해의 위치를 가늠한 후 생각했다.
‘슬슬 가야겠네.’
오늘의 도시 순회 일정은 모두 끝났다.
왕국의 변화에 대해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지금 중한 건 따로 있으니까.
난 팔다리를 쭉쭉 풀고서 창을 꺼내 들었다.
신전에서 나온 이후 변한 걸 꼽자면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변화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하나 있다.
피잉-
난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황금색으로 물든 눈동자. 그리고 그 위로 푸른색의 기운이 한 겹 더 씌워졌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자체 미니맵?
그것도 특정한 표적의 위치를 보여 주는 기능에 특화되어 있다.
이번엔…….
동쪽으로 쭉 가면 되겠네.
“후읍.”
난 숨을 크게 들이쉬며 온몸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파츠츠츠츠-
발끝에서부터 온몸이 푸른 전기로 화한다.
단순히 전격을 끌어올리거나 하는 수준이 아니다. 말 그대로 내 몸의 성질이 바뀌는 것.
나는 동쪽을 보았다.
파츳-!
그곳으로 이동한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몸이 한 점을 향해 빨려들어 간다.
음.
내가 쓰는 힘이지만, 역시 점점 인간과 거리가 멀어져 가는 느낌이 든다.
정말로…….
휘이이이이이-!
맞불어오는 바람을 꿰뚫고 나아가 계속해서 나아간다.
순식간에 멜리움 왕국의 국경을 넘고, 다른 나라와의 사이에 있는 황무지에 도착했다.
신전에서 나온 후 이 일을 몇 번 하면서 느낀 건데 놈들은 우선 이런 한적한 곳에 나타난다.
다른 이유보다는 아마 텔레포트 자체의 특성 때문일 거다.
일반적으로 도착하는 위치 근처에 무언가가 있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고.
저 정도의 덩치면 주변에 건물이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할 테니.
쿠오오오-
그래, 저 정도의 덩치.
황야에는 거대한 덩치의 마물이 서 있었다.
거대한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돌아본다.
예전이라면 대륙 중앙까지 저런 마물이 돌아다니는 일은 거의 없었을 거다.
하지만 서부전선이 함락된 이후로는 그 출현이 잦아졌다고 한다.
막혀 있던 댐이 터져나가 그 강물이 온 대륙으로 넘쳐 흐른 것이다.
“그래.”
난 창을 일직선으로 뻗으며 놈을 마주했다.
“한번 덤벼 봐.”
내 목적은 두 가지.
이제는 대부분이 내 영토가 된 멜리움 왕국 내부로 마물이 오는 걸 막는 것.
두 번째는 슬슬 다양한 마물을 상대로 전투 경험을 쌓는 것.
쿠오오!
쿵! 쿠웅!
난 천천히 다가오는 마물을 창으로 가리켰다.
콰릉-!
창끝이 마물의 머리를 가리킨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크오-?
콰르르르르릉!
녀석이 의문을 느끼며 멈칫하기도 잠시, 그 위로 무수한 벼락 줄기가 쏟아졌다.
크오오오-!
마물의 몸이 시시각각 녹아내렸다.
“터프하네.”
놀라운 건 녀석은 그 상태로도 나에게 몸을 던져 왔다는 거다.
후우우우웅-!
저만한 덩치면 단순히 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꽤 위협적이다.
무엇보다 놈들은 생각만큼 느리지도 않다.
콰아앙-!
녀석의 팔과 다리가 나를 노리고 내리쳐 온다.
그에 대한 내 해답은 간단하다.
후욱-!
피하고.
콰앙!
내리찍는다. 혹은 그저 창을 한 번 휘둘러 벼락을 내리친다.
아주 간단한 행동 원리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반응을 끌어내는 것.
복잡한 기술 같은 건 필요 없다.
“무식하게 힘만 세면 뭐 하냐.”
솔직히 이런 놈보다는 같은 등급이라도 칼날 마귀 같은 게 더 상대하기 힘들다.
뭐, 도시에 접근한다면 이렇게 커다란 놈이 더 큰 피해를 내겠지만.
‘빨리 끝내야지.’
오늘 상대할 놈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 * *
멜리움 왕국과 바하트리스 공국, 그리고 그 주변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제를 꼽자면 단연 ‘폴그룬’ 왕국이다.
나름 서부전선과 거리가 있는 이 일대에는 마물들보다 바로 근처에 나타난 다종족 국가가 신경 쓰였으니.
반면에 서부전선 인근의 나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휘이이-
서부전선의 바로 앞에 있던 나라.
무수한 기사들을 배출해 기사의 나라라고 불리기까지 했던 이곳엔 생자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두두두두-
그 빈자리를 메운 건 압도적인 물량의 검은 물결.
바로 마물의 군세였다.
이들은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빠져나갈 수 없게 왕국 전체를 틀어막고 있었다.
“완벽하게 차단했습니까?”
“예.”
말총머리의 사내 앞에 한 남자가 부복해 있다.
“적어도 사흘간은 소식이 새어 나가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교단 놈들이 냄새를 맡아선 안 돼요. 알겠습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예, 가 보세요.”
남자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이고서 어딘가로 떠나갔다.
마법사 계열 랭킹 3위. 네크로맨시 마스터.
스타팅 지점이 제국이었던 전략가가 초창기에 영입했던 인재 중 한 명이었다.
바로 마물의 군세를 몰아 진군할 수 있엇던 전략가가 이곳에 멈춰 선 이유도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전략가는 그가 떠나는 걸 보고 의자에 다시 앉았다.
‘누구는 양보다 질이라지만.’
그는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압도적인 물량 앞에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본래 전 게임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게임의 자유도가 높다 하나 게임 내에서 구현할 수 있는 물량엔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전략가는 웃음과 함께 앞을 보았다. 당장 그의 손짓 하나에 수백, 수천의 마물이 움직인다.
그것뿐이랴?
대륙 전역에 흩어져 있는 마물들. 괴수들.
그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생각이다.
‘그걸 실험하기에 최적의 장소지.’
전략가는 천천히 손을 그러쥐었다.
‘이번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는 머릿속으로 게임 속 랭커들을 떠올려 봤다.
엠페러, 염화 법사, 검성, 대적자, 엘리멘탈마스터 등등.
유치하지만, 그 당시엔 모든 유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이들.
이런 세상에 온 이상 더는 유치하다고 할 수 없는 이름들.
‘재밌겠어.’
그에게 있어서 이곳을 게임으로 친다면 이제 막 길고 지루한 튜토리얼이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
서부전선을 함락하고.
드디어 다른 유저들과 본격적으로 부딪칠 때가 왔다.
그 과정에서 죽는 사람들 같은 것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본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전략가는 주변의 광경을 한 번 더 눈에 담은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았다.
* * *
거대한 새의 둥지.
그곳에는 집채만 한 크기의 새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질적인 것은 그 새가 품고 있는 것이었다.
“으음.”
새의 깃털에 몸을 비비적거리는 작은 몸.
바로 인간 소녀였다.
삐이- 삐-
언뜻 보기엔 평화로워 보이던 둥지는 허공에서 울리는 소리로 인해 소란스러워졌다.
펄럭-!
눈을 감고 있던 새가 바로 날개를 펄럭이며 몸을 일으킨 것이다.
“꺅!”
눈 감고 있던 소녀 또한 깜짝 놀라며 일어나야 했다.
“왜? 무슨 일이야?”
그녀는 눈을 끔뻑이며 심각한 기색의 새를 올려다봤다.
새는 말없이 날개를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침입자?”
소녀는 눈을 찌푸리며 그 방향을 보더니 곧 눈을 크게 떴다.
“사람이잖아?”
결코 인간의 시력으로는 볼 수 없는 거리이건만, 새는 물론 소녀조차도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 듯했다.
“한번 가 보자!”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새에게 말했다.
새는 날개를 펄럭이며 소녀에게 무어라 말했다.
“위험하다고? 에이, 넌 어차피 말도 안 통하잖아. 그리고 뭐 하러 온 건지도 모르는데 공격부터 하려고 하면 어떡해?”
그녀는 훈계하는 듯한 어조로 팔짱을 끼며 새를 다그쳤다.
새와 소녀는 한참을 옥신각신하다가 곧 새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래! 나도 위험할 거 같으면 알아서 조심할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소녀는 쫑알쫑알 말하며 새의 몸 위로 올라탔다.
곧 새는 양 날개를 펄럭이며 깎아지를 듯이 높게 솟아 있는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화아아아악-!
거대한 양 날개가 쫙 펴지며 둘은 빠르게 아래로 날아갔다.
그리고 곧 저 멀리 있던 이들의 신형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빨간 머리의 인간 여자.
그리고 트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