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난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웅웅-
안에서부터 울려 오는 무언가.
뇌령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혹사당할 대로 혹사당한 채 잠잠해져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힘은 무엇일까.
짚이는 게 없진 않다.
“넌 겨우 그들의 일부분을 보았을 뿐이다. 제물이라고 하니 양심에 찔리기라도 하나?”
뇌신이 나를 향해 신랄하게 비판해 왔다.
“그렇게 치면 이제까지 네 손에 죽은 이들은? 그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이들이었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것은…….”
“위선 부리지 마라.”
그의 차가운 시선이 나를 날카롭게 난도질했다.
“넌 그냥 두려운 것뿐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걸.”
두려움?
정말 그것 때문이었나?
가슴팍에 빨려 들어왔던 푸른 연기. 이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제물로써 바쳐진 사람들은 정작 그것을 받아들일 자가 없어 몇백 년을 이 신전 안에서 배회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날 그들은 해방됐고, 동시에 내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슬슬 눈을 떠라.”
카앙!
뇌신이 창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너는 나를 이을 그릇이다.”
뇌신을 잇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신’이 되는 것.
그것은 한낱 인간으로서 영광이었으며, 환희를 느껴 마땅한 일이다.
물론 신의 그릇이 되는 것과 신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가능성을 얻는 것뿐.
0%이던 확률이 낮아도 4%, 5% 정도로는 올라간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정말 신이 된다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이곳에 영원히 남아 있어야 하는 건가?
“너와 너의 것들을 지키고 싶다면 망설이지 마라. 잃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뇌신은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 보듯 내게 말했다.
“그래도 싫다면 지금이라도 다른 이를 찾아보지.”
그는 약간 실망스럽다는 말투였다.
난 한 손에 들린 창을 꽉 쥐었다.
뇌신은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내가 든 것과 똑같은 모양의 창을 쥐고서.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그가 내게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머리가 새하얘졌다.
‘난 게임을 클리어할 거다.’
집으로 돌아갈 거다.
‘이 빌어먹을 게임을 끝낼 거다.’
아직 적은 많고, ‘어둠’이라는 존재를 생각하면 난 태양 앞의 반딧불이일 뿐이다.
-흐으으.
다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는 ‘수확자’를 죽여 영혼을 해방시킨 이후로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머리는 돌을 얹은 듯 무거웠고, 온몸에는 오한이 돋았다.
수백의 영혼이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그래, 뇌신의 말대로 난 겁을 먹은 것 같다.
까득-
이를 꽉 물고서 앞을 보았다.
어느새 뇌신은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내게 자신이 힘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기실 난 그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알게 되었다.
신은 믿음을 먹고 산다.
하지만 그들의 힘을 강하게 하는 게 하나 더 있으니.
바로 그것은 영혼이다.
쿠웅-!
가슴팍에서 강렬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온다.
순식간에 전신에 낫던 상처가 아물고 힘이 차오른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힘을 쓸 수 있는 것도 저 뇌신이 손을 써놓은 거겠지.
쿠우우웅-!
지쳐 잠들었던 뇌령이 다시 깨어난다. 그 전보다 훨씬 강렬하게 기운을 내뿜는다.
“훌륭하구나.”
뇌신은 그런 나를 흡족한 듯 바라보았다.
그는 창을 내게 뻗으며 활짝 웃었다.
“그럼 한번 다시 놀아 보자, 제자야.”
* * *
두 달.
멜리움 왕국이라는 이름은 지도에서 지워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왕국 ‘폴그룬.’
공작이 자신을 왕이라 칭하며 새로 세운 ‘레모트’ 왕국.
마지막으로 변경백은 베아트리스 공국으로 흡수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영토를 할양받아 영토가 더 커진 것은 덤이었다.
결국, 폴그룬은 당당하게 자리를 잡는 것에 성공했다.
온 대륙에 오크, 고블린, 인간, 트롤 등등. 갖가지 종족이 섞인 나라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만약 평상시라면 다른 왕국이나 제국, 혹은 교단에서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인간 우월주의자들이 아주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들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바로 온 대륙을 뒤흔든 사건 때문이었다.
‘서부전선의 궤멸.’
새로운 왕국의 출현과는 비교도 안되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몇백 년 전,
당시에는 대륙엔 오직 한 제국만이 있었다.
그 제국의 황제는 온 대륙에 범람하는 마물들에 골치 아파했고, 말년에 이르러선 그것을 해결하려 골몰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계획이 바로 마물들을 한곳에 몰아넣어 가둬 두는 것.
수십 개의 나라로 쪼개진 지금과 달리 오직 한 명의 황제만이 있던 당시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황제는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마물들을 토벌하고, 서부지대 쪽으로 유인했다.
그것 때문에 본래 서부지대에 살고 있던 오크들은 강제로 본 대륙으로 이주를 하기까지 했었다.
그 계획은 큰 병력 손실이 있긴 했지만, 결국 성공했다고 한다.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모든 나라는 그 서부전선만은 합심하여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서부전선이 겨우 한 달 사이에 궤멸해 버린 것이다.
‘마물들이 온 대륙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거대한 혼란이 들이닥치리라는 건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 * *
“형! 오랜만이야.”
“어, 요새 얼굴 보기 힘들다?”
제크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맞은편에 앉은 소년을 보았다.
페일이 까무잡잡해진 얼굴로 씩 웃었다.
“알잖아. 요새 바쁜 거. 이번엔 베르닐 대수림까지 갔다 왔어.”
“너도 참. 그런 곳에 가는데 겁나지도 않냐?”
“여기 든든한 보디가드가 있는데 무슨 상관이야?”
페일이 웃으며 옆을 가리켰다.
제크는 복잡한 표정으로 페일 옆의 남자를 보았다.
“난 보디가드가 아니다.”
바로 트렌이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트렌의 날 선 말투를 페일은 유들유들하게 받아넘겼다.
처음에는 ‘화린’이라는 여자와 함께하기도 했다는데, 그 여자는 지금은 철우라는 남자와 함께 스카웃해 온 플레이어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 결과 지금은 트렌이 페일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득은 있었어?”
“반응이 괜찮더라고요. 아무래도 트렌 씨가 있어서 더 반응이 긍정적인 듯했어요.”
“하긴.”
베르닐 대수림.
마경보다는 밑줄로 보긴 하지만, 그곳도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둘이 이번에 만나러 간 이들은 바로 대수림의 가장 큰 세력인 ‘숲 트롤 부족’이었다.
‘같은 트롤이니까.’
제크는 슬쩍 트렌을 보며 생각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페일은 웃는 낯으로 이어서 말했다.
“특히 트렌 씨가 거기의 대전사를 쓰러트린 게 효과가 컸던 것 같아요.”
“뭐?”
제크는 그 말에 깜짝 놀라 페일과 트렌을 번갈아 봤다.
“왜 싸웠는데?”
“그쪽에서 자신보다 약한 놈들이랑은 손잡을 생각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트렌이 나서서 무력 시위 좀 해 줬죠.”
페일의 말에 트렌이 언뜻 뿌듯한 기색을 내비쳐 보였다.
제크는 더욱 황당함을 느꼈다.
겨우 두 명이 가놓고 남의 본진에서 싸우다니.
“넌 겁도 없냐?”
“에이, 트렌 씨를 믿어서 그런거죠.”
페일은 제크의 날 선 반응에도 그저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후우.”
제크는 그 반응에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고 보면 원래 이런 놈이었지.’
제크는 처음 페일과 만났을 때를 생각했다.
그때는 지금 생각해도 아무것도 없던 시절이다.
단순히 주먹질 조금 하는 정도.
그것조차도 개나 소나 칼을 차고 다니는 이 세상에서는 큰 메리트가 되지도 않았다.
그가 배운 건 격투기였지 칼싸움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랬었는데.’
그런 자신이 이런 자리까지 올라온 것은 전적으로 페일 덕분.
제크는 항상 페일이 무모하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는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는 결국 머리를 거칠게 긁적이고 나서 다시 페일을 보았다.
“그래서 이제 아예 끝난 거냐?”
“예. 이미 가 볼 곳은 다 가 봤어요. 서부전선도 뚫렸다니 이제 슬슬 내실을 다져야죠.”
거칠 것 없던 확장은 멜리움 왕국의 2/3를 먹어치우고 나서야 멈췄다.
그 과정에서 병력 손실 또한 상당히 컸고, 황폐화된 곳도 많았다.
만약 오크와 고블린의 왕성한 생식 활동과 빠른 성장이 아니었다면 전쟁 후유증으로 알아서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뭐, 그럼 이제 이곳도 정리하겠네.”
“네, 벨루곤에 인간 병력 거의 전부가 모여 있으니까요.”
도시 벨루곤은 이번 전쟁에서 아주 큰 역할을 했었다.
페일과 제크는 전쟁이 시작할 때쯤엔 이미 벨루곤을 거의 집어삼킨 후였다.
폴그룬의 군대가 왔을 때 성주는 수성을 준비했지만,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페일과 제크가 성문을 열어 줬기 때문이다.
그렇게 벨루곤을 중심으로 물자 수송과 병력 집결 등이 이루어졌고, 거의 중간 기지로 사용되었다.
“후. 그래도 끝나긴 끝나네.”
제크는 턱을 괴며 생각했다.
겨우 두 달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정말 살 떨리는 두 달이었다.
만약 직접 호진, 케륵, 크룩 등의 무력을 보지 않았다면 이미 도망쳤을지도 모를 상황이기도 했고.
그만큼 폴그룬의 병력은 멜리움 왕국과 두고 보면 아주 열세였다.
그것을 폴그룬은 간부들의 무력으로 해결했다.
특히 ‘크룩’이라는 오크는 그 자체로 공성 병기였다.
달려가서 성벽을 들이받는 것만으로 웬만한 곳은 다 무너져 내렸으니까.
“흠.”
제크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음료를 홀짝이고 있는 페일을 향해 질문했다.
“그런데 간부들은 오늘 다 어디로 간 거야?”
제크는 전선에서 돌아오고 난 후에야 케륵과 크룩, 이렌을 비롯한 간부들이 모두 어딘가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애초에 간부들 사이에서도 격차가 있었기에 별로 신경 쓰진 않았지만.
어디로 간 건지 자체는 궁금했다.
페일은 빙글 웃음 짓더니 제크의 질문에 답했다.
“왕을 모시러 간다던데요?”
“왕? 호진을?”
“예.”
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돌아오신답니다.”
* * *
황량한 평야.
일단의 무리들이 서 있다.
그들은 바로 어제 저녁 수정구를 통해 연락을 받았다.
-나 곧 돌아오니까 마중 좀 나와라.
라는 짤막한 전언.
그 전언에 케륵, 크룩, 그리고 이렌은 바로 펜릴과 함께 말했던 지점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꼬박 밤을 지새우면서 호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 기다림에도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모두 약간 흥분한 듯한 기색이었다.
두 달간 많은 게 바뀌었다.
호진은 그걸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 잘했다고 칭찬을 할까?
아니면 생각보다 못 하다고 질책을 할까.
다들 머릿속으로 기대와 걱정이 반반 섞인 듯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른 후.
쿠우웅-!
“케륵?”
그들 중에서 무언가가 다가옴을 가장 먼저 느낀 건 케륵이었다.
화아아아악!
이어서 밝은 빛이 퍼져나갈 때는 크룩과 이렌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저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호진 님!”
“전하!”
다들 다른 호칭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늘에서 마치 별똥별처럼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콰르르르릉-!
거센 우레 소리.
콰앙-!
강렬한 폭음과 함께 빛줄기가 땅에 떨어졌다.
모두 기대에 찬 눈으로 그곳을 보았다.
곧 연기가 가시고 호진의 모습이 드러났다.
“끄으윽.”
머리부터 땅에 처박힌 호진의 모습이.
“도,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