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뇌신의 창에서 전격이 치솟는다.
호진도 그에 창을 맞잡았다.
대륙엔 곧 혼란이 찾아올 거다.
그것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느끼고 있는 건 뇌신이었다.
풍룡. 지룡. 백룡. 흑룡.
모두의 힘을 합쳐 어둠을 억눌러 놓았지만, 그것은 영원한 게 아니었다.
놈은 힘을 거의 회복했고, 이제는 그 힘을 휘두르려고 하고 있다.
‘호진’이라는 자신의 사도는 제법 잘해 오고 있었지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게 문제.
뇌신 그 자신이 희생하더라도 호진을 더 강하게 해야 했다.
“와라.”
“왜 싸워야 하는 겁니까?”
호진은 창을 쥐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뇌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힘을 공짜로 주는 줄 알았느냐?”
그는 창에 힘을 끌어모았다.
싸울 마음이 없으면 만들어 주면 될 터.
“난 현재 딱 너만큼의 힘만을 사용하겠다.”
콰앙!
뇌신의 몸이 쏘아져 나갔다.
섬전과도 같은 속도.
카각!
창끝이 호진의 손끝에 막혔다. 정확히 말하면 건틀릿에.
“지금까지 배운 걸 써먹어 봐라.”
뇌신은 호진을 향해 말했다.
카앙!
그는 창을 반 바퀴 회전시켰다.
호진의 손이 그대로 하늘로 들렸다.
푸욱!
뇌신의 창대가 호진의 복부를 가격했다.
호진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지만, 뇌신은 바로 쫓아가서 그의 다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콰앙!
“크윽!”
호진은 넘어진 상태로 그대로 옆으로 굴렀다.
콰앙!
그가 있던 자리로 창날이 꽂혔다.
호진은 건틀릿을 창으로 바꾸며 위로 찔렀다.
카앙!
“그런 잔재주로 나를 상대하려는 거냐?”
하지만 뇌신은 창을 간단하게 옆으로 쳐내며 호진을 다시 한번 발로 걷어찼다.
“컥!”
“일어나서 싸워라. 내가 가르쳐 준건 모두 까먹은 거냐?”
호진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창을 잡아. 그리고 자세를 취해라.”
뇌신은 호진이 일어나는 걸 기다렸다.
호진은 창대를 꽉 쥐고서 자세를 취했다. 뇌신도 그걸 보며 똑같이 자세를 취했다.
쾅!
첫 공격은 찌르기.
둘의 발에 똑같이 전격이 튀어 오르며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간다.
휙!
서로의 몸에 창날이 닿기 직전 호진의 몸이 옆으로 돌았다.
휘이이-
풍월검의 능력으로 몸을 억지로 돌린 것이다.
“잔재주라뇨.”
호진은 그대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콰르르르르-
전격이 바닥을 타고 흐른다.
뇌신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지만, 전격은 본래 뇌신의 힘.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호진은 그 잠깐의 틈을 만들려 했었던 것.
팍!
호진의 창이 뇌신의 정강이를 스쳤다.
공격이 먹힌다.
호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고작 그 정도냐?”
하지만 뇌신은 창을 들고서 차가운 표정으로 호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오래 걸리겠구나.”
콰앙!
호진은 분명 뇌신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뇌신의 손이 움직인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창날은 호진의 발 옆에 꽂혀 있었다.
“제자 놈을 쓸 만하게 만들려면.”
* * *
호진의 군대는 끝도 없이 진군했다. 멜리움 왕국을 계속해서 먹어 치웠다.
본래의 멜리움 왕국의 전력이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이 되진 않았을 거다.
호진이 부재하는 동안은 대리를 맡고 있는 케륵과 철우도 어느 정도 사리고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변수가 생긴 건 바로 멜리움의 내부에서부터였다.
왕국 무력의 두 축이었던 또 한 명의 변경백과 공작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팔치온 백작에 이어 양 날개까지 뜯겨 나간 왕국은 폴그룬 군대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인접한 왕국과 공국에서까지 어부지리를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기까지 했으니.
폴그룬은 기세를 몰아 세력을 확장하고, 현재 점령한 영지들을 확실하게 흡수했다.
호진이 자리를 비운 게 벌써 한 달 전.
생각보다 그의 부재는 길었고, 간부들은 모여서 회의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딱 한 달이 되는 오늘. 각 지역으로 흩어졌던 폴그룬의 간부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호진 님이 생각보다 더 오래 자리를 비우고 있습니다. 이제 슬슬 결정해야 합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철우였다.
그의 말에 케륵이 대답했다.
“케르륵. 분명 이 주 내외로 돌아오신다고 하셨었다. 그 이상이 넘어가면 우리의 판단에 맡긴다고 하셨고.”
호진이 내려놓은 지시는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수행한 상태였다.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정체되어 있을 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쿵!
그때 누군가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크루룩! 뭘 길게 고민해? 일대를 밀어 버리려면 지금이 기회야.”
바로 크룩이었다.
본래 지금까지는 진군을 멈춘 채 내실을 다져야 하는 쪽과 크룩처럼 이 기회에 싹 밀어야 한다는 쪽으로 갈렸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은.
“케륵. 그래, 솔직히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어. 이 이상 망설였다간 영영 기회가 안 올지도 몰라.”
만약 변경백과 공작, 그리고 왕실이 모두 힘을 합친 상태였다면 힘들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흩어진 상태.
만약 세력을 확장한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무엇보다 이곳에 모인 간부들은 모두 ‘서부전선’에 대한 소식을 들은 상태였다.
“마물이 넘어오기 시작하면 세력을 확장하는 것도 멈춰야 할 터. 케르륵. 그 전까지 최대한 많은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
“음, 서부전선은 이제 길어야 이 주 정도겠지요.”
철우는 케륵의 말을 받으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서부전선에 대한 소식은 지금 전 대륙에 널리 퍼진 상태다.
그곳에 주둔 중이던 본진이 갑작스러운 기습에 거의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는 소식.
왕국들과 교단은 부랴부랴 추가 원정대를 전선으로 파견했지만, 한번 유리한 고지를 뺏긴 이상 전선이 뚫리는 건 시간 문제였다.
“전선이 뚫리면 서부 지대에 있던 마물들이 전 대륙으로 퍼져 나갈 겁니다.”
현재 대륙에서 마물은 그리 흔하지 않다.
수 자체도 적고, 무리를 짓지 않은 채 사방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명월 현상 때 피해가 컸던 것은 그 마물들이 이례적으로 무리를 이뤄 돌아다녔기에 일어났던 일.
하지만 서부 전선에 있는 마물들은 다르다.
“놈들은 몇 달 전부터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고 있는 것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였다고 했었지. 크룩.”
“예, 게다가 듣기로는 이번 기습도 아주 지능적이었다고 합니다.”
대략적인 의견은 거의 진군을 재개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때 지금까지 조용하게 있던 이가 입을 열었다.
수인 왕국의 황금 갈기.
그 또한 동맹의 자격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우리는 슬슬 돌아가 볼까 한다.”
그의 말에 몇몇 이들이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뭐라 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 황금 갈기가 동맹으로서 최선을 다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케르륵.”
케륵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황금 갈기는 우선 이번 회의까지만 참여하기로 했고, 그들은 다 같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얘기를 한 건 어떤 범위까지 진군을 할지에 대해서였다.
앞으로 다가올 혼란을 대비하기 위해선 지나치게 확장하는 것도 피해야 했다.
영토를 확장해 봤자 그걸 지킬 힘이 부족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토의를 통해 적당한 선을 만들어 냈다.
테이블의 중앙에 놓인 지도 위로 선이 그어졌다.
“그럼 이렇게 하기로 하지. 케르륵.”
확정된 지도를 두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철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를 물끄러미 보았다.
‘화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조심히 돌아와라.’
이곳에서는 전쟁이 다시 시작될 것이고.
화린은 화린 나름대로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하러 떠났다.
아마도 꽤 험난할 역할을.
* * *
“후우.”
타오르듯이 붉은 머리칼.
화린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곳은 열사의 사막.
그녀는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멀었나요?”
“거의 다 왔습니다.”
“그 말만 다섯 번은 넘게 들은 거 같네요.”
화린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있는 건 바로 페일이었다.
“그러게요. 듣기로는 가깝다고 했었는데.”
“…제대로 도착만 했으면 좋겠네요.”
화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더위 저항 아티팩트까지 꼈건만 이곳의 더위는 여전히 살인적이었다.
그나마 아직 물은 넉넉하게 남아 있지만.
마음 같아선 다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을 정도다.
그래도 화린은 더 불판을 터트리지 않고 꾸준하게 걸었다.
“어!”
다행히 페일의 거의 다 왔다는 말이 이번엔 사실인 듯했다.
페일이 놀란 표정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기 보세요!”
화린은 바로 그의 손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페일의 손가락 끝에는 독특한 양식의 천막이 보였다.
“찾았다!”
바로 화린과 페일이 찾던 것이었다.
둘은 밝은 얼굴로 달려갔다.
파악!
그때 둘의 앞으로 화살 같은 게 박혔다.
“누구냐!”
천막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화린은 바로 양손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염화의 마법사에게 볼일이 있어 왔습니다.”
“뭐라고?”
천막 뒤쪽에서 말을 하는 자는 잠시 대답이 없다가, 곧 이어서 말을 했다.
“그걸 어떻게 믿지?”
“우선 염화의 마법사님이 여기 있긴 한가 보네요.”
화린과 페일이 씩 웃었다.
사막까지 건너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흥. 애초에 너희들에게 숨길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함부로 움직이면 머리통에 구멍을 내줄 거니까.”
날카로운 어조의 말투와 함께 경고를 하듯 화살이 한 발 더 날아왔다.
그에 대답을 한 건 페일이었다.
“얘기라도 하게 해 주시죠. 염화의 마법사님에게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될 건 없습니다.”
페일은 한 발자국 성큼 앞으로 내딛기까지 하며 이어서 말했다.
“저희는 부탁 같은 걸 하러 온 게 아닙니다.”
그는 양팔을 활짝 벌렸다.
“동등한 입장으로 거래를 하러 온 겁니다. 그것도 상당히 구미가 당길만한 거래요.”
“이익. 다가오지 말라고 했…….”
“그만.”
화살을 쏴 대던 이가 성난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려는데 다른 사람이 그의 말을 끊었다.
“거래라.”
천막 뒤쪽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길게 기른 머리.
몸에는 사막의 유랑민들이 입을 법한 의복을 걸친 남자다.
하지만 천으로 가렸는데도 그의 황금색 머리칼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바로 염화의 마법사요. 무엇을 거래하자는 겁니까?”
페일은 슬쩍 고개를 돌려 화린을 보았다.
화린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는 화린이라고 합니다. 과거 랭킹 37위였고요.”
그녀는 남자를 똑바로 보았다.
“당신이 마법사 랭킹 1위 최강 열법사 맞습니까?”
남자의 몸이 움찔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