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운명?”
놈은 나와 비슷한 덩치인데도 재앙보다 더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난 놈에게 검이 스치는 감각을 생생히 느꼈다.
재앙 놈들처럼 아예 공격이 안 통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
그거면 됐다.
“까고 있네.”
놈의 신형이 꿈틀거리는 걸 보며 바로 검을 내뻗었다.
파악!
쾅!
나를 향해 뻗은 놈의 손을 올려 베었다.
놈의 손은 그대로 위로 들려 엉뚱한 곳을 파괴했다.
퍽! 퍼억!
난 그대로 놈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검을 건틀렛으로 바꿨다.
콰득.
놈이 걸친 거적때기를 움켜쥐고서 그대로 내던졌다.
콰아앙-!
놈은 그대로 벽에 부딪쳤다.
도대체 손에서 뭘 쏴 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움직임 자체가 엄청 빠르진 않다.
“네놈을 죽이면 또 다음 층으로 가는 거냐?”
난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놈을 보며 물었다.
하지만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또다시 손을 뻗을 뿐.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나도 놈이 손을 들어 올린 시점에 몸을 날리고 있었다.
쾅!
끊임없는 격돌.
놈은 적은 움직임으로도 위협적인 공격을 해 왔고, 난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으려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저항하지 말라.”
놈은 계속 공격을 해 오면서도 틈틈이 말했다.
그것은 대화 같은 게 아니었다. 놈은 그저 일방적으로 통보를 할 뿐.
“신의 품으로 가는 것은 무엇보다 큰 영광. 어찌하여 그것을 거부하는가?”
“그렇게 말하려면 공격이라도 멈추던가.”
물론 놈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던가.
공격을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흔한 신음조차 내지 않으니 공격이 제대로 먹히고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콰앙!
창날이 놈의 몸을 파고들다가 멈춘다.
바위조차 꿰뚫는 창도 놈의 몸을 제대로 파고들지 못했다.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진 몸인지.
그저 놈도 데미지가 누적되고 있을 거란 생각으로 계속해서 공격을 했다.
“크윽.”
놈에게서 유의미한 반응이 나온 건 약 삼십 분여를 더 싸운 후였다.
검으로 옆구리 쪽을 찔렀는데 처음으로 놈이 침음성을 내뱉은 것이다.
‘약점? 아니면 데미지가 누적된 건가?’
확인을 위해 옆구리가 아닌 다른 부위를 타격했다.
이번에는 별다른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난 놈의 몸이 움찔 떨리는 걸 확인했다.
“너도 슬슬 힘이 딸리나 보구나.”
게다가 놈이 발출해 내는 힘 또한 현저하게 약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기세를 몰아 더더욱 놈을 몰아 붙였다.
‘쇼크웨이브.’
파지지직!
기술을 가리지 않고 놈의 몸에 때려 박았다.
더 시간이 지나자 놈의 공격을 아예 몸으로 받아 내면서 싸우는 것까지 가능했다.
그 이후는 더욱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난 전신에 기운을 두른 채로 놈을 계속해서 두들겼다
“크아아아악!”
그리고 약 한 시간이 되었을 때.
드디어 놈이 비명을 내질렀다.
“크으으으으으으!”
몸을 부여잡고서 비틀거리는 놈에게 거리를 벌렸다.
놈이 최후의 발악을 할 수도 있으니까.
경계 어린 눈으로 놈을 지켜보고 있는데 놈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안 돼. 안 돼. 안 돼. 모두 빠져나갈 거야.”
“빠져나간다고?”
“흐흐흐.”
놈은 실성한 듯한 웃음을 흘리더니 휙 고개를 쳐들었다.
“후회하게 될 거다. 신의 뜻을 거스른 것을.”
놈이 거적때기를 휙 집어 던졌다.
난 그제야 놈의 제대로 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대체 몸이 뭐로 이뤄졌기에 그리 단단한가 했는데, 의외로 놈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인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슨 몸에 금이…….’
온몸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다는 것.
“드디어 해방이다.”
다시 질문을 하기도 전에 놈은 얼굴에 선명한 웃음을 띠며 눈을 감았다.
쿠웅-!
그리고 다시 진동이 시작됐다.
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저 사내가 들고 있던 보따리가 있었다.
‘왜 저걸 까먹고 있었지?’
아니, 그 전에 놈이 언제 저걸 저기다 뒀었지?
기억이 안 난다.
쿵!
이번엔 앞쪽에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바로 사내의 몸에서부터였다.
쿠웅!
조금 전에 거미줄 같다고 생각했던 사내 몸의 금이 더욱 벌어져 있었다.
쿠웅!
쿵!
쿠웅!
쿵!
앞뒤에서 연속으로 진동이 울린다. 불길한 울림.
불길한 느낌.
-흐으으.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난다.
거적때기를 두르고 있던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탐험가라 부른 사내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기까지 오셨군요.
흐느끼는 듯한 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울려 퍼지고 있는데, 남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우선 감사 인사를 다시 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찌나 오랜만에 먹은 밥이었던지. 이런 처지인데도 그 맛이 잊히지 않는군요.
“…이건 무슨 상황입니까?”
-다 설명해 드리고 싶지만.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저에게도. 당신에게도요.
그의 얼굴이 일렁였다.
-그저 제가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꼭 이겨 내십시오.
후우우웅-
그리고 그에게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나를 향해 빛이 퍼져왔다.
“무슨.”
뭐라 물어보기도 전에 그 빛은 내 가슴팍으로 스며들었고, 남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흐으으.
흐느끼는 소리가 더욱 격렬해진 건 그때부터였다.
이제는 어느 한곳이 아니라 사방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한 명의 목소리가 아니라 노인, 어른, 아이, 남자, 여자 등등 수십, 수백 명의 목소리였다.
-우리는 살고 싶었어.
식은땀이 흐른다.
겁을 먹은 것인가? 아니다.
이것은 그저 본능적인 거부감.
-왜 내가 여기서 죽어야 했지?
-그저 길을 잃었던 것뿐인데.
-난 돌아가려고 했었어.
여러 명의 목소리가 겹쳐서 울려 퍼진다.
그가 이겨 내라고 한 건 이걸 말하는 건가?
난 뿌예진 시야 너머로 신형이 하나둘씩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곳은 제물을 바치는 곳이었지.’
그리고 아까 그 거적때기는 자신을 수확자라고 했었다.
뇌신이 만약 바쳐진 제물들의 영혼을 거두지 않았다면.
그 영혼들은 모두 수확자에게 있었겠지.
‘그런 거였구나.’
수확자가 죽음으로써 그 영혼들은 밖으로 나온 거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산 사람이었다.
-너는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그들의 분노가 나에게 향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난 검을 들었다.
* * *
호진은 걷고 있었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로 눈을 흐리멍덩하게 뜨고서.
“어… 다…….”
그의 입은 끊임없이 무엇을 중얼거고 있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걷고 걷다가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호진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왔구나.”
그의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
대전의 가장 안쪽에 있는 의자에는 한 사내가 앉아 있다.
“생각보다는 빨랐군.”
뇌신. 그는 여전히 권태로운 얼굴을 한 채로 자신의 사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을 왜 가둬 둔 것입니까?”
“가둔 게 아니다. 갇혀 있던 것이지.”
호진의 시야가 점점 또렷하게 변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 겁니까?”
“아주 큰 차이가 있지. 본래라면 그들의 영혼을 내 품으로 거둬들였을 거다. 그렇게 방치해 둘 이유가 없지.”
“그들은 고통 받고 있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너를 곳으로 불러들인 거고.”
“당신이 격을 잃은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겁니까?”
뇌신이 호진을 내려다봤다.
그들이 관념 속의 장소가 아니라 실재하는 장소에서 대면하는 건 처음이다.
지금의 뇌신은 호진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이곳은 뇌신의 마지막 신전.
그는 이곳에 실존할 수 있지만, 그 힘은 오히려 약해진다.
강성한 신조차 부담스러운 현신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는 더 이상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은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내 격은 바닥으로 추락했고, 나는 신이라 불리되 더는 신이 아니다.”
뇌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힘을 잃을 적 이곳을 폐쇄했었다. 입구를 숨겨 두고 각 층을 단절시켜 혹여 들어오더라도 다시 돌아가게 했지.”
“그런데 완벽하지는 않았나 보군요.”
“시간이 급했으니까. 무엇보다 격을 잃는다는 건 아주 큰 고통이다. 난 반쯤 미쳐 있었지.”
그는 웃음을 지었다.
“지금도 다른 거 같진 않지만.”
호진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저는 이들을 해방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겁니까?”
“아니.”
뇌신이 딱 잘라 말했다.
“넌 그들을 받아들이러 온 거다.”
호진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호진의 뒤로는 회색빛의 연기가 둥둥 떠 있었다.
영혼들의 원한은 깊었다.
호진이 그들과 싸우는 데엔 칠 일이 넘게 걸렸지만, 여전히 그들은 호진에게 들러붙어 있었다.
“그들은 더는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너에게 힘을 얻을 기회를 준다고 했었지. 너는 더욱 강한 힘을 원했었고.”
뇌신은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뒤를 가리켰다.
“그 힘이 바로 네 뒤에 있다.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 터.”
“저를 사령술사로 만들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호진의 말에 뇌신은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던 그는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사령술사는 영혼을 다루는 게 아니다. 영혼이 남긴 찌꺼기를 이용하는 것뿐. 필멸자는 감히 영혼에 개입하지 못한다.”
“저도 그 필멸자 중 한 명이 아닙니까?”
“그렇지. 아직까지는.”
뇌신의 눈이 형형하게 빛난다.
호진은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걸 아느냐?”
뇌신은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격을 잃은 자가 격을 되찾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드문 일이기도 하고.”
그다음엔 그의 손은 호진을 가리켰다.
“하지만 누군가가 새롭게 격을 얻기는 쉽지. 아, 물론 비교적 말이다. 특히 그 방법을 상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도와준다면 더더욱 쉽겠지.”
“무슨 요리라도 하듯 간단하게 말하는군요.”
“실제로는 그리 간단하지 않지.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그 ‘어둠’ 때문입니까?”
뇌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대항하던 신들은 격을 잃었다. 다른 신들은 그에게 대항하기를 포기한 채 간신히 그 알량한 목숨을 이어 가고 있지.”
내내 권태롭던 그의 표정에 처음으로 분노가 드러났다.
“신은 믿음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신도들의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그것이 신을 강성하게 하지. 다른 신들은 이미 그 믿음을 잃었다.”
호진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뇌신은 그런 호진에게 말했다.
“너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이곳은 호진을 담금질하기 위한 곳이다.
예전엔 그렇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렇게 되었다.
뇌신이 그렇게 하길 원했으므로.
호진은 뇌신의 권속들을 차례차례 죽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뇌신의 잔재들을 흡수하였다.
계속해서 영혼들을 접촉시켜 그의 영력을 자극했다.
마지막에는 수확자를 보내 그를 깨트리게 했고, 그 안에 담긴 영혼들을 마주하게 했다.
결국, 호진은 그 모든 과정을 거쳐서 뇌신의 앞에 섰다.
이제는 마지막 단계만이 남아 있다.
“나와 싸워 그릇을 만들어라.”
뇌신은 창을 소환했다.
그의 한 명뿐인 사도는 언젠간 그 자신의 자리를 물려받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