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저번의 던전과는 다르다.
그때의 마틴은, 이를테면 동면을 취하고 있던 것이니.
이 남자는 그와 달리 이 던전에 들어온 것뿐. 시간이 그렇게나 지날 리는 없다.
설마 시간의 흐름이 바깥과 다르다는 건 아니겠지.
‘터무니없어.’
뇌신이 나를 엿 먹이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그럴 리 없다.
그런 시간의 흐름이라면 내가 나갔을 땐 모든 게 끝나 있을 테니까.
‘그럼 뭘까.’
난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빤히 보았다.
“으음.”
하지만 역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난 고개를 저은 후 남자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그 괴물들이 어디 있는지는 아십니까?”
“예,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남자가 의아한 듯 물었다.
“저는 이 던전의 끝을 볼 생각을 하고 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하라고 듣고 온 거지만.
이미 구슬이나 말뚝 등은 모두 사용한 후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나.
남자에게도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그도 가진 게 없다고 했다.
“한번 놈들을 확인해 보고 올 생각입니다.”
무언가 다른 방법은 없을지 말이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내가 거듭 강경하게 요구하자 곧 그 위치를 알려 주었다.
“저, 저도.”
“아뇨.”
얼굴 표정이 이미 전혀 안 따라오고 싶은 눈친데.
난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거 받으세요.”
난 인벤토리에서 음식들을 몇 개 더 꺼내었다.
혹시 그가 조바심에 급하게 먹을까봐 일부러 넉넉하게 챙겨 주었다.
남자의 책을 쭉 봐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도 굳이 거부하지 않고 그저 감사하다고 인사만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난 남자를 뒤로하고 다시 굴을 빠져나왔다.
바깥으로 나오니 다시 황량한 광경이 보인다.
난 무기를 꽉 쥔 상태로 쭉 걸어갔다.
남자와 나눴던 얘기 중에선 말뚝과 구슬에 대한 것도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괴물에게 먹힐지를 알았나?
남자는 그에 대해 간단히 대답했다.
‘탐험을 하는 도중 한 석판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 쓰여 있었죠.’
악을 내쫓는 구슬과 심판하는 말뚝. 이라는 설명이 써져 있었다고 한다.
난 계속해서 복도를 걸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도 이곳은 그리 많이 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까 전의 공간을 발견한 후로는 거의 그곳에만 있었다고.
그렇다는 건 이 층 어디엔가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너무 긍정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후우.”
예상외로 괴물은 바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분위기도 흉흉하니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먼저 눈에 띈 건 제단 같은 것이 있는 방이었다.
‘이곳도 방이 있긴 있네.’
계속해서 복도만 이어져 있는 줄 알았다.
한참을 걸어도 아무것도 안 나오길래.
난 주변을 훑어보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제단에는 번개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난 그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이곳이 남자가 처음 그 ‘석판’을 발견했다는 제단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으음?”
한참 제단을 살펴보는데 어떤 곳에 손이 닿자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자세히 보니 무언가 깊게 파인 자국이 있었다.
난 잠시 고민을 하다가 기운을 끌어올렸다.
파직-!
손끝에 전격이 튀어 오른다.
쿠궁-!
그리고 전격이 그 홈에 닿는 순간 제단에서 진동이 울렸다.
이내 안쪽에서 기계 장치 같은 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제단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상자.’
본래 제단이 있던 자리엔 나무 상자가 있었다.
조심스레 그것을 열어 보니 안에는 구슬과 말뚝들이 들어 있었다.
난 그것들을 바로 인벤토리에 쓸어 담았다.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바로 빠져나왔고, 다시 또 복도를 걷다가 비슷한 제단을 발견했다.
그곳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계속 같은 생각이 드는 거 같은데.’
난 목덜미를 긁으며 생각했다.
일련의 상황들을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내가 그리 순진하지는 않다.
지금 상황은 마치 짠 듯이 딱딱 들어맞고 있다.
‘마치 게임처럼.’
아이템을 획득하고, 그 아이템을 활용해 보스 몹을 해치우고.
보스 몹을 해치우니 다음 층으로 넘어갈 열쇠를 획득하고.
그다음 층에선 보스를 만나기 전 NPC와 조우. 그리고 조언을 듣고.
다시 또 보스를 만나러 가기 전 아이템 파밍을 하고.
‘만약 이게 게임이었다면 그 뒤에 나올 건 진 보스의 등장이겠지.’
전 단계에서의 보스는 중간 보스 정도가 될 테고 말이다.
“하.”
반쯤 농담으로 생각한 건데도,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은 더 굳어졌다.
‘보통 장소는 아닐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뇌신은 무슨 생각인 걸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난 왼 손가락 사이사이에 구슬을 끼웠다.
왠지 곧 괴물을 마주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복도는 생각보다 길었다.
복잡했던 머리는 약간 정리가 됐다.
‘괴물을 죽인다.’
창을 등 뒤로 비껴 매고, 구슬과 말뚝을 양쪽 손에 들고.
무저갱같이 어두운 앞쪽을 보았다.
‘앞으로 나아가고, 마지막 장소에 다다르면 의문도 풀리겠지.’
항상 그렇듯이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풀 수 없는 의문에 집착하는 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 마련이니까.
난 발을 내디뎠다.
길었던 복도의 끝.
안쪽에서는 짐승의 숨소리 같은 게 들린다.
드디어 ‘재앙’ 놈들이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파지지직-!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사방으로 전격을 퍼트렸다.
어두웠던 공동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네 마리의 괴물.
두 마리는 천장에 매달려 있고, 한 마리는 안쪽에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콰아아앙!
이미 날 노리고 달려들고 있었다.
난 바닥을 내려찍는 거대한 앞발을 피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크르르-!”
역시 꽤 지능이 높은 놈들이다.
빤히 보이는 수법이었지만, 나름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린 게 아닌가.
촤악!
난 연이어 달려들려는 놈에게 구슬을 던졌다.
파앙!
놈의 몸에 가서 터지는 세 개의 구슬.
대략적인 요령은 파악했기에 어려운 것은 없었다.
‘뇌룡 질주.’
콰르릉!
몸을 가속하며 놈의 몸을 타고 올랐다.
콰직!
구슬이 터졌던 곳에 박히는 말뚝.
세 부위에 꼼꼼하게 말뚝을 하나씩 박아 넣었다.
놈은 당연히 몸부림을 쳐 가며 날 떼어 내려 했지만, 난 말뚝 근처에 창까지 한번 꽂아 넣고 난 후에야 바닥으로 내려왔다.
쾅-!
땅에 내려오기 무섭게 촉수가 날아왔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놈이 날린 것이다.
“크르르르르!”
이내 틈을 노리고 있던 나머지 괴수들도 슬금슬금 다가왔다.
한 번에 공격해 올 생각인 듯하다.
물론 괴물들이 순서를 지켜가며 차례차례 덤빌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쾅! 콰앙-!
난 연이어 날아드는 촉수를 피하고, 거대한 앞발이 날아오면 오히려 그걸 타고 올라 구슬과 말뚝을 박아 넣는다.
피하고 때리고.
구슬을 터트리고.
말뚝을 박고.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번만 삐끗하면 그대로 치명타로 연결될 테니.
콰드득!
“크라라아아아!”
말뚝이나 구슬의 수는 부족한 만큼 더욱 계획적으로 써야 했다.
최대한 적은 수로 놈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게.
“카아아아아!”
갈수록 몸은 바빠졌지만, 의외로 그 과정은 아주 순탄했다.
놈들의 몸에는 말뚝이 하나씩 늘어났고, 그럴수록 내가 공격할 수 있는 범위도 늘어났다.
놈들도 계속해서 데미지가 축적되고 있다는 것.
이미 한번 괴물을 처리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놈들의 패턴을 파악하기도 쉬웠고.
그 결과.
“크으우아.”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네 마리의 괴수들이 모두 무력화된 채 바닥을 기고 있었다.
* * *
콰드득!
난 또 한 마리의 머리통에 창을 찔러 넣었다.
창은 말뚝 옆을 파고들었고, 난 끝에 걸리는 걸 툭툭 쳤다.
“으.”
이건 꼭 손으로 해야 한다.
난 봐 뒀던 자리에 손을 찔러 넣어 딱딱한 물건을 끄집어 냈다.
바로 큐브다.
난 인상을 쓴 채로 그 큐브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바닥엔 방금 꺼낸 거까지 포함해서 총 네 개의 큐브가 놓여 있었다.
“그르르.”
방금 막 머리통이 갈라진 괴물은 앓는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난 괴물의 몸에서 뛰어내려 큐브를 보았다.
‘이번엔 어떻게 되는 거지?’
전엔 열쇠가 꽂히고 이곳으로 내려왔었지.
이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
“으음.”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난 우선 큐브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고 공동의 안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통로가 나 있었다.
처음엔 괴물이 웅크리고 있어서 못 봤다.
전투가 끝나고 여유가 생긴 후에야 발견했다.
‘우선 가 볼까.’
난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다음은 뭘까?
아까 전 생각했던 대로 최종 보스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새로운 미스터리?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특별히 더 긴장되거나 하진 않았다.
이미 난 신경이 최고조로 예민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뭐가 있든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
그 좁은 통로로 걸어가니 안쪽은 생각보다 평범하게 생긴 복도였다.
‘이놈의 복도.’
콘셉트 참 일관적이다.
어째 신전인데 있는 거라곤 복도랑 괴물들이 있는 공동밖에 없는 것 같다.
타닥-
막 그 안쪽으로 다시 걸어가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휙 고개를 돌리니 웬 신형이 언뜻 보였다.
난 바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휙-
이번 복도는 일직선 구조가 아니었다.
내가 달려가니 곧 그 신형은 다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것이다.
난 무엇인진 몰라도 우선 정체를 확인할 생각에 계속 그 신형을 따라갔다.
탁-
하지만 난 그 신형을 따라잡기도 전에 멈춰 서야 했다.
돌연 앞에 막다른 길이 나타난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계단’이 있었다.
‘이번엔 평범하게 계단이냐.’
그 신형은 무엇이었을까?
‘그 모험가의 동료?’
남자는 자신의 동료에 대해 언급하는 걸 꺼렸었다.
난 그저 추측으로 죽었거니 생각했을 뿐.
‘우선 그 남자한테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계단을 내려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 남자를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
뭐, 계단이 어디로 도망가지는 않을 테니 잠깐 다녀오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몸을 돌렸다.
우선 돌아갔다 올 생각으로.
그러나 나는 다시 멈춰서야 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바로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것도 이미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삐쩍 마른 몰골의 탐험가.
“저는 이 아래에 있습니다.”
그는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위에 ‘떠’ 있었다.
“식사는… 감사했습니다.”
그는 그 말만을 남겨 두고서 다시 사라졌다.
난 귀신에 홀린 듯한 느낌에 멍하니 계단을 보았다.
잠시 혼란스러움을 느끼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내가 왔던 길은 어느새 두꺼운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이제 내가 서 있는 곳은 사람 서너 명이 서 있으면 꽉 찰 것 같은 좁은 공간이 되었다.
나아갈 수 있는 곳은 오직 눈앞의 계단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