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어쩐지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려고 하는데.
쿠웅!
다시 한번 굉음이 울리고.
콰아앙-!
벽이 산산조각 나며 거대한 팔이 튀어나왔다.
난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휘익-!
하지만 검은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콰앙!
이어서 거대한 손바닥이 시야에 가득하게 들어왔다.
충격에 대비해 몸을 움츠릴 틈도 없이 그대로 얻어맞고서 튕겨나갔다.
내 검은 그대로 지나갔는데, 정작 날 공격했을 땐 충격이 고스란히 느껴진 것이다.
이내 놈의 몸이 천천히 벽에서 빠져나왔다.
콰르르르릉-
그 충격에 벽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니, 벽뿐만이 아니다. 바닥, 천장 모든 것이 다 무너졌다.
우르릉.
시야에 닿는 모든 곳이 무너져 내린다.
놀라운 점은 바닥이 무너지자 밑으로 다시 뻥 뚫린 공간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캬아아아아아!”
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며 놈의 모습을 확인했다.
거대한 몸체. 짙은 흑색으로 된 몸. 족히 삼 미터는 돼 보인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거미 다리같이 생겼네.’
등 뒤에 나 있는 여덟 개의 다리.
타다다다닥-
다리……. 자세히 보니 다리보다는 촉수에 더 가까운 거 같다.
우선 녀석은 그것을 이용해 벽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어찌나 움직임이 빠른지, 떨어져 내리는 나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휘이이익-
난 천천히 바람을 이용해 속도를 늦추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공격이 안 먹힌 거지?’
내 검은 놈의 팔을 그대로 통과했다. 반대로 놈은 나를 공격했고.
타닥-
놈은 지금도 촉수를 이용해 벽을 타 내려가고 있다.
‘원할 때만 물리력을 행사하는 건가?’
아니면 무언가 방법이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슬슬 바닥이 가까워졌다.
휘이-
난 착지하기 직전에 놈과의 거리를 확 벌렸다.
무기의 형태는 다시 창.
놈은 내가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크게 웅크리더니 내 쪽으로 풀쩍 뛰어올랐다.
쾅!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다리가 스쳐 지나간다.
파바박!
게다가 놈의 촉수도 장식은 아닌지, 연이어 내가 있던 자리를 내려찍었다.
마치 채찍 같은 활용법이다.
스윽-
혹시나 해서 창을 휘둘러 봤지만, 마치 유령처럼 그대로 통과했다.
파지직!
그래서 이번엔 기운을 끌어 올린 후 휘둘러진 놈의 팔을 피하며 창을 갖다 댔다.
‘개 같네.’
하지만 이것 또한 결과는 같았다.
아무런 반응 없이 그대로 통과한 것이다.
난 계속해서 놈의 공격을 피하면서 생각했다.
문득 어젯밤 뇌신이 꿈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좀 머리를 써야 해. 그렇게 무식하게 양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니까 제자리걸음 아니냐.’
이곳으로 오기 전 마지막 조언이랍시며 했던 말이었다.
말하는 뉘앙스로 봐서는 무슨 의도가 담긴 조언 같았는데.
녀석은 내가 계속 피하자 더 화가 나는지 팔과 다리를 마구 휘둘러 왔다.
콰아아아앙!
그 조언은 이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일까?
“크윽.”
정신없이 날아오는 공격에 손과 발이 어지럽다.
어려운 상대를 만난 적은 있어도 이렇게 공격이 아예 안 막히는 경우는 처음.
이를 악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뇌신이 날 죽일 생각으로 이곳에 보낸 건 아닐 터.
‘무언가 해결 방법이 있을 텐데.’
정신없이 몰아치는 녀석의 공격을 피하면서 주변을 보는 건 힘들었다.
하지만 먼지 한 톨 놓치지 않고 샅샅이 훑어본 결과 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통로?’
아주 작은 통로.
‘기어서나 들어갈 수준인데.’
문제는 저게 본래 있는 건지, 녀석이 난동을 치면서 생긴 건지 알 수 없다는 것.
난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곧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될 터.’
발끝으로 뇌기를 모아 뇌룡 질주를 사용해 몸을 날렸다.
통로에 거의 도착했을 때 몸을 낮춰 그 작은 구멍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콰앙!
바로 뒤에 공격이 날아와 벽을 때린다.
콰르릉-
그 충격에 입구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쾅!
다시 또 충격음이 들린다.
아마도 벽을 재차 때리고 있는 듯 했다.
난 막힌 입구를 흘긋 본 후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직.
손끝에 전격을 피워 올려 길을 밝히고 앞으로 기어갔다.
희미한 통로를 따라서 열심히 기었다. 이곳이 어디로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 채로.
* * *
“그래도 막힌 길은 아니었네.”
얼마나 기어온 것일까.
간간이 들리던 굉음도 멎은 지 한참. 난 계속해서 포복을 한 채 기었다.
그리고 드디어 저 앞에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더욱 힘을 내 기어갔고, 곧 넓은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으, 허리야.”
허리는 물론이고, 팔꿈치와 무릎도 아프다.
군대에서 했던 각개전투 이후로 처음 느껴 보는 고통이다.
이 나이 먹고 포복이라니…….
“후우.”
언제 괴물이 다시 쫓아올지 모르니 계속 여유를 부릴 수 없다.
난 몸을 풀고 나서 주변을 둘러봤다.
‘여긴 뭐하는 데지.’
작은 방이다.
낡은 침대와 작은 서랍장만이 놓인 작은 방.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단서라도 있을까 싶어 기를 쓰고 왔더니 방이라니?
난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혹시 몰라 침대를 두드려 보니 그냥 평범한 침대였다.
‘푹신하긴 하네.’
특이한 점이라면 보통 침대보다 더 푹신하다는 거?
“이게 아니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난 쓸모없는 침대에서 눈을 돌려 서랍장을 봤다.
단서가 있다면 여기에 있겠지.
첫 번째 칸.
‘펜이랑 종이?’
펜과 종이. 그리고 잉크.
혹시 몰라 종이를 들어 봤지만,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난 잠시 살펴보다가 우선 인벤토리 안으로 넣었다.
그리고 두 번째 칸.
“무슨 잡동사니만…….”
별로 필요 없어 보이는 쓰레기들이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닫으려다가 멈칫했다.
“에이.”
혹시 모른다는 마음으로 난 그것들을 주머니 하나에 욱여넣고서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건 또 뭐야?”
그곳엔 두꺼운 책이 하나 있었다.
그래도 지금 나온 것 중엔 가장 그럴듯해 보인다.
난 바로 쭈그려 앉아 책을 열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이곳엔 괴물이 있다.
자세히 보니 손으로 직접 쓴 글씨였다.
-검도, 마법도 통하지 않은 괴물. 우리는 이곳에 들어온 후 놈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항상 겁에 질려 있었다.
누가 쓴 걸까?
읽다 말고 앞뒤를 훑어봤지만, 그저 가죽으로 감싸져 있을 뿐이다.
난 다시 아랫부분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놈이 올 때엔 항상 우레가 치는 듯한 소리가 난다.
-이곳의 명칭이 ‘우레 신의 신전’이라는 걸 생각하면 퍽 어울리는 놈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재앙과도 같은…….
* * *
재앙과도 같은 놈이다.
만약 우연히 찾은 이 방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전멸했을 거다.
벌써 반이 넘는 인원이 죽긴 했지만.
우르릉-
“윽.”
우레와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바로 ‘재앙’이 주변을 지나가고 있단 신호다.
재앙은 놈의 이름이다.
이 던전 어디에도 놈에 대한 언급이 없어 우리가 직접 지은 이름.
“아직 많이 남았어요?”
일기를 쓰다 말고 동료가 내게 질문했다.
난 시계를 슬쩍 보고서 답했다.
“약 한 시간쯤 더 기다리면 돼.”
“알겠어요.”
난 다시 고개를 숙여서 탐험 일지를 작성했다.
물론 아까 전 나눴던 대화까지 포함해서.
우리가 이 던전에 들어온 건 약 이 주 전이다.
우린 그때만 해도 희망에 차 있었다. 무려 일 년이 넘는 탐색 끝에 찾은 곳이기 때문이다.
기대심은 던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상을 받았다.
지하에 있는데도 대낮처럼 환하게 빛나는 통로.
바로 빛을 발하는 광석이 벽에 촘촘하게 박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광석만 놔두고서 나머지를 모조리 가방에 챙겼다.
차라리 그때 그것에 만족해서 돌아갔더라면 좋았을걸.
당연히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입구부터 이 정도이면 안에는 더 많은 보물이 숨어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처음엔 괜찮았지.’
의외로 던전엔 흔한 함정이나 가디언조차 없었다.
동료들은 신전이라더니 신이 참 착한 분인 거 같다며 웃고 떠들었다.
평온한 탐색과 이미 얻은 수익으로 인해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나는 갈수록 불안해졌었지만.’
빛을 내는 광석을 단순히 통로를 밝히는 용도로 쓰는 장소다.
안에는 그보다 더 귀한 게 있을 확률이 높고.
그런데 지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말이 안 되지.’
던전 탐색은 보통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찾기 쉽고 쉬운 던전이라면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털어갔을 테니까.
이렇게 철저하게 숨겨져 있고 귀물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는 방비 또한 철저하다는 뜻.
그리고 그런 불안한 예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맞았다.
‘백골이 가득한 방.’
우리는 두 갈래로 흩어져서 탐색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쪽에서 그런 방을 찾은 것이다.
심지어 백골들은 무언가에 손상을 입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에 물리거나, 맞아서 부서진 흔적들.
그것도 아주 커다란 무언가 말이다.
지금은 그게 재앙에게 당한 흔적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렇기에 우리는 던전을 바로 포기하지 못했다.
‘공양의 흔적일 수도 있잖아!’
‘공양이라니? 이건 누가 봐도 괴수에 의해 죽은 거야. 여기 어딘가에 놈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걸 어떻게 확신해? 그리고 여기서 물러나자고? 저 광석들을 다 팔아도 겨우 본전치기밖에 안 돼!’
동료의 눈에 가득했던 탐욕.
나를 포함해 몇 명은 돌아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가기로 주장한 사람끼리라도 돌아가려 했었다.
만약 입구가 막혀 있지 않았다면 그때 바깥으로 나갔을 텐데.
‘왔던 입구는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아마도 꽤 깊숙이 들어갔을 때 무너졌던 듯했다.
굉음 같은 건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우린 결국 낙담을 하며 되돌아와야 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엔 본래 본부로 정했던 곳에 아무도 없었다.
난 다시 탐험을 하러 들어갔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안쪽으로 향했다.
깊숙이 들어가 마지막으로 탐험했던 지점에 도착했을 때도 그들은 볼 수 없었다.
결국 더 안으로 향했다.
하지만 우리는 끝내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저 어느 한곳에서 ‘피와 살점’만을 발견했을 뿐.
그들은 우리가 입구로 돌아갔던 사이 이미 재앙에게 당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입구로 향하지 않았더라면?
우린 이미 죽었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죽을 위기를 참 많이도 넘겼네.’
결국, 아직까진 살아 있지만.
“이제 삼십 분 정도 남았죠?”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옆에서 동료가 다시 물어왔다.
난 시계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래. 일기에 이것도 적자.
-약 삼십 분 후. 우리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 얼마 전 놈을 죽일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