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몇 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까지 수면 밑에 있던 우리의 존재는 순식간에 널리 퍼졌다.
변경백의 영지를 함락시키고, 도시 벨루곤을 집어삼킨 나라.
최근엔 두 군데의 영지를 더 함락시키기까지 한 이들.
‘반발이 생각보다 적어.’
난 펜대를 굴리며 지도를 보았다.
이 정도쯤 되면 왕국 자체적으로 군대를 꾸리거나 휘하 영주들을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왕실의 태도는 미적지근했다.
정확히 말하면 극히 소심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난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어 앞에 앉은 이에게 말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
맞은편에서 나처럼 지도를 보고 있던 철우 형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이곳에선 단순히 병사가 많다고 유리한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더 이상하다는 거지. 멜리움에 완전히 인물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강력한 존재 한 명에 의해서 전장 전체가 좌지우지될 수도 있는 세계.
그 때문에 비록 우리가 수가 적다 하더라도 크게 얕보이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첫 상대로 변경백을 고른 것이 위험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우리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과시하려는 것도 있었고.
“있긴 있지.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안 돼.”
철우 형은 단호한 표정으로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멜리움은 세 개나 되는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난 그제야 철우 형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깨달았다.
“다른 나라를 걱정하는 거군.”
“그래.”
왕국의 대표적인 강자라 하면 다섯 명이 있다.
마경 쪽에 있었던 팔치온.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에 있는 베켈 공작.
공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바텔 백작.
그리고 왕실을 수호하는 두 기사.
이 중에서 베켈 공작과 바텔 백작은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방어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왕이 명령한다고 바로 들어먹을 지위도 아니다.
멜리움은 어디까지나 봉건사회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왕실 기사들을 움직인다?
“멜리움 왕 그 겁쟁이가 그럴 리가 없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철우 형도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래. 왕은 겁을 먹은 거다. 시험 삼아 두 영주를 보냈는데 완전히 개박살이 났으니 더 그렇겠지.”
베켈과 바텔 입장에선 굳이 공격하고 싶지도 않을 거다.
만만한 상대라면 모를까, 팔치온까지 박살이 났는데 굳이 건드려서 득을 볼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지금 상황에서 멜리움이 전력으로 우릴 치려 한다면 상당히 힘겨운 싸움이 됐을 텐데.
“그럼 지금은 계속 비슷한 작전으로 가도 되겠네.”
“응. 아직은 문제없지.”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시 흩어지자. 만나는 건 삼 일 후 그곳에서.”
“알았다.”
철우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다가 잠깐 멈추어 섰다.
“야.”
“응?”
철우 형은 우려가 섞인 얼굴로 말했다.
“조심해라. 네 일이 제일 위험한 거 알지?”
“웬 걱정이야. 무리 안 하고 돌아올게.”
“그래.”
철우 형이 완전히 밖으로 나간 후 나도 준비를 시작했다.
이번엔 나 혼자서 움직여야 한다.
* * *
철우가 이끄는 부대는 점령한 영지 근처의 마을들을 완전히 복속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마을이라곤 하나 그중에서는 작은 규모의 도시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일대를 다스리는 영주가 함락당했으니 자연스레 우리의 밑으로 들어오는 마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에겐 위에 누가 있든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철우의 부대는 규모도 작았다.
부대라기보다는 그저 별동대 정도의 규모라고 보는 게 알맞을 정도로.
반대로 크룩이 이끄는 부대는 규모가 아주 컸다.
“크라아아아아아!”
그 맡은 임무도 꽤 막중했는데, 호진이 일차적으로 정한 폴그룬의 영토 내에 남아 있는 멜리움의 귀족들 영지를 치는 것이었다.
당연히 호진이 정한 영토는 그저 임의로 정한 것일 뿐이기에 그런 영지는 아주 많았다.
말하자면 그저 목적을 설정해 놓은 것뿐이니까.
“모두 뇌신님의 말씀 아래 무릎을 꿇어라!”
거의 폴그룬 군대의 칠십 프로가 넘는 병력이 크룩의 휘하로 들어갔다.
가끔 강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크룩의 선에서 정리가 됐다.
가끔 힘들 때면 트렌이나 이렌의 힘까지 합쳐서 물리쳤고 말이다.
그들의 부대는 파죽지세로 영지들을 복속시키기 시작했다.
폴그룬의 덩치는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었다.
그들의 위용에 놀란 영주들이 전투하기도 전에 항복해 올 정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대.
케륵과 폴그룬의 나머지 병력들.
그리고 그의 동맹인 수인 왕국. 마틴의 군세. 그림자 요정들이 포함된 부대다.
“케르륵.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표면적으로 명령권자는 황금 갈기이다.
일국의 왕인 황금 갈기를 케륵의 밑으로 둘 수는 없었으니까.
“네 말이 맞다면 맞는 거겠지. 그리고 굳이 이렇게 일일이 물어보러 안 와도 된다.”
하지만 황금 갈기는 모든 권한과 책임을 케륵에게 떠넘겼다.
처음 부대를 구성할 때부터 그랬다.
우선 수인 왕국의 부대는 호진이 변경백의 영지를 칠 때 함께하지 않았다.
그들이 동맹으로서 맡은 역할은 ‘낚시’였으니까.
전쟁이 있기 며칠 전부터 수인 왕국은 계속해서 변경백의 영지를 건드렸다.
전면으로 쳐들어가진 않았지만, 영지를 오가는 마차를 보이는 족족 습격하고, 영지민들을 납치했다.
게다가 변경백이 도적의 소행이라고 생각해 보낸 기사단까지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 결과 호진이 영지를 습격했을 때엔 변경백의 전력이 상당히 깎여 있던 것이다.
‘고생했어.’
‘흠. 그래. 이제 난 돌아가겠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려는 황금 갈기에게 호진은 이렇게 말했다.
‘응? 아직 전쟁은 안 끝났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전쟁은 이제 시작이거든. 조금만 더 도와줘.’
호진의 이어지는 말에 황금 갈기는 어쩔 수 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무한정 돕기로 한 것은 아니다.
딱 두 달. 두 달간만 도와주기로 했다.
호진이 일전에 도와준 것도 있고, 동맹까지 맺은 상태이니까.
무엇보다 수인 왕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변경백을 무너트리기도 했고.
여하튼 이 부대가 맡은 역할은 바로 마틴과 그림자 요정의 본진이 있는 곳까지 길을 뚫는 것이다.
물론 그게 단순한 길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곳까지의 모든 영지를 격파하며 나아가고 있다.
최종적으로 폴그룬의 영토는 멜리움을 왼쪽 아래부터 오른쪽 옆까지 초승달 형태로 감싼 형상이다.
오른쪽의 끝에는 마틴과 그림자 요정의 영지가 있고, 오른쪽 바로 옆에는 수인 왕국이 위치해 있을 거다.
마경의 외곽도 폴그룬이 지배하고 있으니 그 모든 걸 합치면 멜리움보다 더 큰 규모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호진은 어찌 보면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영토를 넓혀 나갔다.
뇌신이 말한 그날이 오기 전에.
그리고 이 순간 호진은 그 세 부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 * *
덥다.
더럽게 덥다.
”저기요.“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갑옷을 두드렸다.
찌릿-. 하고 강한 전력이 올라왔지만, 난 고통을 참으며 여전히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이런 사막이랑 뇌신님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예?“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화기 저항 아티팩트까지 두르고 있었지만, 갑옷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사막에서 갑옷을 입고 있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난 지금 뇌신의 신전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신전을 들어가는 방법이라는 게 이 갑옷을 모두 착용한 상태여야 한다는 거다.
이 갑옷을 입고 정해진 지점으로 가면 무언가 반응이 있을 거라나.
”후우.“
드럽게 덥네.
난 꿈에서 본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지도를 한 번씩 꺼내 보며 계속해서 걸었다.
시간이 그리 여유로운 편이 아니었기에 쉬지도 못했다.
우웅-!
그래도 그렇게 고생한 게 아예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
거의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갈 즈음 갑옷에서 무언가 반응이 오기 시작한 거다.
웅-!
갑옷에서 이는 진동에 난 발을 계속 옮겼다. 그리고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진동이 약해지거나 강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몇 번 시행착오를 겪은 후 한 방향으로만 걸었고, 갑옷은 어느새 아주 살벌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찾았다!“
그리고 한참 후 난 기쁨의 함성을 내지를 수 있었다.
사막의 한가운데 어떤 지점이 푸른빛으로 빛나는 걸 발견한 것이다.
난 빠르게 그곳으로 다가갔다.
갑옷도 가까이 가자 똑같은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손을 갖다 대 봤다.
웅.
그러자 바로 반응이 왔다.
바닥 깊은 곳에서부터 낮은 울림이 느껴진 것이다.
키릭. 키리릭.
게다가 무언가가 맞물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난 살짝 뒤로 물러나 가만히 기다렸다.
쿵-. 쿵. 쿵.
계속해서 들려오던 소리는 어느새 커다란 소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아아아악-.
또한, 푸른색으로 빛나던 지점을 중심으로 모래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 많은 모래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고민할 때쯤 딱 그 움직임이 멎었다.
다시 가까이 가 보니 그곳에 딱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여기 들어가면 되는 거죠?“
난 갑옷을 두드리며 물었지만,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본 게 아니었기에 난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후웅-.
구멍은 생각보다 깊었다.
바람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난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들고서 바닥을 노려봤다.
훅-.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때 창을 강하게 붙잡으며 바람을 일으켰다.
내 반대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왔고, 빠르게 떨어지던 몸은 천천히 멈춰 섰다.
탁.
그리고 바닥에 발이 닿았다.
난 창을 완전히 검의 모양으로 바꾼 후 주변을 둘러봤다.
내려선 곳 일대는 어두웠으나 저 앞쪽에서 빛이 비치는 게 보였다.
그곳으로 걸어가 보니 벽에 빛을 내는 구슬이 박혀 있었다.
예전 던전에서 봤던 것과 같은 종류의 물건이었다.
‘나중에 나갈 때 챙겨 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길을 따라 쭉 걸어갔다.
이곳은 뇌신의 신전.
뇌신은 여기서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공짜라고는 하지 않았다.
본래 자신의 사도에게 시련을 내리기 위해서 만들어 둔 장소이고, 일련의 시험을 이겨 낸 후에야 얻을 수 있다고 했지.
‘힘들 거라고도 했고.’
난 늘어졌던 신경을 팽팽하게 당겼다.
이곳에 발을 디뎠으니 이미 시험이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 적이나 함정이 튀어나올지도 모르고.
쿠우웅-!
그런 생각이 정답이라는 듯 복도 전체를 울리는 듯한 소음이 일었다.
‘어디지?’
난 소리가 들려온 지점을 향해 우선 검을 들어 올렸다.
바로 내가 서 있는 복도의 왼쪽 벽에서였다.
‘벽.’
어쩐지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려고 하는데.
쿠웅!
다시 한번 굉음이 울리고.
콰아아아아앙-!
벽이 산산조각 나며 거대한 팔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