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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121화 (121/170)
  • 121화

    눈을 떴다.

    흐릿해진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고,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찮아?”

    옆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난 정신을 차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화린이구나.

    “응. 괜찮아.”

    웃으면서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도 탁했고, 생각보다 입꼬리를 올리는 것도 어색했다.

    마치 오랫동안 잠을 자기라도 한 것처럼.

    난 괜히 민망해서 시선을 돌려 다른 쪽을 보았다.

    그리고 바로 내 옆에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쪽은 누구?”

    움찔 놀라며 그에게 물었다.

    완전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저분은 치료사야.”

    대답은 화린에게서 먼저 들려왔다.

    난 의아한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치료사?”

    치료사라는 남자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상처가 제법 깊었습니다. 우선 겉으로 보이는 건 모두 치료했지만, 당분간은 약을 드셔야 할 겁니다.”

    난 남자의 말에 몸을 점검해 보았다.

    남자의 말대로 그리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겉보기로는 멀쩡한데, 움직일 때마다 몸이 욱신거린다.

    난 우선 인벤토리에서 바로 포션을 꺼내 마셨다.

    “으음.”

    속에서부터 짜르르한 느낌이 올라왔다.

    난 몇 번 몸을 까딱이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 저… 아직 휴식이 필요하십니다만.”

    “그래야 할 것 같긴 하네.”

    포션이 효능이 좋다 하더라도 만능은 아니다.

    예전 마경에서 트롤 부족과 전쟁을 했을 때도 후유증으로 한참 고생하지 않았나.

    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화린에게 말했다.

    “밖에 말해서 케륵이랑 크룩, 그리고 철우 형 좀 불러 줄래?”

    “알았어.”

    그녀는 바로 천막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에게 말을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말했던 이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모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케, 케륵.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들도 차례대로 나에게 질문을 했기에, 웃으면서 답해 주었다.

    그다음은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질문했다.

    자세히 설명해 준 건 케륵이었다.

    “그 빛기둥이 내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상대 병사들의 사기가 점점 저하되는 걸 느꼈습니다.”

    변경백의 영지 안에서 싸워서 그런지 우리 둘이 싸우는 걸 봤던 이들도 있었나 보다.

    사기가 저하된 건 변경백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겠지.

    “원래 저희 쪽이 우세했었고, 상대가 사기까지 떨어져 내려서 생각보다 더 빨리 전투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나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성의 한복판에 기절해 있는 나와, 그런 나를 지키고 있는 뇌조를 발견했다고 한다.

    “발견했을 때까지 뇌조가 호진 님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병사들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 모양이군요.”

    “다행이네.”

    하마터면 기절한 상태에서 어이없이 죽을 뻔했다.

    그 이후로도 전후 처리는 어떻게 했는지, 앞으로는 어떤 식으로 할 건지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를 나눴다.

    아직 내가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기에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기로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막에서 모두 자리를 비워 줬다.

    “음.”

    난 침대에 다시 누우며 눈을 감았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이 없었지만, 한 가지 기억만은 선명했다.

    ‘대비해야 한다.’

    뇌신의 말.

    그의 말마따나 난 이제 겨우 왕이 됐을 뿐이다.

    앞으로 있을 환란에서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 그 이상이 될 수도, 아니면 모든 기반을 잃을 수도 있다.

    스타트를 이미 끊은 만큼 남은 건 어떻게 잘 이어 가냐겠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어둠.’

    뇌신이 말했던 그 이름.

    그는 모든 마물의 뒤에 그 어둠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단지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존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뇌신을 비롯한 다른 용들에게 일어난 일도 그 어둠이라는 게 깊게 연관된 것 같고.

    “으으음.”

    난 한참 동안을 그에 대해 생각하며 끙끙 앓았다.

    * * *

    서부 전선.

    마물의 영역과 맞닿은 곳이자, 인류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한 왕국에 위치해 있지만, 실상은 여러 나라에서 공동관리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물들의 군세를 고작 작은 왕국 혼자서 막아 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왕국과 제국의 지원군들.

    각 교단의 사제들.

    의뢰를 받고 온 모험가들.

    그 외 각양각색의 사람들까지.

    이곳에선 하루에도 수십 번의 교전이 벌어졌고,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게다가 그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전선에서 물러나기까지 했으니 인력이 부족한 건 당연지사.

    그나마 보수를 높게 설정해 놨기에 간신히 현상 유지라도 할 수 있었다.

    “으으.”

    “팔… 팔이 너무 아파요.”

    바로 몇 시간 전에도 마물들이 대규모로 습격을 해 왔었다.

    그 결과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한쪽에서는 시체들을 모아 불태우고 있었고, 부상자들은 뒤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나마 이번엔 마물들이 얼마간 싸우다가 물러났기에 상황이 괜찮은 편이었다.

    만약 전투가 길게 이어졌다면 현재 치료를 받는 부상자의 대다수는 이미 사망을 했을 거다.

    한창 전투 중일 때엔 부상자들을 신경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끄으읍!”

    한창 치료가 진행 중인 한 천막.

    그곳에선 어린 얼굴의 사제가 바삐 돌아다니며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사제는 어찌나 신성력을 퍼부었는지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계속해서 신성력을 썼다간 그 자신도 쓰러져 환자가 될 판이였다.

    “좀 쉬는 게 어때?”

    가끔 다른 사제들이 와서 그에게 휴식을 권유했지만, 사제는 그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부상자들을 돌봤다.

    종래엔 신성력이 한 방울도 남김없이 바닥이 났지만, 붕대를 감고 상처를 닦아 내는 일이라도 했다.

    그야말로 다른 사제들의 귀감이 될 만한 사제였다.

    그런 사제가 있는 천막에 한쪽 눈을 잃은 부상자가 실려 온 건 새벽녘이었다.

    사제는 자연스럽게 그 환자에게 다가갔다.

    “으으… 사제님.”

    그 환자는 앓는 소리를 내며 사제의 옷을 붙들었다.

    핏물이 그의 옷을 적셨지만, 사제는 아무렇지 않아 하며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환자의 말에 사제가 의문 어린 표정을 짓자, 환자는 손짓으로 사제를 가까이 불렀다.

    그리고 사제가 가까이 고개를 숙였을 때.

    쩌억-

    환자의 머리통이 반으로 갈라졌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자의로.

    마치 머리 전체가 하나의 입인 것처럼 보였다.

    콰가가각!

    갈라졌던 환자의 머리통은 빠른 속도로 사제의 머리를 씹어 삼키려 했다.

    하지만 사제는 그 짧은 순간에도 방어막을 쓰며 뒤로 물러났다.

    “쯧.”

    반으로 갈라졌던 환자의 머리는 다시 붙으며 혀를 차는 소리를 내었다.

    “사제 놈의 피가 제일 좋은데.”

    환자, 아니 이제는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러운 그는 그런 말을 하며 손을 양쪽으로 뻗었다.

    처음과 달리 그의 얼굴에서 고통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촤아아악-

    게다가 그가 뻗은 양팔에서는 몇 줄기의 촉수가 뻗어 나왔다.

    그것들은 병상에 기절해 있는 환자들에게로 뻗어 나갔다.

    뒤늦게 그 모습을 본 환자들은 깜짝 놀랐지만, 대부분 거동이 불편한 이들이기에 쉽게 몸을 피하지도 못했다.

    촉수는 부상자들의 몸 곳곳에 달라붙더니 꿀렁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물! 마물이 나타났다!”

    그나마 그 모습에 빠르게 반응을 한 건 사제였다.

    사제의 커다란 목소리에 곧바로 주변에 있는 병사와 사제들이 뛰어 들어왔다.

    “키키키. 이미 늦었는걸.”

    하지만 그땐 이미 마물의 촉수에 닿은 이들이 미라와 같은 모습으로 바뀐 후였다.

    “촉수 거머리!”

    가장 먼저 달려온 다른 사제가 커다란 목소리로 마물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까지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마물은 몸을 풀더니 곧 뒤집어쓴 가죽을 찢어발겼다.

    “이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다니. 나는 운이 참 좋아.”

    마치 수십 개의 촉수 다발을 뭉쳐 놓은 모양새였다.

    더욱 기괴한 건 그 가운데에 눈과 코, 입 같은 것들이 달려 있다는 것.

    촉수 다발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촉수를 쏘아 보냈다.

    “모두 촉수가 몸에 안 닿게 막아! 곧 있으면 기사분들이 올 거다!”

    사제 한 명이 나서서 지휘했고, 병사들은 공포에 떨면서도 방패를 들어 촉수를 막아 냈다.

    “끄으아아악!”

    하지만 결국 한두 명씩 피해자는 생겨났다.

    병사들은 촉수가 몸에 닿는 순간 무언가가 빨려 나가기 시작했고, 미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럴수록 촉수 거머리의 몸은 점점 커졌다.

    “키키키키키!”

    그렇게 차례차례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시간을 번 보람이 있었는지 잠시 후 어떤 무리가 뛰어오기 시작했다.

    “여기! 여깁니다!”

    바로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은 병사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위를 보이며 촉수 거머리를 몰아붙였다.

    그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촉수가 하나씩 잘려 나갔고, 촉수 거머리의 공격 속도도 현저히 느려졌다.

    “죽어라!”

    푸욱!

    결국, 촉수 거머리는 한 기사의 검에 의해 생명을 잃었다.

    “끄으윽.”

    거머리는 듣기 싫은 괴성을 내지르다가 돌연 죽기 직전에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난 이제 겨우 시작일 뿐… 오늘 밤은 아주 재밌을 거다.”

    아주 불길한 경고였다.

    그리고 그날 밤 그 말은 사실로 드러났다.

    서부 전선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연쇄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서부 전선.

    나아가 온 대륙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

    “후우.”

    난 쌓인 서류 더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아직 변경백의 영지에 머물러 있다.

    건물은 전투 당시 대부분이 무너져서 현재는 내 아이템인 텐트를 사용하고 있다.

    “이곳은 결국 버려야겠네.”

    난 서류 더미를 한참을 노려보다가 중얼거렸다.

    최근에 철우 형 등을 비롯해 인간들을 상당수 영입하면서 보고 체계를 정비했다.

    요새는 서류로 대부분의 보고를 받고 있는데…….

    본래는 이곳 변경백의 영지도 써먹을 생각이었다.

    위치도 나쁘지 않거니와 성벽도 튼튼하고, 건물들도 잘 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다 부숴 먹었다는 거지만.’

    그런데 정작 전쟁이 끝나고 나니 남은 건 황량한 폐허뿐.

    성벽을 재건해야 한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전략상 부수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변경백인 팔치온이 직접 자신의 영지를 다 부숴 버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보고에 의하면 인간 측 민간인 사상자의 대다수도 팔치온의 공격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아쉽긴 하지만.’

    난 입맛을 다시며 그 서류에 사인했다.

    나중에 여유가 생긴다면 이곳도 개발해야지.

    난 다른 안건들도 모두 처리하고서 다 처리한 서류를 한쪽으로 치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멜리움 왕국의 최외각.

    이곳을 기점으로 이제 전쟁을 계속 이어 갈 것이다.

    우선 목표는 한 달 내에 최소 세 곳 이상을 함락하는 것.

    난 목표를 되짚으며 서류 더미의 맨 위에 있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곳엔 셋으로 나눈 부대 운용표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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