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120화 (120/170)

120화

“저게요?”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꾸물거리는 액체는 열심히 남자의 몸을 타고 오르더니 곧 머리 위에 안착했다.

“저때는 저것의 존재조차 몰랐지. 심지어 많은 시간이 지난 이후로도 그랬었다.”

그는 회한 어린 표정으로 다른 이들이 사라지는 걸 보다가 나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저 모든 게 끝났을 거라 생각했을 뿐.”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손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럼 다음 장면을 보지.”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몇 번 눈을 깜빡한 사이에 다시 시야가 돌아왔다.

이번엔 웬 오두막집이었다.

난 집의 중앙에 있는 탁자를 보고난 후에야 이곳이 어딘지를 깨달았다.

‘기억 속에서 봤던 곳이다.’

“여기도 봤었지?”

그리고 곧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뇌신이 벽에 기대서서 탁자를 가리켰다.

“곧 올 거다. 잘 봐 둬라.”

그의 말마따나 곧 오두막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바로 초록 머리의 여자였다.

“광룡?”

난 무심코 입을 열었다.

대답은 여자가 아니라 뇌신에게서 돌아왔다.

“본래 이름은 풍룡이다. 만약 진짜 그녀 앞에서 그 이름으로 부른다면 죽을지도 모르니 조심해라.”

난 그 말에 침을 꿀꺽 삼키겨 그녀를 보았다.

하긴 그녀도 용이니 신이니 하는 이들의 일원.

약할 리가 없지.

끼익-

곧 다시 문이 열렸다.

“어, 먼저 와 있었네?”

“방금 왔어.”

“다른 애들은?”

“나도 몰라. 연락도 안 받고.”

둘은 곧 마주 앉아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말없이 허공을 보았다.

정적이 깨진 건 다시 한번 문이 열리고 검은 머리의 남자가 들어왔을 때였다.

“흠, 오늘은 셋이 끝인가?”

“그러게.”

검은 머리의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여상한 말투로 말했다.

지룡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하고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요즘 들어 더 얼굴 보기가 힘든 거 같다. 맨날 붙어 다녔었는데.”

“사내놈들끼리 자주 봐서 뭐 한다고.”

검은 머리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흑염룡아, 여기 누나도 있거든?”

그리고 광룡, 아니 풍룡이 그 말을 받았다.

흑염룡이라 불린 검은 머리의 남자는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좀 그런 개 같은 별명으로 부르지 말지?”

“나한텐 광룡이라고 별명 붙인 놈이 할 말이냐?”

“그건 니가 진짜 미친…….”

둘은 말을 주고받다가 풍룡이 얼굴을 일그러트린 후에야 농담 같은 대화를 끝냈다.

다시 대화를 연 건 지룡이었다.

“됐고. 오늘 무슨 일로 모인지는 다 알고 있지?”

“그래. 모를 수가 없지.”

풍룡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답했다. 그녀는 계속 이어서 말했다.

“도대체 그림자가 어떻게 기어들어 온 거지? 분명히 그놈은 중간에 끝났었잖아?”

“완전히 끝났다고는 할 수 없지. 놈이 죽는 걸 직접 본 사람이 없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난 그들이 말한 그림자와 ‘그놈’이라는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문득 떠오른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지룡은 저 흑룡이라는 놈한테 죽었지. 그런데…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무언가가 개입되어 있었어.’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흑룡의 목덜미 부근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이내 그것은 꾸물거리며 기어 나오더니 남자의 머리를 휘감았다.

내내 조용하던 흑룡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이미 완전히 그림자가 자리 잡은 이상 평화롭게 끝내긴 글렀어.”

다른 이들은 검은색의 액체를 전혀 보지 못하는 듯 그의 말을 받아서 대화를 계속 이어 가고 있었다.

난 슬쩍 뇌신을 돌아보았다.

“저것은 계속 흑룡의 몸에 숨어 있었어. ‘우리’의 영역으로 놈이 숨어들어 온 것도 그 때문이지.”

“그놈이란 건 도대체 누굽니까.”

“그건 이걸 다 보고 나서 말해 주지. 잘 봐라.”

그는 턱짓으로 지룡을 가리켰다.

“여기부턴 너도 봤었을 테니까. 물론 그때 본 거랑은 사뭇 다르겠지만.”

난 그의 말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지룡을 보았다.

지룡은 막 신경질적인 얼굴로 입을 열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돼.”

“그럼 어떻게 하려고? 이대로 있자는 거야?”

“뇌룡의 영역에 그림자가 있어! 빨리 처리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가 직접 해결할 수 있다고 했잖아!”

지룡과 풍룡은 언성을 높이며 대화하고 있었다.

난 그 대화를 듣고서야 생각났다.

이 장면이 지룡의 여의주를 따라 도착한 신전에서 봤던 것이란 걸.

하지만 뇌신의 말마따나 그날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스으으-

흑룡의 목에서 튀어나온 액체는 그의 머리를 지나 전신을 빼곡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 장면이 너무도 기괴해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참 대화가 이어지고.

풍룡이 어느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툭 말을 내뱉었다.

“겁쟁이 새끼들.”

쾅!

그녀는 신경질을 부리듯 문을 걷어차고서 그대로 나갔다.

잠시 조용해졌다가 다시 지룡과 흑룡이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곧 내가 봤던 장면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했다.

흑룡의 전신에 자리한 액체가 크게 요동치더니 그의 입이 열렸다.

“뭐, 됐어. 앞으로 어떻게 할지나 생각해 보자고.”

그의 시선이 풍룡이 앉아 있던 자리로 향했다.

그곳엔 자그마한 거울이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치는 그의 모습엔 액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흑룡의 얼굴만 비칠 뿐.

“그림자를 몰아내야 할 거 아니야?”

여기까지가 내가 봤던 장면이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둘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흑룡이 지룡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생각이 있어.”

“뭐?”

내내 무표정하던 흑룡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마치 인형처럼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난 그가 ‘비통’한 표정을 하려 했다는 걸 알아챘다.

“물론 뇌룡의 심정은 이해돼. 그래도 이대로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어.”

지룡은 흑룡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흑룡의 말이 이어졌다.

“너와 너의 군세. 그리고 나. 다 같이 뇌룡의 영역을 치자. 그림자 놈의 씨를 완전히 말려 버리자고.”

“그래도…….”

내내 과격한 언사를 내뱉었던 지룡이지만, 흑룡의 제안에는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흑룡의 설득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대화의 마무리는 결국 지룡이 승낙하는 것으로 끝났다.

따악-

그리고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시야가 어두워졌다.

* * *

어두운 공간.

다시 돌아온 걸 깨달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그놈이라는 건 도대체 누굽니까?”

뇌신은 어느새 만들어 낸 건지 웬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내 말을 돌려 가며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던 그였지만, 그는 이번엔 바로 내 말에 대답했다.

“모든 마물의 주인. 온갖 부정하고 어두운 것들의 신.”

그는 양손을 쫙 펴며 말했다.

“어둠. 그게 그의 이름이다.”

“…이름 한번 거창하네요.”

“거창하다라. 그건 제법 새로운 관점인걸.”

그는 피식 웃더니 왼쪽으로 손을 뻗었다.

잠시 허공이 일렁거리더니 우리 옆으로 무언가 영상이 재생됐다.

“이걸 보고서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곳에 비치는 건 바로 마물들의 군세였다.

마물들은 어딘가로 달리고 있었다.

그 엄청난 광경에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곧 마물들의 앞으로 인간들이 나타났다.

“막아라! 막아!”

처음엔 바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곳에 설치된 몇몇 구조물들을 보자 무언가가 생각났다.

“서부 전선?”

“그래, 인간들은 그런 이름으로 부르더군.”

난 영상을 다시 보았다.

척 보기에도 전선의 상황은 좋지 않아 보였다.

아니, 아주 나빴다.

“마물들의 기세는 점점 강해지고 있어. 이대로라면 서부 전선이 언젠간 뚫릴지도 모르지.”

“예…….”

게임에 비추어 보면 아마도 지금 시점에서 길어야 몇 달 후일 거다.

서부 전선이 무너지고 온 대륙으로 마물들의 영역이 확장된 것이.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한 번 더 손을 휘둘렀고, 그러자 다른 영상들이 나타났다.

이 대륙 곳곳의 국가들.

그리고 그 근처에 숨어 있는 마물들의 모습.

그중엔 내가 아는 놈들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놈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서부 전선이 뚫리는 순간 어둠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 그때가 되면 마물의 힘을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겠지.”

뇌신은 그 말과 함께 영상들을 모두 없앴다.

그는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힘을 모아라. 무엇을 하든 상관없으니. 세력을 더 확장해.”

그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서부 전선이 뚫리기 전까지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할 거다.”

따악-

손가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시야가 어두워졌다.

* * *

넓은 공터에 천막이 쳐져 있다.

이곳은 변경백의 영지.

이틀 전 있었던 전쟁의 여파로 성내의 대부분 건물이 반파되었다.

그 때문에 폴그룬의 군세는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임시 천막에서 머물러야 했다.

“케륵. 상태는 어떠시지?”

“똑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독 화려한 천막이 있다. 그리고 케륵은 천막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알겠다. 케르르.”

케륵은 어두운 표정으로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전쟁에서 이겼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표정이었다.

바로 전쟁에서 호진이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천막의 안.

그곳에는 몇 사람이 서 있었다.

“아직 회복이 안 된 거야?”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모두 치료했습니다. 다만 언제 일어날지는 확답할 수 없습니다.”

답답한 얼굴로 물어보는 이는 철우였고, 대답한 이는 수더분한 인상의 인간 남성이었다.

바로 제크가 직접 벨루곤에 연락을 넣어 데려온 치료사였다.

나름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호진이 일어나는 건 그의 능력과 별개의 일이었다.

“후우.”

철우는 뭐라 더 물어보려다가 그게 의미 없다는 걸 깨닫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린아, 호진이 좀 잘 보고 있어.”

“응.”

그는 곧 어두운 표정으로 화린을 향해 말했다.

곧 철우가 밖으로 나가고 치료사와 화린만이 천막에 남았다.

호진의 상태를 보고 싶은 이들은 많았지만, 안정을 위해 몇몇 이들만이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난 지금은 모두 전쟁의 뒤처리를 해야 했기에 잠깐씩 들를 뿐.

유일하게 별로 할 일이 없는 화린만에 계속 천막에 남아 호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호진을 빤히 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힘들 거 같으면 도와달라고 하지…….”

원망과 걱정이 서린 말투였다.

호진은 혼자서 적장과 싸우다가 큰 상처를 입었다.

마지막 순간 그녀도 찬란하게 빛나던 기둥을 보았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천막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할 수 있는 건 없고.

그저 호진이 깨어나기를 기다릴 뿐.

시간은 계속 흘러 곧 밤이 되었고.

치료사와 화린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화아악-

그때였다. 호진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으음?”

눈꺼풀을 파고드는 빛에 눈을 뜬 화린은 곧 호진의 모습을 확인했다.

“저기요!

그녀는 깜짝 놀라며 바로 치료사를 깨웠다.

바로 잠에서 깬 치료사도 곧 눈을 반짝이면서 호진을 보았다.

우우우우웅-!

호진의 몸 주위로 미증유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가 다시 그의 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호진이 눈을 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