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수인 왕국에서 돌아온 후, 나는 그곳에서 받은 것들과 모여 있던 무기를 모두 흡수시켰다.
그리고 지금까지 흡수를 해도 단순히 무기 스펙을 상승시키는데 그쳤던 흡수 스킬이 변화를 한 것이다.
후욱!
내 검이 그의 가슴팍을 꿰뚫기 직전, 불투명한 막이 나타난다.
검이 옆으로 쭉 미끄러진다.
머리 근처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메이스를 피하며 난 바람을 강하게 일으켰다.
휘이이-!
그의 몸이 비틀거린다.
난 그 틈을 타 발을 가볍게 움직였다.
‘풍월보.’
발이 불규칙한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난 순식간에 그의 뒤를 점했다.
바로 휘두른 검이 그의 등을 파고들었다.
푸욱!
깊게 들어가기 전 그가 거칠게 몸을 털며 몸을 숙였다.
콰악!
하지만 그의 몸에서 솟구쳐 나온 분신은 반대로 메이스를 위로 올려쳤다.
‘진짜 성가시네.’
피할 수도 있었지만, 난 오히려 검을 꽉 쥔 상태에서 떠올렸다.
‘건틀릿.’
검이 환하게 빛나더니 내 손에 엉겨 붙는다.
오우거 소울 건틀릿.
던전에서 얻었던 아이템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도 무기 취급을 받을지는 몰랐지만.’
난 아주 찰나의 순간 건틀릿으로 강하게 기운을 밀어 넣으며 메이스로 손을 뻗었다.
콰가가각!
불쾌한 소음과 함께 메이스가 우뚝 멈췄다.
내내 무표정이던 팔치온의 얼굴이 살풋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파지직!
난 그 상태에서 바로 전격을 방출했다.
그는 메이스에 전격이 뻗어 오는 것을 보며 순식간에 뒤로 거리를 벌렸다.
물론 그대로 놔줄 생각은 없었다. 난 그대로 따라가며 주먹을 휘둘렀다.
팔치온은 앞에 방어막을 만들었지만.
콰아앙-!
거대한 힘이 깃든 건틀릿은 그대로 막을 깨부수며 뻗어 나갔다.
놈은 이를 악물더니 분신을 앞으로 쏘아 보냈다.
내 주먹은 그대로 분신의 가슴팍을 우그러트렸다.
콰직!
“끄아아아악!”
그러자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상처를 입은 건 분신인데, 팔치온도 동시에 비명을 지른 것이다.
분신은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졌다.
팔치온의 본신에 똑같은 상처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고통은 느끼는 건가?’
어쩐지.
분신을 자주 쓰지 않고, 되도록 빠르게 회수하던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그럼 나야 좋지.’
콰르릉-!
난 다시 한 번 앞으로 달려갔다.
‘뇌룡 창.’
창으로 바꾸며 찌르기.
팔치온은 옆으로 몸을 돌리며 그대로 메이스를 휘두른다.
휙!
하지만 정작 위협은 뒤에서 닥쳐 왔다.
난 그대로 몸을 푹 숙이며 건틀릿으로 바꾸었다.
후우웅!
머리 바로 위로 불투명한 메이스가 지나간다.
다시 몸을 일으켜 손을 뻗었다.
콰직!
손에 잡힌 메이스가 우그러진다.
내가 쭉 잡아당기자, 팔치온은 인상을 쓰며 메이스를 그대로 놓아 버렸다.
쾅! 쾅! 쾅!
이어서 그가 분신을 앞으로 쏘아 냈는데 난 그대로 그 몸을 우그러트렸다.
“끄으읍.”
팔치온은 그 고통을 느끼는지 눈에 실핏줄이 돋아 있었지만, 연신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
‘도주?’
난 인상을 쓰며 그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는 아예 몸 주위로 하얀색의 막을 두르더니 본격적으로 도주를 했다.
콰르르릉-!
나 또한 뇌룡 질주를 써 앞으로 쫓아간다.
쿠웅!
그런데 이번엔 또 희한한 방법을 써 내 앞을 가로막았다.
팔치온이 달려가던 도중 한 석상을 만지자 하얀 빛이 뿜어지더니 똑같은 모양의 석상이 내 앞으로 떨어진 것이다.
쿵! 쿵! 쿵!
놈은 연이어 석상을 떨어트리며 내 경로를 방해하더니 중간에 휙 멈춰 섰다.
나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투웅!
그리고 난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를 쫓아 도착한 성 내부의 한 강당.
그곳에서 그가 커다란 워 해머를 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뭘 또 무기를 바꾸고 그래? 난 꽁지 빠져라 도망가는 줄 알았네.”
“그게 무기를 부숴 놓고 할 말이냐?”
그는 양손으로 해머를 한 바퀴 돌렸다.
무게가 꽤 나가 보이는데도 다루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좀 조심히 싸우자고.”
난 다시 달려들기 전 그에게 말했다.
“내가 곧 쓸 곳이니까. 다시 짓기 귀찮거든.”
강당이 제법 괜찮아 보이거든.
“허튼소리 하지 말고 덤벼라. 이곳이 네 무덤이 될 테니.”
그는 그리 말하더니 해머를 높이 들어 올렸다.
쿠우우우우우웅!
그리고 해머가 땅에 닿는 순간 바닥이 쫙 갈라지기 시작했다.
타앗!
난 그대로 몸을 띄우며 창을 내질렀다.
“뇌룡섬!”
거칠고 푸른빛이 그를 향해서 일직선으로 쏘아진다.
쿠웅!
그는 기운을 두른 망치로 그것을 내리찍었다.
성벽도 무너트릴 기운이 담긴 기술이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나는 멜리움의 변경백.”
그가 돌연 중얼거렸다.
난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달려가 창을 찌르고, 검으로 베고, 건틀렛을 휘둘렀다.
쾅!
그는 커다란 해머를 기술 좋게 휘두르며 내 공격을 연신 막아 냈고, 말하는 것 또한 멈추지 않았다.
“타 왕국과 마물, 그리고 몬스터들이 침입하는 걸 막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나는 어느 순간부터 거의 근접거리에서 계속 검을 휘둘렀다.
콰앙-!
가끔씩 그가 해머를 휘둘러 거리를 벌려야 하긴 했지만,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고작 무기를 바꾸려고 이곳으로 왔다고?’
위화감의 정체.
그의 무기가 부러지긴 했지만, 다른 무기를 얻으려 했다면 다른 곳도 있었을 거다.
그렇다는 건 저 워 해머에 특이한 능력이 있거나, 이 공간에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것인데.
“후우.”
난 천천히 숨을 내쉬며 무언가를 준비했다.
아직 어떤 조짐이 보이진 않지만, 언제라도 적절한 대응을 하기 위해서.
키잉-
나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푸른 기운.
팔치온은 인상을 찡그리더니 해머를 크게 휘둘러서 거리를 벌렸다.
“눈치는 빠르군.”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도 백색의 기운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변경 백이다. 하지만.”
쿠궁.
보스 전 2페이즈. 아니, 3페이즈 인가.
피부를 자극하는 날카로운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바하툴 님의 충성스러운 망치이다.”
아.
왜 안 좋은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 걸까.
팔치온이 망치를 드는 게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뇌룡 질주.’
다리 끝으로 기운을 모으고, 풍월검을 들어 전신을 바람으로 감쌌다.
후우우우욱-!
길이고 뭐고 상관없다.
난 일직선으로 벽을 뚫고 나가 최대한 빠르게 건물 밖을 향했다.
후우웅-!
순간적으로 나아가는 방향과 반대로 강렬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난 이를 악물면서 더욱 속도를 높였다.
1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웅-
빨려 들어가던 공기가 일순간 멈추고.
작은. 아주 작은 진동 소리가 들렸다.
바하툴.
오롯이 인간을 위한 신.
그를 대표하는 건 ‘망치’ 그리고 ‘모루’.
대장장이와 기사들이 주로 믿는 신이며, 플레이어들이 그의 신도들을 주로 부르던 별명은.
‘망치 살인마.’
휘이이이이이-!
난 마침내 건물을 빠져나왔다.
평범한 강당인 줄 알았던 그 건물은 아마 신전이었을 거다.
그리고 놈이 들고 있던 워 해머는 신전에 모셔 뒀던 신물일 테고.
난 하늘을 보았다.
바람이 분다.
아주 세찬 바람이.
그리고 저 하늘 끝에서는 새하얀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저 정도면 최소한 대사제 이상인데.
쿠웅!
곧 하얗게 빛나는 망치가 나와 팔치온이 있던 건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아앙-!
건물이 무너지고.
그곳에서 빛의 기둥이 솟아오른다.
* * *
“케르르. 라이더 조! 좌측 성벽으로 달려!”
“우-!”
케륵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는 이번엔 아예 일선에서 벗어나 지휘를 하는 임무를 맡았다.
철우는 별동대를 따로 이끌고 마법사들을 상대하러 갔다.
그렇기에 케륵은 주술사들을 각 병력 휘하로 나눠 그들을 보조하게 했다.
“크루라아아아아-!”
그리고 크룩은 아까 전 마법사들이 소환해 낸 불의 거인과 겨루고 있었다.
콰앙-!
둘이 움직일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린다.
궁수 조는 일제 시위를 멈추고서 각 전사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고.
전선은 확실하게 폴그룬이 우위였다.
초인의 영역에 도달한 팔치온이 호진을 상대하느라 전선에서 이탈하기도 했거니와, 이번에 폴그룬의 병사들이 새로 얻은 능력 때문이었다.
파지지지직-!
바로 전격을 방출하는 능력.
호진이 전격과 관련된 스킬 중 가장 처음 얻었던 스킬이기도 하다.
“크아아악!”
인간 병사들은 폴그룬의 병사들과 검을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했다.
검과 검을 통해서 전격이 흘러들어 왔기 때문.
병사들 중에서도 숙련된 병사들이나, 기사들은 전격을 능히 감당할 만한 힘이 있었으나, 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
“저것들은 진정 괴물들인가.”
아직 점령당하지 않은 지점에서 활을 쏴 대던 인간 궁수는 질린 얼굴로 그리 말했다.
일개 병사들부터 차이가 나기 시작하니, 전선은 걷잡을 수 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우우워어어어어.
그리고 변경백 측의 병사들에게는 더욱 안 좋은 소식이 이어졌다.
크룩이 마침내 마법사들이 소환해 낸 거인을 쓰러트린 것이다.
“크루아아아아아!”
크룩이 자랑스러운 듯이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는 자유로워진 몸으로 바로 성벽으로 달려가 몸통 박치기를 했다.
언덕에 미처 진입하지 못한 병사들은 바로 성벽의 파편을 밟고 건너가기 시작했다.
“이 괴물들아!”
하지만 변경백 측에도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우우우웅-!
성벽 너머에서 갑자기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는 건 온몸에서 강렬한 기운을 줄기줄기 내뿜는 여자였다.
“너희들은 내가 상대해 주마!”
바로 변경백 영지의 선임 마법사였다.
그녀는 성벽 내부에서도 사람들이 피신해 있는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매우 불리한 것을 보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어차피 패배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이건 인간들끼리의 전쟁이 아니야.’
그녀는 패배할 시엔 괴물들이 일반 시민들을 모두 학살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결사 항전할 생각을 결심한 것이다.
“파이어 월!”
마법사는 빠르게 주문을 시전하며 우선 성벽 근처로 화염 장벽을 둘렀다.
거칠 것 없이 나아가던 폴그룬 군도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염 앞에선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전장은 시시각각 바뀌며 혼란을 자아내고 있었다.
호진과 팔치온 둘이 따로 승부를 겨루고 있다는 것도 잊을 만큼.
화악-!
그렇기에 성의 중심에서 하얀색의 빛기둥이 솟구칠 때 모두 놀라서 그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빛으로 된 인간과 호진이 공중에 뜬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