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앞으로 움직인다.
반대로 나는 그 자리에 멈추어서서 창을 꺼내 들었다.
우선 병력은 우리 측 궁수들의 사정거리가 닿을 지점까지 접근했다. 전방에선 방패병들이 방패를 높이 쳐든다.
하지만 아직 적측에서의 반응은 없다.
이 또한 현실과 다른 점이다.
이곳은 마법과 초인이 실존하는 세상이고.
저들도 그걸 경계하고서 기다리고 있다.
‘뇌룡창 제 삼식.’
그리고 기다리고 있다면 그 기대에 부응해 주어야겠지.
난 활시위를 당기듯 몸을 팽팽하게 당겼다.
‘투(投)!’
창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성벽 위로 날아간다.
콰아아아아앙-!
창이 어느 지점에 도달한 순간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강한 힘을 담고 날아가던 창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막혀 있는 게 보였다.
창 주변으로 금이 가 있는 것이 보였지만, 한 번에 뚫지는 못한 것이다.
게다가 다시 복구될 기미가 보였다.
이전 요새에서도 보았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결계다.
다른 점이라면 그때보다 훨씬 단단하고, 많은 마법사가 들러붙어 있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나도 그때의 내가 아니다.
‘상점 창 개방. 권능 사용.’
미리 준비해 둔 권능의 일부를 주르륵 지정한 후 바로 사용했다.
콰르르르르르릉-!
요새 위로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그곳에서 뇌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앙!
쾅!
성을 감싼 결계 전체에 벼락이 쏟아졌다.
난 어느새 되돌아온 뇌룡창을 받아 내며 결계를 지켜보았다.
슬금슬금 사라지던 금이 전보다 더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내 결계에 마치 거미줄처럼 금들이 쫙 퍼졌는데, 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발사 준비!”
저 앞에서 누군가 명령을 내리는 게 들렸다.
타이밍 잘 맞췄구만.
난 슥 병력들을 확인하고서 성벽 쪽으로 내달렸다.
지휘는 휘하 간부들에게 맡겨 놨으니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뇌룡 질주!’
파지직-!
발끝에서 전격이 퍼져 나가며 몸이 훅 떠오른다.
자세를 바꾸며 빠른 속도로 쏘아지는 힘을 그대로 실어서 창을 쭉 내질렀다.
후욱-
창이 푸른빛에 닿는 순간 무언가를 꿰뚫는 느낌이 났고.
‘쇼크웨이브!’
난 그대로 스킬을 발동시켰다.
파지지지지직!
갈라졌던 틈 사이를 전격이 날카롭게 파고든다.
아직도 하늘 위에서 쏟아지고 있는 번개들은 나의 힘을 돋워 줄 뿐.
“크으으아!”
난 앞에서 들리는 괴성에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마법사들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연신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이거 왠지 데자뷔가 느껴지는걸.
난 그들을 향해 입 모양으로 말해 주었다.
‘조금만 기다려.’
그들은 나를 마치 괴물 보듯 쳐다보았다.
난 그럴수록 창에 기운을 쏟아부었다.
쩌적-!
그리고 드디어 반응이 왔다.
파열음과 함께 결계의 틈이 선명하게 갈라지더니, 곧 강렬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퍼어엉-!
마치 유리 조각 수천, 수만 개가 흩날리는 것 같다.
동시에 내 몸도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몸을 받치고 있던 결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둥둥둥둥둥-!
난 뒤에서 들리는 북소리를 배경음 삼아 다시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뇌조야.’
키루루루루루-!
목덜미에서 뇌조가 튀어나와 그런 내 몸을 받쳐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높은 고도에 오르자 아래로 화살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양쪽 다 화살을 발사하는 것이다.
두- 웅! 둥! 둥!
이번엔 다른 느낌의 북소리.
쿵! 쿠웅-!
전열의 최후방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나온다.
발소리만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이.
바로 탈리온이었다.
그는 한 손에는 구슬을 들고, 다른 손에는 망치를 들고 있었다.
후우우웅!
그가 무어라 중얼거리자 구슬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고, 그는 망치를 든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솟아라!”
망치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콰앙!
우리는 공성 병기 같은 걸 전혀 들고 오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드드드드-!
성벽과 가까운 곳에서 강렬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저 오브가 신의 힘 일부가 담긴 것이라곤 하나 만능은 아니다.
즉, 이미 있는 구조물을 오브의 힘으로 무너트리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새로 만드는 것이라면?
드드드드드드드드-!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이 성벽의 앞에 완만한 경사면을 설치하는 것이라고 해도.
곧 모든 병력 돌진이라는 신호를 담은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케루루루루루!”
“크루루루룩!”
가장 먼저 뛰어가기 시작한 것은 울프라이더들.
우우우우-!
그들은 맹렬한 속도로 경사면을 타고 올랐다.
과연 놈들의 대응은 어떨까.
난 허공에 올라 어떤 대응을 하는지를 지켜봤다.
나도 이번엔 마음껏 날뛸 수는 없다.
이 성의 최강자라 생각하는 변경백이 아까 전 활을 쏘고서 다시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변경백이 본진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전쟁이 계속 이어질 예정이기에 난 병력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후우우우우웅-!
그때 성벽 위쪽. 아까 전 마법사들이 있는 곳에서 강렬한 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크오오오오-!
그것은 이제까지 봐 온 마법들과는 달랐다.
그 강약을 논하자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다른 ‘종류’의 마법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
난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사들이 한 것은 바로 소환 마법이었다.
그 진에서는 웬 거인이 하나 튀어나온 것이다.
온몸이 불로 이루어져 있는 거인.
‘우선 저거라도 상대해야 하나.’
난 몸을 풀며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
“크루아아아아아아악!”
하지만 난 우리 진영 쪽에서 울려 퍼지는 거대한 함성을 들으며 생각을 바꿔야 했다.
크룩이 거대화 능력을 쓴 것이다.
나 없는 동안에도 수련을 많이 했는지 한쪽 팔에 낀 건틀렛이 오늘따라 유독 빛나 보였다.
“케루루루루!”
게다가 연이어 마법을 펼치려는 마법사들을 향해 주술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마법사들도 큰 마법은 쓰지 못하고, 작은 마법과 방어 마법 위주로만 시전하고 있었다.
케륵도 주술사 부대를 이용해 적절히 지원하고 있네.
투웅-!
그때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키루루루-!
뇌조가 황급히 몸을 돌렸고, 옆으로 화살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난 바로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가자.
후욱-
그리고 이번엔 바로 그곳으로 움직였다.
변경백이 나를 향해 손을 까딱이고 있었으니까.
퉁!
투웅-!
날아가는 우리를 향해 연이어 화살이 날아오긴 했지만, 뇌조는 변화무쌍한 몸놀림으로 다 피해 냈다.
마침내 뇌조가 멈춰 선 것은 넓은 연무장이었다.
‘이것도 데자뷔인가.’
난 거칠게 웃으며 백발의 사내를 노려봤다.
그는 어느새 활은 옆으로 내려놓고서 라운드 쉴드와 메이스를 들고 있었다.
“무슨 자신감이지?”
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너른 연무장엔 단 한 명의 병사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감이라…….”
변경백은 그런 내 말이 우습기라도 한 듯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개새끼를 잡는 데 자신감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는 메이스를 치켜들었다.
난 창을 제대로 고쳐 잡으며 그에게 말했다.
“다 죽어 가는 노인네가 입은 살아 있군.”
“그쪽은 몬스터들이랑 지내서 그런지 예의범절 같은 건 영 모르나 보군?”
우리는 천천히 거리를 유지하며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둘이서 마치 원을 그리듯 걸으며 서로를 파악했다.
그는 새삼스럽게 우리가 어디서 온 것인지, 난 누군지. 그런 것은 물어보지 않았다.
하긴.
이것은 전쟁이다.
벌어지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맞부딪친 이상 승자와 패자만 있을 뿐.
말로 해결할 일이었으면 애초에 싸우지를 않았겠지.
우리는 서로를 관찰했고.
움직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노인의 뒤로 모래가 훅 떠올랐다.
난 아직 하늘에 있는 뇌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휘익!
몸이 하늘로 딸려 올라간다.
그리고 그런 내 밑으로 하얀색으로 빛나는 변경백 팔치온의 몸이 지나간다.
난 다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며 창을 뻗었다.
파지지직-!
동시에 뇌조는 입에서 전기를 뿜어내었다.
새로 개발한 능력 중 하나다.
쿵!
내가 뻗어 낸 창이 팔치온의 방패에 가로막혔다.
그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슬쩍 방패를 움직여 내 창을 다른 경로로 미끄러트렸다.
파악!
게다가 그는 보지도 않고 등 뒤로 하얀색의 막을 쏘아 내었다.
파직!
뇌조가 쏘아 낸 전격은 그 막에 가로막혀 흩어졌다.
‘저게 다른 능력인가?’
난 한 번 뒤로 몸을 물린 후 놈을 노려봤다.
팔치온의 능력에 대해 열심히 조사하긴 했지만, 그는 많은 면에서 베일에 싸여 있었다.
알아낸 것은 하나.
‘흰색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아까 전 맨 처음 돌진할 때 보였던 하얀색의 빛.
분명 팔치온의 몸 주위로 하얀빛이 어려 있었고, 그의 몸놀림은 범인을 훌쩍 초월해 있었다.
“하압!”
그가 메이스를 들어 올리더니 커다란 기합 소리를 내었다.
저 짧은 메이스가 닿을 거리는 아니지만, 난 기묘한 위화감이 들어 바로 몸을 피했다.
후우우우웅!
그리고 난 그가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지를 볼 수 있었다.
메이스 주위로 하얀빛이 어리더니 내가 있던 자리로 불쑥 불투명한 메이스가 튀어나왔었다.
‘원거리 공격?’
난 그가 다시 메이스를 들어 올리는 걸 보고 다시 달려들었다.
쿠웅!
이번에도 내질렀던 창은 방패에 가로막히고, 그는 메이스를 휘둘렀다.
휘익!
난 창을 회전시켜 창대로 그의 팔 부분을 가격했다.
타악!
그의 메이스는 정해진 경로에서 벗어나 허공을 갈랐다.
놀라운 건 바로 그다음 일이었다.
후욱!
갑자기 그의 몸이 빛나더니 그의 몸에서 불투명한 몸이 하나 더 튀어나온 것이다.
카앙!
난 양쪽에서 휘둘러오는 메이스를 간신히 쳐냈다.
그 불투명한 몸은 그 공격 후 다시 몸으로 돌아갔다.
‘도대체 뭔 능력이야?’
난 창대를 급하게 움직이며 최대한 중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온 그 불투명한 몸 때문에 간격을 유지하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마치 동시에 두 사람을 상대하는 것 같은 느낌.
‘우선.’
난 합을 나누면서도 몇 가지를 짐작했다.
‘자신의 몸에 있는 것을 따로 빛의 형태로 때어서 조종할 수 있어.’
게다가 부피가 작은 경우엔 아예 원거리에서 소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반대로 부피가 큰 것은 자신의 몸, 혹은 몸 근처에서 튀어나왔는데.
그의 몸이 갈라져 나올 때는 무조건 몸에서 출발했다.
반대로 아까 전 메이스 같은 경우는 원거리에서 불쑥 튀어나왔고.
‘귀찮은 능력이군.’
팔치온은 그의 무력 자체도 뛰어난 수준.
그런데 저런 변칙적인 능력이 더해지니 상대하기가 몇 배는 어려웠다.
난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메이스를 피하며, 동시에 그가 휘두르는 메이스를 옆으로 쳐냈다.
카아앙!
하지만.
답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번에 나도 새로 얻은 능력이 있었으니까.
후웅!
난 전신으로 전격을 끌어 올리며 그의 품속으로 돌진했다.
카아앙!
그는 능숙하게 내 창대를 쳐냈고, 거리는 굉장히 좁아 내가 다시 창을 휘두르기는 힘들었다.
화악!
그러면 창을 안 쓰면 되지.
난 밝게 빛나는 창을 그대로 휘둘렀고, 창은 휘둘러지는 동안 점점 그 형태가 바뀌었다.
바로 날카로운 검의 형태로.
휘이이이이이이-!
세찬 바람과 함께 난 검을 그의 가슴팍을 향해 찔렀다.
내 고유 무기의 새로운 능력.
흡수한 무기라면 언제든 원하는 형태로 바꿀 수 있다.
‘풍월검 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