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돌아가는 길은 순탄했다.
흔한 마물 하나 보이지 않았고, 마차는 편안했다.
며칠 후, 우리는 도시 폴그룬에 도착했다.
조용히 들어가고 싶었기에 바로 마차를 신전 뒤로 몰았다.
“고생하셨습니다, 크루룩.”
우릴 맞이한 건 크룩이었다.
신전 바로 뒤에 훈련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응. 애들 시켜서 마차에 실린 물건들은 창고로 옮겨 둬.”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해야 할 일들을 일러둔 후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일행들도 오늘은 푹 쉬라고 전해 두었기에 다들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나도 간단히 자리를 비운 동안 쌓인 일들만 처리한 후 방에서 휴식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모두를 모아 회의를 했다.
주요 안건은 이제 정말 코앞으로 다가온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병력 증강은 순조로이 이뤄지고 있었고, 늘어난 인원에 맞게 편제 또한 새로이 정비했다.
나는 이번엔 주요 지휘 역할에서 물러났다.
애초에 내가 전략이 뛰어난 편도 아니었거니와 가장 강한 전력이니 만큼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따로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전쟁에선 주로 요격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
새로이 전략 및 지휘로 편성된 것은 바로 철우 형.
그는 케륵, 그리고 크룩과 함께 병력을 운용하는 역할을 할 거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훈련을 받아 온 인간들도 대량 병력에 포함시킬 예정이기에, 주로 그들을 지휘하게 될 거다.
‘벨루곤의 점령도 순조롭고.’
페일에게 보고를 들은 바로는 벨루곤의 암흑가 세력의 거의 70%를 통합했다고 한다.
남은 건 중간 크기의 조직 하나와 나머지 자잘한 조직들.
중간 크기의 조직마저 흡수하고 나면 나머지 조직들은 알아서 흡수될 것이다.
그들은 이번엔 전쟁에 있어 부족한 물자들을 보낼 것이다.
또한, 왕국의 동향 및 변경백의 정보를 수집할 것이고.
회의는 그 이후로도 길게 이어졌고, 끝난 건 거의 밤이 됐을 때쯤이었다.
긴 회의였지만 모든 것이 정해진 건 아니다.
변경백을 이겨도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을 치고 나면 왕국에서도 우리를 확실히 인식할 테고, 그 이후 계속해서 전쟁할 확률이 높다.
다른 나라들도 있는 만큼 우리에게 전력을 집중하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골치 아프네.’
그렇기에 앞으로는 약 이틀에 한 번꼴로 회의를 하기로 했다.
난 간단하게 목욕까지 마친 후에야 지친 몸을 이끌고 침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눈을 감고서 잠이 들었을 때.
그때는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
뇌신이 환하게 웃으며 날 반겼다.
한 손에는 창을 들고서.
“…예.”
나는 힘없이 대답하며 그가 건네주는 창을 받았다.
죽겠네, 진짜.
* * *
한 달이 흘렀다.
벨루곤에 파견했던 철우 형도 돌아왔고.
부족했던 갑옷과 물자들은 켈을 통해서 사들였다.
게임식으로 치면 그와 나의 관계도가 일정 수치를 넘었는지, 이번엔 무려 총 금액의 30%를 할인받았다.
‘대신 물건 구입 및 판매는 꼭 저를 통해서 해 주세요!’
물론 그런 말을 듣긴 했지만.
그도 내가 전쟁을 시작하려는 걸 알고서 확실히 관계를 굳혀 두려는 의도가 있는 거겠지.
원래 상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큰 이득을 보니까.
‘병력도 완전히 정비됐고.’
식량 같은 건 켈에게 사기도 하고, 신화 포인트를 최대한 끌어모아 비축하기도 했다.
그 외 잡다한 아이템들도 사고.
이제 남은 건 정말 전쟁뿐인데.
저번 요새를 침략했을 때처럼 바로 쳐들어갈 수는 없으므로 나는 변경백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름 길게 늘여 쓰긴 했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투항하라. 아니면 전쟁이다.
과격하지만, 굳이 돌려서 말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전쟁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드디어 오늘.
답장이 돌아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대기하고 있는 사제에게 말했다.
“케륵과 크룩을 불러와.”
“알겠습니다!”
황급히 뛰어가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돌아온 대답은 당연히 ‘전쟁’이었다.
* * *
전쟁을 확정 지은 후.
난 매번 하던 것과 같이 앞에 나서서 연설했다.
출정 시기까지 잡혔기에 성내에는 흥분과 긴장이 맴돌았다.
그들 중에는 전쟁을 한 번도 겪지 않은 이들도 있었기에, 병력 배분을 세심하게 해야 했다.
연설이 끝나고 그들에게 간단한 음식과 술을 내렸다.
평소 축제를 할 때처럼 밝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친한 이들끼리 모여서 그저 술잔을 나눌 뿐.
나도 친한 이들과 모여 간단하게 담소를 나누며 술을 몇 잔 마시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삼 일 후.
우리는 출정을 했다.
난 가장 앞에서 펜리르의 등에 타서 이동했고.
다른 간부들은 모두 늑대에 타고 내 옆에서 따라왔다.
펜리르의 등에 탄 건 오롯이 나와 케륵뿐.
“케르륵. 드디어 첫발을 내딛는군요.”
케륵은 약간 상기된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지.”
반면에 나는 그저 담담했다.
이 순간이 오면 엄청나게 떨리거나 흥분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엄청나게 차분해졌다.
그저 드디어 올 때가 왔구나.
그런 생각을 할 뿐.
“삼 일 정도가 걸린다고 했지?”
“맞습니다. 케르륵.”
나도 알고 있던 것이지만, 한 번 더 물었다.
이틀 정도 행군과 야영을 반복한 후에 삼 일 차쯤이면 변경백의 성에 도달할 것이다.
회의했을 때 머리를 모아 생각한 결과 변경백이 요격을 해 올 확률은 거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변경백의 영지까지는 대부분 평야 지대인 데다가, 병력의 수 자체는 우리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굳이 수성의 이점을 버리고 회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
슬슬 머리를 식히려 고민을 끝낸 건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난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펜리르를 불렀다.
“펜리르.”
-예?
“넌 마경이 그립지는 않냐?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펜리르는 눈을 끔벅거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그립긴 하지만 주인님과 생활하는 것도 꽤 좋습니다. 편하기도 하고요.
“그래?”
-예. 아무래도 마경에서 생활하는 건 그리 편하지만은 않으니까요.
하긴, 펜리르도 제법 강한 축에 속하긴 했지만, 마경은 마경.
내가 사냥했던 마물이나 거대 괴수 중에서도 펜리르와 동급인 놈들이 꽤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헤헤. 그렇죠.
난 픽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지금은 꽤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철우 형과 화린을 만난 것도 멘탈에 상당히 도움이 되었고.
‘그래도 집에 가고 싶긴 하지만.’
난 펜리르의 부드러운 털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여전히 로그아웃 버튼은 비활성화 상태다.
시스템 창에 나온 대로 ‘메인 퀘스트’를 깬 후에야 로그아웃을 할 수 있는 거겠지.
‘왕. 그다음은 황제.’
난 변경백을 시작으로 이 왕국을 집어삼킬 거다.
어렵겠지만,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세력과 동료, 그리고 부하들.
그리고 나의 힘.
그것들이 그리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이 왕국을 점령할 때쯤이면 마물들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겠지.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데다가, 그 대다수가 서부전선 너머에 있다.
마물이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 지금도 경계를 하는 ‘전략가’ 놈도 본격적으로 활동을 할 거다.
‘왕국을 점령하고, 또 다른 왕국을 침략하고. 세력을 점점 넓혀 나가서 황제 등급에 오른다.’
우선 내 생각은 딱 거기까지다.
분명 그 이후의 등급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정작 그게 뭔지는 황제 등급에 도달한 후에야 알 수 있을 테니까.
하여튼, 만약 황제 등급에 오르고 그다음 등급까지 오른다면.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이 빌어먹을 세상은 날, 아니 우리를 집으로 돌려보내 줄까?
난 해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나 자신을 향해 던지며 씁슬한 웃음을 지었다.
* * *
삼 일 후, 우리는 저 멀리 보이는 성벽을 앞에 두고 진을 쳤다.
화살과 닿지 않는 거리였기에 우리는 진격에 앞서 휴식과 함께 식사했다.
적을 바로 앞에 두고 쉬는 거라 편할 리는 없었지만, 행군한 후에 바로 싸울 수는 없으니까.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간부들은 큰 천막 아래 모였다.
“성벽 규모는 페일이 전해준 대로네. 계획을 크게 바꿀 필요는 없겠어.”
난 성벽을 힐끔 보고서 말했다.
“정찰을 해 보긴 하겠지만, 어차피 우리는 전략보다 개개인이 더 중요하잖아?”
이번에 합류한 제크는 여유로운 태도로 내 말을 받았다.
“케르륵. 그래도 병력의 피해는 최소로 해야 합니다. 정찰대가 돌아오면 전략을 한 번 더 검토해야지요.”
케륵이 말하고.
“그렇긴 하지. 예전에 수행했던 전투들처럼 완전히 주먹구구식으로는 할 수 없으니.”
내가 말을 받았다.
정찰대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갖가지 예상 시나리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하! 돌아왔습니다.”
곧 정찰대가 돌아왔다.
얘기를 들어보니 가끔 화살을 쏴 대기도 했다는데, 전원 늑대를 타고 있었기에 큰 피해는 없었다 한다.
우리는 정찰대의 보고를 기반으로 몇 가지 디테일한 것들만 수정했다.
“좋아. 이제 각자 위치로 이동해.”
“알겠습니다.”
일반적인 전쟁과 달리, 우리는 장수에 해당하는 간부들이 가장 선봉에 서야 한다.
물론 케륵을 비롯한 근접 전투 능력이 약한 몇 명은 제외하고.
잠시 후.
둥둥둥둥-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병력 규모가 커진 만큼, 전 병력에 한 번에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배치해 둔 것이다.
곧 북소리를 기점으로 우리는 앞으로 나갔다.
둥둥-
저 멀리 보이던 성벽이 가까워지고,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안 닿을 지점에 딱 멈춰섰다.
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크게 소리쳤다.
“변경백 팔치온!”
쩌렁쩌렁하게 소리가 울려 퍼진다.
거리가 있다곤 하나 성에까지 충분히 닿을 만한 크기다.
난 연이어서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지금이라도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난 거기까지 말하고서 성벽 위의 반응을 봤다.
성벽에는 병사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그들은 한 치의 동요도 없어 보였다.
훈련을 많이 받은 티가 나긴 하는군.
애초에 진짜 투항할 것을 기대하고 한 말도 아니었기에 난 뒤로 물러나려 했다.
쌔액-
그런데 돌연 앞으로 굵은 화살이 날아들었다.
콰앙!
바로 손을 들어 화살을 쳐내는데 제법 묵직한 힘이 실려 있는 게 느껴졌다.
“전하!”
난 놀라서 달려 오는 이들을 손을 들어 제지하고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팔치온.’
멜리움 왕국의 변경백 중 한 명.
그리고 그 자신도 아주 강력한 무인인 귀족이 성벽 위에 당당히 서 있었다.
‘화살도 잘 쏜다더니.’
팔치온은 하얀 백발과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나이는 얼굴로만 봐서는 약 사십 대쯤으로 보였는데, 머리칼의 색과 경지에 오른 무인의 노화가 늦다는 걸 생각하면 그 이상일 것이다.
“환영 인사가 화려하군.”
난 제법 아릿한 손을 한차례 털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전 병력!”
둥둥둥둥-
정해진 내 외침에 북이 다시 울려 퍼진다.
난 그 소리보다도 더욱 크게 소리쳤다.
“진군!”
전쟁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