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모든 장소, 모든 상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 퀘스트 내용을 알고 있는 화린조차도 모든 정황을 알고 있진 못하다.
그것이 내가 원하던 것이니까
악마의 속삭임 퀘스트.
화린에게 얘기를 들었을 때 생각한 게 있었다.
이거.
숨겨진 내용이 있겠구나.
본래 퀘스트 내용은 간단하다.
네팔루치아 놈들에게 협력해서 복수하려는 수인이 한 명 있다.
놈은 오랜 시간을 들여서 묘족들을 세뇌했다.
그리고 그 세뇌된 이들을 필두로 해서 다른 수인들까지 끌어들인다.
‘황금 갈기에 대한 불만을 자극했겠지.’
황금 갈기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왕국을 잘 통치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애초에 수인 왕국 자체가 만들어진 지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고, 다양한 종족을 규합해서 만들어졌기에 아예 잡음이 없을 수는 없었다.
‘특히 각 종족의 대장로들.’
그들 중엔 분명 황금 갈기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이가 있었겠지.
그 내통자들의 위치를 파악해서 화린 일행을 보낸 것이고.
자, 그럼 퀘스트 내용은 어떻게 끝날까?
간단하다.
분노한 황금 갈기는 내통자들 및 네팔루치아의 끄나풀 모두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리고 끝.’
그게 끝이다.
내통자들 있고, 끄나풀 있고.
더 무엇을 수색하겠는가?
관련자를 찾아서 심문하는 것도 물론 있겠지만, 더 이상의 단서는 없다.
‘나도 몰랐을 수도 있지.’
만약 나도 미래의 일을 알지 못했다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다.
기실 우리가 퀘스트 내용을 알고 미리 대비했기에 쉽기 쉽게 진행이 된 것뿐, 펜던트를 찾지 못했으면 이런저런 일이 있었을 테니.
그러나 난 미래의 지식을 안다.
수인 왕국. 특히 이곳 수도는 난공불락의 도시라 불렸었다.
‘멸망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난공불락의 도시라 불리던 도시 황금 갈기는 하루아침 새에 모든 방어막이 뚫리고 함락당했다.
지금까지도 그 이유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미스터리로 불렸었다.
난 지금 그 미스터리의 정체를 미리 깨달은 것이다.
퍼즐을 꿰맞추듯이 머릿속을 정리하며 난 쭉 나아갔다.
곧 도시의 전경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외곽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병사 두 명이 인사를 해 온다.
“그래. 다른 이들은?”
“모두 돌아왔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서 안으로 몸을 날렸다.
도시를 가로질러 왕궁에 가까워지자 그 앞의 광경이 보였다.
“호진. 왔군.”
황금 갈기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나도 대충 인사를 받으며 왕궁 앞에 무릎 꿇어 있는 수인들을 보았다.
‘화려하게도 저질러 놨군.’
내가 부탁한 일이긴 하지만.
딱 봐도 묘족 전체가 이곳에 모여 있는 듯싶다.
“어둠 송곳니요.”
난 황금 갈기의 앞쪽에 어둠 송곳니를 던졌다.
놈은 여전히 기절해 있는지 바닥에 부딪히면서도 일어나지 못했다.
황금 갈기가 떨떠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죽은 건 아니겠지?”
“…아마도요.”
난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안 죽었을 거다. 아마도.
“이들은 무엇입니까?”
나는 화제를 돌렸다.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황금 갈기를 향해 질문했다.
“이들은 이번 소란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해 모아 두었다.”
황금 갈기도 근엄한 표정으로 내 질문에 합을 맞춰 주었다.
난 묘족들을 쭉 둘러봤다.
그중엔 광풍 송곳니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묘족이 아닌 수인 세 명이 주르륵 무릎 꿇고 있었다.
화인이 잡으러 갔던 이들이겠군.
“이들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
나는 황금 갈기에게 물어보았고.
“법도에 따라 처벌해야지.”
황금 갈기는 여상스러운 말투로 내 말을 받았다.
이 또한 정해진 바.
난 입꼬리 한쪽을 잡아당기며 다시 광풍 송곳니를 보았다.
그에 대해 의심을 가진 것은 케륵이 묘족 대장로를 소환했을 때부터였다.
그 당시에는 모두 광풍 송곳니가 해석해 준 대로만 들었다.
그런데 케륵이 다음에 따로 드릴 말이 있다며 날 찾아와서 놀라운 사실을 말해 주었다.
‘해석을 빼먹은 게 있다고?’
‘예. 그룬 님이 말해 준 바로는 본래 대화의 전문은 …라고 했습니다.’
그때의 말에 의하면 광풍 또한 네팔루치아와 한편이었디.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오히려 어둠 송곳니보다 더 윗선이었다.
그런데 우스운 건 광풍 송곳니 또한 모든 일의 흑막은 아니라는 거다.
“그럼 시작하지.”
난 황금 갈기에게 말했다.
이제 시작할 시간이라고.
“그래. 벌써 시간이 됐나.”
황금 갈기는 고개를 돌려 화린과 케륵, 이렌, 그리고 주변에 몰래 숨어서 대기하고 있던 주술사들을 보았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였다.
“abrude cel mio”
주문을 외는 소리가 들린다.
무릎을 꿇고 있는 묘족들이 흠칫 놀란다.
정석대로라면 모든 흑막을 파헤치고 음모를 분쇄하는 게 맞겠지만.
솔직히 그럴 필요가 뭐 있나?
아주 빠른 길이 있는데.
“benof odfe ode ldo bae!”
주문이 점점 빨라진다.
그럴수록 묘족들의 몸이 움찔움찔 떨린다.
묘족들은 지금 단순히 황금 갈기가 분노해서 자신들을 불러들인 줄 안다.
어둠 송곳니와 광풍 송곳니의 잘못을 책하기 위해 모은 줄 안다.
“doea doe fo doefih ge!”
그러나 이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니다.
말하자면 이 주문은.
최종 보스를 소환하는 주문이다.
케륵이 모든 주술사들의 주문을 한데 모으며 지팡이를 높게 들어 올린다.
“모습을 드러내라!”
묘족들의 몸 주위로 언뜻언뜻 검은색 기운이 피어오른다.
“네팔루치아! 고대의 악마여!”
쿠웅-
주변으로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쿠웅-
땅이 흔들리고.
쿠웅-!
묘족들이 눈을 뒤집으며 몸을 벌벌 떤다.
그들은 이미 제물로 바쳐진 상태다. 네팔루치아라는 악마에게 영혼과 몸을 저당 잡힌 상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역순으로 추적하여 상대방을 불러들이는 거다.
황금 갈기가 이 상황에 매듭을 짓듯 크게 소리친다.
“모두 들어라!”
그는 양손에서 날카롭고 커다란 손톱을 뽑아냈다.
“묘족의 대장로! 질풍 송곳니는 악마의 간계에 넘어가 그들에게 협력했다!”
이 모든 일의 흑막.
이미 죽어 버린 대장로는 자신의 종족 전체를 악마에게 제물로 바쳤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선언한다!”
후우우웅-!
검은 기운들이 묘족들의 머리 위로 한데 뭉친다.
네팔루치아 놈들의 세뇌 주술은 그 효과가 굉장하고.
당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른 채 놈들의 꼭두각시가 된다.
“위대한 수인들의 영혼을 가지고 논 악마 놈에게 철퇴를 내리겠다.”
보통은 그 세뇌를 풀기는 힘들다.
두웅.
묘족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들의 눈에선 이미 지성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휘이이이-
검은 기운들은 이내 한데 모여서 울렁거리더니 일정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황금 갈기. 넌 나와 저것을 처리한다. 묘족들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그래.”
황금 갈기는 이를 악물며 허공을 보았다.
허공에서 형체를 완전하게 갖춘 악마가 불길한 괴성을 터트린다.
크아아아아아-!
네팔루치아.
놈의 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수인 왕국인가?
네팔루치아는 눈을 끔뻑이더니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피부가 저릿저릿하다.
악마의 본체도 아니고 분신일 뿐인데도 그 존재감이 어마어마하다.
우리 주변으로 묘족들을 처리하기 위해 모여든 전사들도 그 존재감에 짓눌려 거친 숨을 내뱉고 있다.
-너희들이 날 불러낸 걸 보니 계획이 실패한 것 같군.
악마는 평온한 말투로 그리 말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역시 질풍 그 덜떨어진 놈에게 임무를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쯧.
악마의 말에 황금 갈기의 눈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나는 풍월검을 조용히 꺼내 들었다.
-어차피 계획이 어그러졌으니 여흥이라도 즐겨야겠구나.
악마도 천천히 몸을 폈다.
쿠웅-
덩치가 커다란 황금 갈기보다 족히 세 배는 커다랗다.
저 정도 분신이면 본체의 약 1/100 정도의 힘을 담고 있을 거다.
묘족 수백 명을 담보로 잡아 모습을 드러낸 거니까.
그리고 힘은 약화된 채라고 해도, 상처를 입거나 힘을 소진할 때마다 묘족의 영혼을 소모해 회복을 도모할 터다.
이대로라면 굉장히 불리하고, 묘족들을 정상으로 돌릴 수도 없다.
-그럼.
별안간 악마의 손이 높게 들린다.
분명히 느린 몸짓이었는데 동시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콰아아아앙-!
그래서 정신을 차렸을 때 놈의 손은 이미 채찍처럼 늘어나 바닥을 내리찍고 있었다.
난 겨우 한 끗 차이로 그것을 피해 냈다.
-시작하자, 미물들아.
악마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다.
놈의 위압감이 전신을 짓눌렀지만, 난 놈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아니다, 이 악마야.”
-흠?
“지금이야!”
난 휙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주술사와 다른 이들의 역할은 이들을 끌어내는 것에서 끝이 아니다.
주문은 총 두 개였다.
“케루룩! 사라져라!”
총 서른 명의 주술사가 힘을 합쳐 완성한 주술.
공간 전이 주술.
후우우웅-!
-이건 무슨!
나와 황금 갈기, 그리고 네팔루치아의 분신의 몸에 푸른색의 빛줄기가 감겨든다.
“조금 이따 봐!”
난 손을 한번 흔들어 주고서 기운에 몸을 맡겼다.
* * *
화린은 호진과 황금 갈기, 악마가 한 번에 사라지는 걸 보며 말했다.
“이제 우리 차례네.”
그녀는 이성을 잃고서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 묘족들을 보았다.
“케루룩. 절대 죽이면 안 됩니다.”
“힘들겠군요.”
케륵과 하얀 발톱이 차례로 말을 받았다.
“케룩. 왕님과 황금 갈기 님이 악마를 처리하면 이들도 원래 상태로 돌아올 겁니다.”
“예. 우리는 그때까지 버텨야 하고요.”
이 셋은 내통자가 광풍 송곳니라는 걸 보고선 깜짝 놀라 도시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그때에서야 황금 갈기에게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악마가 눈치 못 채게 세뇌 주술에 걸린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악마의 정수만을 따로 뽑아내 처리한다.”
네팔루치아는 특이한 악마다.
본신의 힘 자체도 대단하지만, 세뇌 주술의 효과는 더더욱 대단하다.
기실 세뇌 주술은 이름만 그럴 뿐, 주술이라고 볼 수도 없다.
‘악마의 권능.’
그렇게 불러야 옳다.
자신의 기운을 몇백, 몇천 조각으로 나눈 다음에 원하는 상대에게 심으면 그들을 조종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지금처럼 그 조각들을 모아 놈의 분신을 소환할 수도 있는 거고.
캬아아아-!
묘족들이 천천히 손톱을 앞세운 채로 다가온다.
화린 일행과 수인 전사들은 모두 무기를 들어 올렸다.
“자, 그럼 해 봅시다.”
* * *
나는 진하게 느껴지는 현기증에 비틀거리다가 바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앙-!
-이 건방진 미물들이!
네팔루치아의 성난 얼굴이 보인다.
주변에 나무들 몇 그루가 이미 부서진 채로 널려 있는 게 보인다.
“왜? 결계가 생각보다 단단해서 놀랐어?”
난 씩 웃으며 말했다.
“엔트들의 마법이 대단하긴 하군. 악마조차도 묶을 수 있는 결계라니.”
“뭐, 정확히 말하면 분신이긴 하지만.”
황금 갈기도 곧 모습을 드러내며 내 옆으로 걸어왔다.
-고작 이런 걸로 날 계속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네팔루치아는 이를 아득 깨물며 팔을 들어 올렸다.
-본래 여흥만 즐기고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휘이이익-!
부지불식간에 양손이 채찍처럼 휘어서 날아온다.
콰아앙!
-네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뼈째로 씹어 먹어 주마!
놈의 손은 마치 뱀처럼 기묘하게 비틀리며 우리를 따라왔다.
허공에서 몇 번이나 방향을 바꾸었다.
타악.
간신히 몸을 빼내 땅으로 착지하며 놈을 보았다.
“야, 평소라면 내가 무서운 척이라도 좀 하겠는데.”
난 풍월검을 검집에서 빼내었다.
네팔루치아가 다시 팔을 들어 올렸지만, 내 시선은 놈의 뒤로 향해 있었다.
“오늘 달이 좀 환하게 떠서 말이야.”
하늘엔 만월이 떠 있다.
마침 바람도 선선하게 불고.
“봐주는 건 힘들겠다.”
‘풍월검 개방.’
검을 중심으로 은은한 달무리가 엉켜든다.
콰아앙-!
난 연신 휘둘러오는 놈의 팔을 피하며 읊조렸다.
“만월(滿月).”
검날이 반짝이고.
다음 순간 달빛이 비치는 모든 곳에 검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