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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108화 (108/170)
  • 108화

    “그거 다행이군.”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련만 그는 도리어 씩 웃어 보였다.

    “흥미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소.”

    “하하. 그렇군.”

    참 긍정적인 양반이네.

    뭐, 나야 좋다. 도움에 대한 보상은 확실히 받아 낼 거니까.

    “그럼 거두절미하고 어떤 식으로 도우면 되오?”

    난 앞으로 몸을 내밀며 물었다.

    그는 바로 대답했다.

    “그 전에.”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리며.

    “서로 말을 편하게 하는 게 어떻소? 솔직히 이 말투는 좀 불편해서.”

    “좋지.”

    넙죽 받아들였다.

    “크흐. 자네도 참 호탕하군. 그럼 바로 뭘 부탁할지 말하겠네.”

    그는 시원스레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오래 끌 생각 없었기에 그를 따라서 일어났다.

    “바로 가는 건가?”

    “그래. 그 사령술사와 함께 묘족의 거처를 조사해 줘. 내가 직접 안내해 주지.”

    “좋아.”

    황금 갈기는 외투를 걸치고서 먼저 문밖으로 나갔다.

    일국의 왕이나 되는 남자가 직접 안내를 해 주니 상당히 묘했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나도 왕이긴 하지만.

    ‘뭐, 쟤들이나 우리나 일반적인 왕국은 아니니까.’

    나도 이게 더 편하긴 하다.

    황금 갈기를 따라 복도를 걸어 케륵이와 이렌을 불렀다.

    “잠깐 할 일이 있다.”

    “케르륵. 알겠습니다.”

    “네.”

    케륵은 원래 부르기로 했었고, 이렌은 정령술사이니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불렀다.

    네 명이 복도를 쭉 지나 밖으로 나가니 몇 명이 더 합류했다.

    ‘호위 병사들인가.’

    난 자연스럽게 따라붙은 이들을 힐끔 보았다.

    솔직히 호위 병사라고 치기엔 다 황금 갈기보다 약해 보인다.

    누가 누구의 호위를 하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새로운 인물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아까 전 연회에서 한번 봤던 남자지만.

    고양이 귀를 단 근육질의 남자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난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고, 황금 갈기는 고개만 한 번 까딱였다.

    “바로 들어가지.”

    “예.”

    그는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했다.

    저자의 이름이 광풍 송곳니라고 했던가.

    보통 수인들은 뒤가 성이고 앞이 이름이다. 그러니 저 수인은 ‘송곳니’가 성이고, ‘광풍’이 이름인 거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그래서 질풍 송곳니이고.

    우리는 묘족의 거처로 들어가 다시 또 복도를 걸었다.

    가끔 복도를 지나다니는 묘족 수인들이 보였다.

    아까 전 화린이 설명했던 대로 묘족들은 대부분이 인간의 형상에 가까웠다.

    ‘여자들은 은근히 잘 어울리네.’

    광풍 송곳니의 모습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되지만, 여성 수인들은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았다.

    내가 남자라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이쪽입니다.”

    곧 광풍은 제법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음.”

    황금 갈기는 고개를 한번 까딱이고서 바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짙은 피비린내와 연한 악취가 느껴졌다.

    ‘흐음.’

    난 황금 갈기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침입의 흔적은 없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방 한쪽에는 창이 하나 있긴 했지만 딱 보기에도 멀쩡해 보였다.

    걸쇠까지 있는 걸 보면 그냥 열고 들어갈 수는 없어 보였다.

    강제로 뜯고 들어갔다면 당연히 흔적이 남았을 테고.

    ‘문도 멀쩡하고.’

    나는 유심히 방 안을 훑어봤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찾지 못했다.

    그저 평범한 방 안에 시체 하나가 놓여 있을 뿐.

    시체는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겉보기로는 약 육십 대 정도의 중년 남성으로 보였는데, 그의 가슴팍에는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네팔루치아 놈들이 쓰는 수법은 아니네.’

    놈들은 저렇게 요란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긴 하다. 방에 침입한 흔적 하나 남겨 놓지 않고서 저렇게 눈에 띄는 방법으로 죽이다니.

    이것저것 고민해 봤지만, 딱히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건 황금 갈기도 마찬가지였는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보았다.

    “그걸 해 주게.”

    난 고개를 끄덕이고서 케륵에게 말했다.

    “시작해.”

    “케르륵. 알겠습니다.”

    케륵은 앞으로 나서서 먼저 그룬을 소환했다.

    -무슨 일로 불렀…….

    그룬은 나타나자마자 입을 열었다가 주변 인물들과 시체를 보고선 입을 다물었다.

    케륵은 그룬에게 현재 상황을 요약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룬은 지식이 풍부하고 머리 회전이 빠른 만큼 도움이 될 거란 생각에 부르라고 한 거다.

    케륵은 설명을 끝내고서 이번엔 대장로의 시체에 다가갔다.

    “마하베. 부노스. 케리루루.”

    그는 주로 사령술을 전투에 사용하긴 했지만, 본래 사령술은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카르. 케루! 벨! 마하바란!”

    본래는 네팔루치아 놈들도 저 주술로 심문을 해 보려 했지만, 미리 주술적인 처리가 되어 있는지 그건 불가능했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정보를 얻기가 쉬웠을 텐데.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라!”

    곧 그의 사자 소환 주술이 완성되었다.

    우우웅-

    시체의 몸에서부터 바닥까지 흘러내린 피가 거꾸로 빨려 들어간다.

    덜그덕-

    사자의 몸이 한차례 진동하고 이어서 부르르 떨린다.

    번쩍.

    그리고 곧 그는 눈을 부릅떴다.

    스으으.

    대장로의 몸에선 자연스럽게 한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자는 무언가 혼란스러운지 연신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제 말이 들리십니까? 케를.”

    케륵은 긴장한 표정으로 대장로에게 말을 걸었다.

    대장로는 그런 케륵을 빤히 바라보더니 곧 턱을 쩍 벌렸다.

    -aneosa be theos da?

    그의 목소리는 입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들려왔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의 말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네가 나를 불렀나, 라고 하셨습니다.”

    그걸 해석해 준 건 광풍 송곳니였다. 황금 갈기조차도 대장로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던데.

    그는 집중되는 시선에 담담하게 답하였다.

    “본래 묘족이 쓰던 언어입니다. 안 쓴 지 오래된 언어라서 생소하실 겁니다.”

    그렇군.

    하긴 같은 수인이라 하더라도 그건 다른 종족의 시선에서 분류해 놓은 것일 뿐.

    예전엔 각자의 문화 양식을 가지고 살았다고 했었다.

    “질풍은 열 가지가 넘는 언어를 구사했었을 텐데.”

    황금 갈기가 턱을 긁으며 대장로를 빤히 보았다.

    “케르륵. 아마도 사자 소환으로 불러들인 만큼 온전한 상태는 아닐 겁니다.”

    “그렇군.”

    말을 걸어 보니 알아 듣는 것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결국 우리가 질문하고, 대답은 광풍이 해석해 주는 식으로 했다.

    사자 소환엔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만큼 우리는 빠르게 질문했다.

    그러나 곧 다른 문제점이 도출되었다.

    “케륵. 아무래도 기억이 많이 손상된 것 같습니다.”

    대장로의 기억이 온전치 않았던 것이다.

    그는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죽기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원.”

    황금 갈기도 난색을 표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질문을 다시 바꿔서 물었다.

    “혹시 의심이 가는 자는 없나?”

    황금 갈기가 나서서 질문했고, 대장로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곧 대장로의 고개가 들리고 입이 열렸다.

    “mo, amtei dto gte ntam eti utsdeim dte ngeun gteun.”

    그 말을 알아들었을 질풍 송곳니의 얼굴이 굳어진다.

    대장로는 이어서 짧은 단어를 말했다.

    “udum soongotni.”

    모두 해석을 들을려고 광풍을 보았다.

    “케르르륵!”

    그때 케륵이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대장로의 시신이 부르르 떨리더니 푹 고개를 숙였다.

    “케르… 소, 소환 시간이 끝났습니다.”

    케륵은 어지러움을 느끼는 듯 몸을 비틀거렸다.

    난 황금 갈기의 양해를 구하고 그를 의자에 앉혔다.

    “그래, 그래서 무슨 말을 한 거지?”

    그를 앉힌 후 황금 갈기가 광풍을 재촉했다.

    “그…….”

    그런데 광풍은 지금까지 시원스레 대답하던 것과 달리 무언가를 망설이듯 머뭇거렸다.

    곧 광풍은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둠… 어둠 송곳니가 의심된다고 말했습니다.”

    “어둠 송곳니?”

    갑자기 그 말을 들은 황금 갈기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는 바로 광풍의 목을 움켜쥐고서 벽에다가 찍었다.

    콰앙-!

    광풍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황금 갈기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서 이를 드러내며 소리를 냈다.

    그르릉.

    자연스레 그의 몸에선 위압적인 기세가 물씬 피어올랐다.

    “그게 무슨 말이냐. 어둠 송곳니가 살아 있기라도 한 것이냐?”

    이렌과 케륵, 그리고 나는 심상치 않아 보이는 상황에 잠자코 지켜보았다.

    어둠 송곳니라는 이름을 봐선 묘족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 그게.”

    쾅!

    황금 갈기는 광풍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다시 사납게 내리찍었다.

    “살아, 살아 있었습니다. 금제를 가하고 추방을 했…….”

    “누구 마- 음- 대- 로-!”

    쿠궁.

    난폭한 고함과 함께 주변 공간이 부르르 떨렸다.

    황금 갈기는 분노를 주체 못하고 사방으로 기세를 발산하고 있었다.

    난 인상을 쓰며 내 주변으로 다가오는 기운을 해소했다.

    “대장로님의 명이었, 명이었습니다. 죽일 수는 없다고.”

    광풍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간신히 답을 내놓았다.

    황금 갈기는 이를 카득 소리가 나게 갈더니 광풍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는 그 후로도 한참을 씩씩거리더니 잠시 후 긴 숨을 내쉬며 기세를 가라앉혔다.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줘서 미안하네. 그 정령의 조사만 한 후 따로 자리를 옮겨서 마저 얘기하지.”

    “그래.”

    난 이렌에게 눈짓했고, 그녀는 바로 바람을 불러 방 안을 조사했다.

    아쉽게도 별다른 단서는 더 찾지 못했고,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 * *

    “후우. 다시 한 번 사과하네.”

    “아냐. 그럴 수 있지, 뭐.”

    황금 갈기가 고개까지 숙여 가며 사과를 하는데 안 받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그럼…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지.”

    광풍은 황금 갈기가 질질 끌다시피 왕궁으로 데려와 감옥에 가둬 두었다.

    우리는 그 자세한 이유를 들으려고 아까 전의 응접실에 와 있었고.

    “그래, 어둠 송곳니. 그놈에 대해서 먼저 말해 줘야 하겠지.”

    그는 팔짱을 끼며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 송곳니는 본래 묘족 대장로의 장자였네. 원래대로라면 차기 대장로는 놈이었겠지.”

    “그렇군.”

    “음. 그런데 몇 년 전 큰 사건이 있었지. 그 결과 나는 놈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왜 아직 살아 있다는 거지?”

    왜 왕인 네가 그것을 모르고 있었냐는 질문은 속으로만 삼켰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묘족은 왕국을 세울 때부터 많은 공을 세웠었네. 특히 대장로의 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지.”

    이 부분은 아까 화린에게도 들었던 말이다.

    그 정도이니 왕인 황금 갈기가 직접 나서서 사건을 조사한 거겠지.

    “그렇기 때문에 사형 집행을 묘족들에게 맡겨 두었었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참 어리석은 생각이었군.”

    “하. 어떻게 된지 뻔하구만.”

    결국, 간단한 이야기였다.

    대장로는 자신의 장자를 죽이지 않았다.

    금제를 가해서 어딘가로 추방했을 뿐. 그리고 그 장자가 다시 복수를 하기 위해 찾아온 것 아닌가.

    “그의 복수가 대장로를 죽이는 것만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도 그렇겠지.”

    잠시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지만,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니, 우선 확실하게 알아야겠어. 그 사건은 무슨 사건이었지.”

    황금 갈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고민이 되는 듯 턱을 괴고 있던 그는 결국엔 나를 보며 물었다.

    “자네는 악마 네팔루치아에 대해 알고 있나?”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까지의 어떤 얘기보다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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