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그는 매우 다급해 보였다.
하긴, 다급하니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한 거겠지.
황금 갈기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그건 다른 수인들도 마찬가지.
나는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
“바람 갈기.”
황금 갈기는 잠깐의 텀을 둔 후 입을 열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
바람 갈기라 불린 황금 갈기의 아들은 더욱 긴장하며 그의 아비를 보았다.
“음….”
황금 갈기는 손을 몇 번 쥐었다 피다 하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못다 한 얘기는 내일 해도 괜찮겠소?”
“알겠소.”
나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얘기가 끝난 후 적어도 나에게는 무슨 일인지 말해 줬으면 좋겠군.”
단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모를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는데 모른 척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의 안전과도 직결된 문제고.
“그러도록 하지.”
황금 갈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곧 차갑게 식은 연회장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고 안내인을 따라 걷는데 뒤에서 노호성이 들렸다.
-바람 갈기!
음.
불쌍한 왕자에게 애도를.
속으로 심심치 않은 위로를 건네며 우린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나와 케륵은 독방.
화린과 이렌은 같은 방을 쓰고, 나머지 고블린들도 같은 방을 쓴다.
‘넓네.’
방은 생각보다 넓었다.
인테리어는 간소하지만, 애초에 화려한 걸 좋아하지 않아 제법 만족스러웠다.
난 방을 둘러보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흐음.”
그럼 이제 뭘 할까.
살짝 피곤하긴 해도 잠을 청할 정도는 아니다.
무엇보다 아까 전 그런 얘기를 듣고서 바로 잘 정도로 무신경하지도 않고.
똑똑.
고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화린의 목소리다.
“들어와.”
내가 답을 하자마자 바로 문이 열렸다.
화린은 어색한 표정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자려던 건 아니지?”
“잠은 무슨. 아직 아홉 시도 안 된 거 같은데.”
“그치.”
화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자에라도 앉으라고 하고 싶지만……. 어찌 된 게 방에 의자 하나 없다.
“그냥 옆에 앉아.”
난 침대를 툭 치며 말했다.
나도 자리를 좀 왼쪽으로 앉았다.
그녀도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곧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일까?”
화린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글쎄.”
나도 목덜미를 긁적이며 그 말을 받았다.
“암살이라.”
암살이라고 하니 바로 떠오르는 게 있었지만, 쉽게 지레짐작할 수는 없다.
“카멜레온이 여기까지 들어오긴 힘들지 않아?”
“그렇지. 놈들의 능력이 냄새까지 지우지는 않으니까.”
수인들은 유난히 후각이 예민한 종족들이다.
카멜레온들이 모습을 감추더라도 수인들은 그들의 체취를 맡는다.
냄새를 가리는 방법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다.
대장로를 암살할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그래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완전히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아예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렵겠지.”
우연이라기엔 너무 공교롭다.
“그러게…….”
우리는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대장로 암살 사건이라.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큰 사건일지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 쪽에서 또 기척이 들려왔다.
똑똑.
-주무십니까?
“아니, 들어와.”
이렌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화린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너도 옆에 앉아.”
난 화린의 옆쪽을 가리켰다.
이렌은 아주 어색한 표정으로 화린의 옆에 앉았다.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침대가 커서 다행이네.’
난 픽 웃으며 둘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화린이 온 이후로 이렌의 육탄 공세가 좀 줄어든 것 같다. 다행인 건가.
“화장실 가신다더니.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렌은 경계심 어린 말투로 화린에게 물었다.
“그냥, 얘기 좀 하러 왔어요. 이렌 씨는요?”
“저도 잠시 얘기 좀 하러 왔습니다.”
으음.
으으음.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겠지?
아냐. 그럴 리가 없지.
난 속으로 혼자서 답을 내리고서 다시 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똑똑.
그런데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또 누굴까.
-케르륵. 주무십니까?
케륵이구나.
“어, 안 자. 들어와.”
케륵은 화린과 이렌의 눈치를 보고선 슬금슬금 걸어와 내 옆에 앉았다.
무슨 사랑방도 아니고.
침대 한쪽에 쭈룩 앉아 있는 걸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그래. 그럼 묘족 암살 사건에 관해서 얘기를 나눠 볼까?”
어차피 다 같이 얘기를 해 볼 생각이긴 했으니. 잘됐다.
“좋습니다. 케르륵.”
이렌과 화린의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는지 케륵은 내 말에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묘족의 대족장이 누군지 아는 사람?”
내 말에 케륵과 이렌은 즉각 모른다고 대답했다.
자연스레 우리의 시선은 바로 대답하지 않은 화린에게로 향했다.
“어, 그게.”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확실한 건 아니야. 그 내가 아는 것과 다를 수도 있고. 그렇지?”
화린은 나를 보며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전작과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다시 이어서 이야기했다.
“묘족 대장로 질풍 송곳니.”
화린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으로 치면 적어도 3성. 즉, 3번은 승급한 강자야. 어쩌면 4성일 수도 있고.”
3성에서 4성이라.
변경백과 비슷한 급이다.
대륙이 넓고 강자가 많다지만, 3성이면 무시 못 할 경지다.
4성은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지금은 나이를 많이 먹었어. 이것도 인간으로 비유하면 거의 칠십을 넘은 노인이지.”
“강자는 노화가 늦다 해도 칠십을 넘은 정도면 많이 약해졌겠군.”
“응. 아마 현재 전력은 2성에서 3성 사이일 거야.”
“그러면 암살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네.”
3성에 못 미치는 정도라면 카멜레온 놈들이 아예 상대를 못 할 정도는 아니다.
놈 중에서도 강자는 있으니까.
“맞아. 하지만 묘족의 경우는 좀 특수해.”
그녀는 아까 전 연회장에 있던 묘족을 기억하느냐 물었다.
난 그녀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인간의 모습에 귀와 꼬리만 간신히 달려 있던 이들을 떠올렸다.
내가 그것을 말하니 화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중에 유난히 큰 체격에 근육질인 남자 기억해?”
“어, 인상적이었지.”
“걔가 바로 묘족의 차기 대족장이야.”
난 그녀의 말에 그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근육질에 장신인 남자.
머리에는 고양이 귀를 달고 엉덩이에는 고양이 꼬리가 있었다.
‘으음.’
솔직히 같은 남자로서 보기에 썩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묘족은 특이하게도 대부분이 인간에 가까워. 실질적으로 육체 능력도 인간과 크게 다를 바 없고.”
“그래?”
“응. 그들이 뛰어난 분야는 거의 주술 쪽이야. 지능도 탁월한 편이고.”
그녀는 묘족은 신체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 때문에 호위를 따로 둔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즉, 암살자는 삼엄한 호위를 지나서 최소 2성 이상의 실력자를 죽이고서 다시 몰래 빠져나갔다는 거네.”
“그렇지.”
“그것참 대단한 새끼네.”
암살자가 바로 잡히지 않았다는 건 바람 갈기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케르륵. 아니면 내부 소행일 수도 있지요.”
잠시 또 생각하는 사이에 케륵이 끼어들어 말했다.
“그렇네.”
생각해 보면 꼭 외부인만 고려할 필요는 없었다.
“맞아. 내부인일 수도 있지.”
밖에서 계속 카멜레온 놈들한테 시달렸더니 그쪽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경우만 따져 보면 오히려 내부인의 소행이라는 게 더 자연스럽다.
“하지만 왜?”
그리고 이렌이 자연스럽게 내 말을 이어 받아 말했다.
반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화린이 말한 줄 알았다.
그녀는 내 시선을 멋쩍은 표정으로 받으며 말했다.
“결국, 그런 의문으로 귀결되지 않을까요?”
“그것도 맞아.”
역시 문제는 단서가 너무 부족하다는 거다.
우리가 앉아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봤자 결국 추측에 불과할 뿐.
수인들은 우리끼리 얘기를 다 끝내고 각자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소식이 없었다.
‘자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문밖에서 또 기척이 느껴졌다.
-호진 님, 주무십니까?
늑대 수인 하얀 발톱.
그의 목소리다.
“안 잡니다.”
난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여니 하얀 발톱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황금 갈기께서 부르십니다.”
“바로 따라가면 되나?”
“예.”
난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준비할 것도 없기에 그가 앞장서는 대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가 안내한 곳은 연회장이나 대전이 아니라 처음 보는 방문 앞이었다.
“전하, 이호진 님을 데려왔습니다.”
방 안에서 잠시 소리가 나더니 곧 문이 열렸다.
황금 갈기가 직접 문을 열고서 씩 웃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게. 하얀 발톱도 수고했다.”
“아닙니다.”
하얀 발톱은 바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돌아갔다.
난 황금 갈기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엔 넓은 탁자 하나와 의자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응접실인가?
“앉게.”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범인은 잡혔소?”
나는 앉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내 말에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범인은커녕 단서조차 거의 없더군.”
“흐음.”
내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자 그는 이내 한숨을 쉬며 자세한 얘기를 꺼냈다.
“그래, 이미 다 들은 마당에 숨길 것도 없지. 묘족 대장로인 질풍 송곳니가 암살당했네.”
그는 대장로가 자신의 방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됐다고 했다.
그걸 발견한 건 식사가 준비됐음을 알리러 갔던 시종이었다.
“우선 그 시종을 따로 격리 조치해 두기는 했네. 하지만 그가 범인일 가능성은 별로 없네.”
“어째서?”
“묘족은 뛰어난 주술사들이지. 그 시종은 ‘지배의 낙인’을 받은 상태였네.”
지배의 낙인. 아까 전 화린이 잠시 흘러가듯 얘기했던 거다.
묘족이 부리는 주술 중 하나인데, 그 낙인을 받은 이는 결코 상대에게 저항할 수 없다.
살해는커녕 함부로 대하지조차 못하니. 내가 듣기에도 가능성이 그리 커 보이진 않았다.
“그러면 외부에서 침입자가 있었을 수도 있는 거 아니오?”
“그렇지…….”
황금 갈기는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실 이번 자리는 우리의 ‘동맹’에 관한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상대에게 치부를 들킨 거나 마찬가지니. 그리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결론이 뭐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세심하게 배려할 생각은 없었다.
동맹을 위해 만난 거라 해도 여전히 기 싸움은 필요했으니까.
이건 오히려 기회다.
주도권을 잡기 위한 기회.
“으음.”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까 전 연회 자리에서 잠깐 들었던 바로는 그쪽에 사령술사가 있다더군. 맞나?”
난 그의 말에 비로소 그가 망설이던 이유를 깨달았다.
“도움을 청하려는 것이오?”
그의 의중을 이해한 나는 의자에 푹 등을 기대며 물었다.
주도권은 이미 내게 넘어왔다.
“…맞소.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오.”
“황금 갈기에게 큰 빚을 지운다라.”
난 아까 전 그처럼 턱을 찬찬히 쓰다듬다가 씩 웃었다.
“그것참 구미가 당기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