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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106화 (106/170)
  • 106화

    엔트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헤매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이 숲 자체를 왕국이라 하는 이유는 수인과 엔트의 공생 관계 때문이다.

    우선 엔트는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지만, 약점도 명확하다.

    바로 어느 정도 성장하기 전까진 마법은커녕 제대로 된 지성조차 없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엔트가 되기 전까지 그들은 평범한 나무와 다를 바 없다.

    “그것 때문에 엔트들은 수난도 많이 당했지. 갑자기 불을 지른다던가. 몰래 와서 나무를 벤다던가.”

    “케르륵. 그렇군요.”

    케륵이 엔트와 수인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을 해 와서 난 차근차근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수인들은 또 마땅한 터가 없었단 말이야.”

    수인들은 과거에는 현재의 고블린이나 오크처럼 부족사회를 이뤄서 살았었다.

    어느 날 수인왕이 나타나기 전까진.

    “수인왕은 대부분의 수인족들을 통합해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다녔지. 그러다 이곳 ‘나무 정령의 숲’을 발견한 거야.”

    현재는 수인 왕국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예전엔 이곳은 엄연히 엔트의 영역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둘은 모종의 거래를 했고, 그 결과 수인들은 이곳에 터를 잡은 거지.”

    “케르륵. 그렇군요.”

    케륵이 눈을 빛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도 몇 가지 질문에 더 답해 주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길의 끝에 나타난 너른 공터.

    우리는 천천히 멈춰 섰다.

    앞에는 성벽은커녕 작은 울타리조차 없었지만, 독특한 양식의 건물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이곳이 수인들의 낙원이자, 그들의 유일한 왕국. 그들의 수도.

    도시 ‘황금 갈기.’

    울타리조차 없는 이 왕국은 엔트와의 협력으로 예전엔 난공불락의 도시라 불렸었다.

    도시의 모습을 감상하며 서 있으니 저 앞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폴그룬 왕국에서 오셨습니까?”

    짐승의 귀와 탐스러운 털로 덮인 꼬리가 옆으로 살랑거린다.

    인간과 짐승이 오묘하게 섞인 모습이다.

    늑대 수인인가?

    “그래. 내가 폴그룬의 왕, 이호진이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늑대 수인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일국의 왕을 대하는 태도로는 심히 가볍지만, 수인들의 예절이 본래 그렇다.

    애초에 나도 예법 운운할 생각도 없고.

    지금도 나름 왕인지라 반말을 쓰고 있지만 그리 편하진 않다.

    “저는 대전사인 하얀 발톱이라고 합니다.”

    늑대 수인은 자신의 이름을 하얀 발톱이라 말했다.

    확실히 그의 손에는 하얀색의 발톱이 솟아 있었다. 전반적으로 인간보다는 짐승의 형상에 가까운 수인이다.

    ‘제법 강력하겠군.’

    수인들은 대체로 짐승의 형상에 가까울수록 강하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거의 그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들에게 ‘귀족의 핏줄’이 있는 것처럼 수인들에게도 강렬한 핏줄이 따로 있는 것이다.

    “제가 왕에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는 간결한 말투로 한쪽을 가리켰다. 우린 고개를 끄덕이고서 각자 무기를 수납했다.

    아무래도 남의 왕국에서 무기를 빼 들고 다니는 건 좀 그러니까.

    하얀 발톱을 따라가면서 모두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양 각종의 수인들이 거리나 나무 위를 뛰어다니고 있다.

    평화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잠깐잠깐 보이는 그들의 신체 능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고블린, 오크, 수인들이 성장이 빠르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네.’

    고블린이나 오크들은 약 오 년 정도면 성체로 자라난다.

    그렇기에 수명도 짧은 편이고.

    “이곳입니다.”

    곧 하얀 발톱이 멈춰 섰다.

    그는 제법 화려하게 생긴 건물을 가리켰다.

    물론 화려하다는 것도 주변 건물들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거지 인간들의 기준으로 보면 간소한 편이었다.

    “들어가시지요.”

    “그래.”

    난 건물 입구에 장식되어 있는 거대한 마수의 머리뼈를 흘긋 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쭉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하얀 발톱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고, 내부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인원이 우리를 안내했다.

    “다른 일행분들은 이 방에서 대기해 주시겠습니까?”

    왕이 있는 방으로 가기 전 안내인이 중간에 있는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펜리르는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기로 했고, 이렌, 화린, 케륵을 제외한 나머지 고블린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지.”

    어차피 다 데리고 들어갈 필요도 없었기에 그러라 했다.

    그 과정을 모두 거치고 나서야 우리는 왕이 있는 대전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제법 커다란 문이 열리며 너른 내부가 보인다.

    대전의 끝에 커다란 의자와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수인이지.

    그는 우리가 들어오는 걸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팔을 활짝 벌렸다.

    “수인의 왕국에 온 것을 환영하오. 낯선 이여.”

    유창한 인간의 언어가 흘러나온다. 생각한 것보다 배려심이 깊은걸.

    “나도 만나서 반갑소.”

    나도 씩 웃으며 그에게 마주 인사했다.

    ‘인간의 언어를 쓸 줄 아는군.’

    그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떠오른다. 그가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간단했다.

    우우웅-

    살갗으로 느껴지는 위압감.

    그는 우리가 들어설 때부터 강렬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간이라도 보려는 건가.

    난 내 뒤에 서 있는 이들을 위해 마주 기운을 끌어 올렸다.

    키깅-

    뇌령을 회전시켜 기운을 끌어 올린다.

    뭐 싸우자는 건 아니니 눈에 보일 정도는 아니고 딱 상대의 기운을 밀어낼 정도로만.

    쿠궁-

    내 가슴께를 중심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기파가 퍼진다.

    “재밌군.”

    그도 그걸 느꼈는지 진한 미소를 띤다.

    “그쪽도.”

    짧은 시선 교환 후 천천히 상대의 기세가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나도 그에 맞춰 천천히 기운을 흩트렸다.

    왕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그는 거대한 손바닥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내 이름은 황금 갈기.”

    노란빛의 털.

    검은색의 줄무늬.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

    나보다 족히 1.5배는 커 보이는 거대한 덩치.

    수인족 중에서 전투력을 따지면 항상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종족이고.

    그는 그 종족의 정점이다.

    “호인(虎人)족의 대장로이자 수인 왕국의 왕이오.”

    짧지만 자신감이 묻어나오는 자기소개다.

    ‘그런데 왜 호랑이 수인인데 이름이 황금 갈기지.’

    그런 의문이 든 것도 잠시.

    나도 이어서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뇌신의 아들이자 폴그룬의 왕. 이름은 이호진이오.”

    으. 역시 하오체는 오글거린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무덤덤하게 그를 보았다.

    “그럼…….”

    그는 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식사부터 하시는 게 어떻소?”

    “그거 아주 반가운 말이군.”

    황금 갈기가 한 번 더 호탕하게 웃었다.

    그만 좀 웃어라. 정들라.

    * * *

    황금 갈기는 내 생각보다 훨씬 호탕한 남자였다.

    그는 다른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블린들도 불러서 한 번에 식사하자고 했고, 나는 좋다고 했다.

    황금 갈기도 몇몇 수인들을 자리에 불렀다.

    그래서 기다란 식탁에는 수인과 우리 일행을 포함해 스물이 넘는 이들이 앉아 있었다.

    “그럼 들지.”

    황금 갈기가 먼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큼지막한 고기를 집어 든다.

    닭 종류의 동물 같은데, 그 크기가 내가 아는 것보다 세 배는 컸다.

    덥석.

    그런 걸 황금 갈기는 한 손에 들고 먹고 있다.

    “케르륵.”

    고블린들도 자신의 앞에 놓인 고기를 신나게 먹기 시작한다.

    음.

    우리 부족에서 밥 먹을 때랑 비슷하구나.

    나도 고기를 손으로 잡아 뜯어 가며 조금씩 먹었다.

    의외로 화린도 별 거부감 없이 열심히 먹고 있다. 하긴 모험가 일 하다 보면 이런 거 신경 쓸 틈도 없지.

    난 먹으면서 수인들을 찬찬히 보았다.

    우선 황금 갈기와 아까 전 보았던 하얀 발톱.

    그 외에 9명의 수인이 더 있다.

    우선 여우, 개, 토끼. 이 세 명은 짐승의 모습이 뚜렷해 알아보기 쉬웠다.

    거의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동물 같은 느낌이다.

    반면에.

    저 여자는…….

    새인가? 무슨 새인지는 모르겠다. 대충 조인(鳥人)족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표범도 있고, 곰도 있다.

    이 셋은 살짝 인간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런데 나머지 셋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인간 모습에 동물 귀랑 꼬리만 붙여 놓은 느낌이라.

    하여튼 다들 식사에 열중하느라 별다른 얘기는 오가지 않았다.

    나도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크흠.”

    잠시 후 식사가 끝날 때쯤 황금 갈기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몇몇 수인들이 커다란 항아리와 잔을 들고 왔다.

    “술은 좀 하시오?”

    황금 갈기가 나를 보며 물었다.

    “뭐 그런 질문을.”

    그는 씩 웃었다. 황금 갈기는 완전히 동물의 형태에 가까웠는데, 웃는 걸 볼 때마다 좀 신기했다.

    호랑이의 얼굴인데 얼굴의 근육과 신경만 인간과 같은 느낌이랄까.

    “그럼 한잔 받으시오. 얘기하는데 술이 빠질 수 없지.”

    황금 갈기는 직접 나에게 잔을 건네고 술을 따랐다.

    사실 말이 잔이지 거의 대접과 비슷한 크기다.

    철우 형이나 크룩이 있었으면 엄청나게 좋아했겠군.

    “감사합니다!”

    …화린이 밝은 얼굴로 술을 받는 걸 보니 그런 생각에 더욱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물론 이 자리의 수인들도 모두 술을 좋아하는 기색이다.

    “자, 그럼 먼 곳에서 찾아온 폴그룬의 왕과 신하들을 위하여!”

    “위하여!”

    국가 회의보다는 무슨 회사 회식 자리를 온 느낌인데?

    그런 생각과 별개로 나도 술을 쭉 들이켰다.

    “크으.”

    철우 형이 가져왔던 것보단 덜하지만 이것도 제법 강하다.

    우리는 술을 몇 잔씩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곧 다들 근처에 앉은 이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의외로 모두 인간의 언어를 사용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내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황금 갈기가 말했다.

    “이들은 각 종족의 장로 혹은 대전사요. 나이도 꽤 많고. 그런 만큼 인간을 자주 접해 봤지. 나도 그랬었고.”

    “그렇군.”

    그리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수인이 인간을 접하는 건 좋은 경우보다 안 좋은 경우가 더 많으니까.

    “하하. 신경 쓰지 마시오. 어차피 다 과거의 일이니.”

    그는 손사래를 치며 웃어 보였다.

    그 후로도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좀 더 경직돼 있을 줄 알았는데.’

    난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보았다.

    수인들이 자유분방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더하다.

    ‘여유인가.’

    황금 갈기에게선 자연스럽게 강자의 풍모가 흘러나오고 있다.

    어쩌면 이런 분위기도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이들을 휘어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 나온 여유일지도.

    난 훅 올라오는 술기운을 해소하면서 황금 갈기에게 말했다.

    “편지는 잘 보았소?”

    바로 본론이다.

    겉치레는 필요 없어 보이니까.

    “흐음.”

    황금 갈기는 나보다 두 배는 커다란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렇지. 재미있는 내용이었소.”

    “재미라. 그렇다는 건 흥미도 있다는 얘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는 나를 빤히 보았다.

    인간처럼 표정이 풍부하긴 했지만, 그가 마음을 먹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그냥 호랑이가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뿐.

    “그래서 답은?”

    “글쎄.”

    내 질문도.

    그의 대답도 아주 짧다.

    주변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별개로 우리는 조용히 서로를 응시했다.

    허례허식도 싫어하는 양반이 쓸데없는 기 싸움은 좋아하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도 있지 않소?”

    “그렇지. 그런데 친구를 하기엔 우리가 너무 아는 게 없지 않나?”

    “에이. 같이 잔을 나누면 친구인 거지.”

    “그것도 맞긴 한데.”

    그르릉.

    그가 낮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웃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황금 갈기는 뜨거운 눈빛으로 날 보며 말했다.

    “한번 몸이라도 섞어 봐야 하지 않나?”

    “뭐?”

    이건 뭔 개소리야.

    “모, 몸을 뭐요?”

    “뭐긴, 우정은 스치는 살결과 진한 땀 냄새. 그리고 거친 호흡으로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여전히 내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자 황금 갈기도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말했다.

    “그 한번 쌈박질이라도 해 보자는 거요. 이건 맞는 표현인가?”

    아…….

    그의 말이 너무 유창하다 보니, 언어가 본래 다르다는 걸 잊고 있었다.

    “아, 이해했소. 쌈박질.”

    그래, 쌈박질을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지.

    “그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쾅-!

    그때 별안간 문이 부서지듯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곳에는 황금 갈기와 똑 닮은 호인이 서 있었다.

    “아버지!”

    황금 갈기는 얼굴을 찌푸렸다.

    “여긴 공식 석상이다.”

    “아. 저, 전하. 큰일 났습니다.”

    그는 여전히 마땅치 않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말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황금 갈기의 아들로 보이는 수인은 바로 입을 열었다.

    “묘족의 대장로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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