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설마…….”
“응.”
화린에게 굳이 지금 수인 왕국에 관한 얘기를 한 건 이유가 있었다.
“사실 수인 왕국에 미리 연락을 넣어 뒀었어.”
무작정 찾아갈 수는 없으니까.
즉위식을 준비하는 동안 펜리르에게 왕국을 찾아 갔다 오라고 했었다.
내가 쓴 편지를 들고 말이다.
다행히 돌아온 대답은 호의적이었다. 돌아온 편지에는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다고 써져 있었다.
그 결과 이번 수인 왕국행이 결정된 거다.
“너를 포함해서 약 열 명 정도 같이 수인 왕국으로 갈 거야.”
그녀도 수인 왕국에 가는 파티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철우 형도?”
“아니, 그 형은 여기서 할 일 있어서. 저번에 봤던 케륵이랑 너. 그리고 사제 몇 명이랑 같이 갈 거야.”
“으음…….”
화린은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짐은 간단하게 싸면 되나?”
“응. 어차피 식량 같은 건 마차에 따로 실어서 갈 거니까. 옷이나 그런 것만 인벤토리에 잘 챙겨 놔.”
“알았어.”
그 얘기를 끝으로 잡담을 좀 더 나누다가 화린이 먼저 나갔다.
나도 곧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신전의 바깥쪽으로 걸어 나가니 구수한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어, 그래.”
신전의 앞에 커다란 냄비에 국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주민들은 길게 줄을 서서 작은 바가지에 냄비의 내용물을 한 국자씩 받아 갔다.
‘역시 설렁탕이구나.’
고기가 둥둥 떠 있는 하얀 국물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곳으로 다가가자 국물을 퍼 주던 고블린이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한 그릇 드시겠습니까?”
“응. 고마워.”
나도 그에게 한 그릇을 건네받고서 신전의 제일 위 계단에 걸터앉았다.
‘다음엔 다른 음식도 좀 알려 줘야겠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고, 맛도 있다지만 계속 이것만 먹으니까 좀 물리는 느낌이다.
후루룩-
난 국물을 마시며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았다.
종종 내게 예를 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전쟁이 많은 만큼 평소에도 규율을 빡세게 해야 하지 않을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고블린과 오크를 주축으로 결성된 집단이라 그런지 규율이라는 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존경심, 신앙심과는 별개로 그들은 크게 예의를 지키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으, 전하. 좋은 아침입니다.”
가만히 설렁탕을 퍼 먹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좋은 아침.”
난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었다.
“으으. 전하는 괜찮으십니까?”
“멀쩡하지. 자네도 저기 가서 설렁탕이나 한 그릇 받아오게.”
“알겠습니다.”
그는 바로 냄비 쪽으로 다가가 설렁탕을 받아 왔다.
나는 턱짓으로 신전의 안쪽을 가리켰고, 그가 따라오는 걸 확인하고서 신전 안의 방 하나에 들어갔다.
“와, 너는 그렇게 마시고 숙취도 없냐?”
“뭐, 그 정도 마신 거 가지고. 형이야말로 너무 약해진 거 아니에요?”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철우 형은 퀭한 안색으로 설렁탕을 연신 퍼 먹었다. 아주 다 죽어 가네.
“후아. 야, 그거 몇 도인지나 알아? 난 어떻게 침대에 누웠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나이 먹어서 그래. 나이 먹어서.”
철우 형은 내 농담에 고기를 우걱우걱 씹으면서도 날 노려봤다.
“야! 넌 나이 안 먹을 것 같냐? 자꾸 나이 타령이야.”
“예. 예. 알겠으니까 설렁탕이나 마저 드세요.”
난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깔끔하게 비운 그릇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이 빈 그릇을 내려놓았다.
“이제 왕의 길 퀘스트 떴겠네?”
철우 형은 곧바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골수 게이머였던 그가 왕의 길 퀘스트를 알고 있는 건 당연한 일.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그렇죠.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네요.”
“흠. 너 그거 전작에서는 다 깼었냐?”
“깼긴 했죠. 근데 조건도 좀 바뀐 것 같더라고요. 더 빡빡해졌어요.”
“그건 안 좋네. 그래도 플레이어 중에 우리만큼 앞서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걸?”
“그건 그렇죠.”
다른 플레이어들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건 없지만, 지금 내 성장세는 전작과 비교해도 엄청나게 빠른 편이다.
이를 테면 축캐라고 해야 하나.
VVIP 팩과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 남들로 치면 기껏해야 족장급일 시기에 왕위에 오른 거다.
하지만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건 아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 생각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기 때문이다.
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문제는 전략가죠.”
철우 형도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똑같이 인상을 썼다.
“그거 다시 한 번 보여 줄래?”
“네.”
난 인벤토리에서 마물의 가죽 조각을 꺼냈다.
“으으음.”
철우 형은 그것을 집어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가죽에는 마법진처럼 보이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후우.”
철우 형은 고개를 내저으며 가죽 조각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렸다.
“벌써 마물을 부릴 정도면 놈도 최소 대족장급 이상이라는 거겠지?”
“어쩌면 이미 왕급 이상일지도 몰라요.”
“그렇지… 특히 악마 진영은 성장이 빠르니까.”
전략가.
놈은 전작에서 악마 진영에 속해 있던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악마와 마물, 어둠에 대항하는 인류 진영.
반대로 인류를 적대하는 악마 진영.
게임사에서 확실하게 나누어 놓은 것은 아니었으나 유저들은 보통 그렇게 불렀다.
인류 진영에 유명한 플레이어가 나를 포함해 서너 명이 있던 것처럼 악마 진영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다.
“랭킹 3위. 테이밍, 소환 계열 최고 랭킹. 그런 타이틀을 가진 놈이 저보다 못하리라고는 생각 안 해요.”
“그렇지.”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내가 맨 처음 랭커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건 벨루곤에서 제크, 그리고 페일과 만났을 때였다.
인류 진영 랭커 다섯.
악마 진영 랭커 넷.
총 아홉 명.
내게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을 조기에 미리 파악하기 위해 제크에게 그 조사를 맡겼다.
그 결과 가장 먼저 소재를 파악한 게 바로 전략가다.
정확히 말하면 겨우 그 존재 여부만 알게 된 거지만.
난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는 전략가랑 상성이 안 좋아요. 형도 알고 있죠?”
“응. 전작에서의 클래스였다면 모를까. 지금은 좀 힘들지.”
전작에서의 내 클래스는 기사/귀족 계열이었다.
처음부터 인류 진영에서 스타트한 만큼 다른 나라나 종교들에 꽤 영향력이 있는 편이었다.
한데 지금은 난 완전한 인류 진영에 속해 있지도 않다.
다른 세력에 대한 영향력이라고 해봤자 겨우 마틴, 그림자 요정이 끝.
억지로 추가해 봤자 잊힌 신의 교단뿐이다.
“최소 세력 세 개 이상이어야지.”
“그렇죠.”
내가 상성이 좋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전략가의 특성 때문이다.
놈은 전작에서 가장 먼저 고위 악마와 계약하는 법을 알아낸 유저다.
그 결과 악마 진영에서 순식간에 고위층에 올라섰고, 그 영향력을 이용해 막대한 물량전을 펼치곤 했다.
“역시 지금 당장 해결책은 없네. 어차피 놈도 아직 서부 전선 쪽에 있을 테고.”
“후. 그렇죠.”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내젓고서 향후 계획을 되짚었다.
한참을 얘기를 나눈 후에야 나는 빈 그릇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철우 형이 벨루곤으로 모험가들이랑 넘어가서 랭커들 조사 좀 계속해 주세요. 특히 팔라딘이랑 성후는 꼭 찾아야 해요.”
“그래, 전쟁 시작될 것 같으면 바로 부르고.”
“네. 수인 왕국 갔다 와서 봐요.”
“응. 조심히 갔다 오고.”
우린 같이 방 밖으로 나갔다.
전략가에 대한 대비도 게을리할 순 없지만,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건 변경백이다.
앉아서 머리 싸매고 있어 봤자 해결될 것도 없고. 지금 닥친 일부터 하는 게 낫다.
우선 첫 단추를 잘 끼우고 나면 또 다른 길이 보이겠지.
* * *
“탈로스, 그럼 내가 다녀오는 동안 고생 좀 해 줘.”
“문제없지. 맡겨만 둬.”
탈로스가 거대한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친다.
그에게는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도시 폴그룬의 전반적인 개보수를 부탁해 두었다.
철우 형은 어제 이미 모험가들과 벨루곤으로 떠나서 없고, 크룩만이 사제들과 함께 우리를 배웅해 줬다.
“크룩도 애들 빡세게 굴리고 있어. 힘들다고 봐주지 말고.”
“크루룩. 걱정하지 마십쇼. 갔다 오시면 몰라볼 정도로 바뀌어 있을 겁니다.”
크룩도 어금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씩 웃으며 말했다.
이미 얘기는 전날에 다 끝냈기에 간단한 인사만 하고서 우리는 성을 나섰다.
성에서 좀 떨어졌을 때 네 뒤에 앉아 있는 케륵이 말했다.
“케르륵.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 신납니다.”
-나도!
-저도 그렇습니다.
케륵이 말하고 나니 펜릴과 뇌조도 곧바로 끼어들었다.
이번 여정엔 오랜만에 케륵과 펜릴을 포함시켰다.
“와, 근데 이거 진짜 푹신푹신하다.”
내 바로 뒤에 앉아 있는 화린도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슬쩍 아래를 보니 이렌이 부러운 눈길로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펜릴의 등 위엔 딱 세 명만 타 있고, 나머지 여섯 명은 각자 늑대를 한 마리씩 타고 있다.
케륵, 펜릴, 뇌조, 이렌, 화린, 나.
그리고 고블린 사제 다섯 명이 동행했다.
“그나저나 수인과 고블린이 친한 건 처음 알았네.”
“케륵. 잘 안 알려져 있긴 합니다. 전대 주술사님께 들은 바로는 같이 무리를 이뤄 살았을 때도 있었다더군요.”
“그래?”
수인과 고블린의 친분은 파티 멤버를 구성할 때 케륵에게 듣고 나서 처음 알았다.
듣기로는 예전엔 수인족들과 정기적으로 교류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놈의 이무기만 아니었으면 한결 쉬웠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케룩.”
그런 교류가 끊긴 건 이무기 때문이었다.
놈이 마경 외곽에 똬리를 트고서 깽판을 치는 통에 수인들이 더는 마경에 접근하지 않게 됐다고 한다.
나는 화린과 케륵에게 수인들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질문했다.
처음엔 케륵도 이것저것 이야기해 주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주로 얘기하는 건 화린이었다.
“…그래서 고양이 수인이랑 개 수인들은 같은 수인 족인데도 사이가 안 좋은 거야.”
“재밌네. 수인 내에서도 파가 엄청나게 갈리는구나.
“그렇지. 그래서 현재 수인 왕국의 국왕이 대단하다는 거야. 아, 물론 내가 아는 수인이랑 같다면 말이야.”
그녀는 전작에서 수인족과 밀접한 플레이를 했었다.
그만큼 알고 있는 것도 많았고, 아주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작과 완전히 똑같다는 보증은 없지만,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보건데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았다.
“36종을 한데 모은 것 자체가 어마어마하네.”
“응. 무력도 무력이지만 정치력도 장난이 아니란 소문이 있어.”
수인 왕국을 이루는 주력 종족은 총 36종이다.
모두 수인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여 있다지만, 지구에서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차별과 편견이 장난이 아니지 않은가.
수인 왕국에 비교하면 내 왕국은 다인종 국가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다.
키루루루루루-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이동하고 있는데 하늘 높이 날고 있던 뇌조가 빠르게 내려왔다.
-아빠!
“왜?”
-수인 왕국이 여기 바로 앞이야?
뇌조의 질문에 난 픽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아직 한참 가야 해.”
벌써 심심해졌나? 생각하며 뇌조를 보는데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러면 저 앞에 있는 수인들은 뭐야?
“응?”
뇌조가 부리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는 펜릴의 등을 딛고 서서 그쪽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자세히 봐봐! 저기 있잖아!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텅 빈 황무지만이 있었다.
난 당황해하면서도 그녀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용안을 사용했다.
‘용안 개방.’
눈 위로 황금빛이 겹쳐지며 시야가 확 달라진다.
그리고 난 그제야 그녀가 말한 게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갈색빛으로만 보이던 황무지 바닥에 열댓 개의 실루엣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신기한 건 맨눈으로 봤을 땐 바닥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생김새라는 거다.
‘아!’
난 뒤늦게 한 종족을 떠올렸다.
그래. 놈들도 분명 수인이긴 수인이다. 다만 수인 사이에서 철저히 배척당하는 놈들이다.
난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놈들을 더욱 주의 깊게 살폈다.
확실히 자세히 보니 놈들의 특징이 확인되었다.
‘네팔루치아의 아이들.’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플레이어들은 그런 어려운 이름보다는 ‘카멜레온’이라고 부르는 편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