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갑작스러울 수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케르륵.”
케륵이 눈을 빛내며 답했다.
작게라도 소란이 일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들 이토록 잠잠한 걸 보니 살짝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다들 궁금한 점이나 반대하는 의견은 없나?”
내가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케륵이 그럴 리 있겠냐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대족장님의 뜻은 곧 신의 뜻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케륵. 게다가 부족이라는 이름은 저희를 대표하기엔 이젠 부족하지요.”
“크룩. 맞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다들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 생각은 했었나 보다.
하긴. 지금은 왕국이나 제국들이 제법 다 규모가 큰 편이긴 하지만, 과거 역사나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우리 정도 규모의 왕국이 없던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제 곧 전쟁을 시작할 거다.
우리가 단순한 야만 부족이 아니라 하나의 ‘왕국’이라는 것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난 케륵에게 말했다.
“케륵.”
“예.”
“코룸에게 연락을 넣어라.”
코룸은 마경 내의 부족을 관리하고 있는 1등급 사제다.
“마경 내의 부족에 최소한의 전투 병력을 제외한 모든 인원을 보내라고.”
“알겠습니다. 케르륵.”
몇 가지 안건에 대해 추가로 더 논의를 하고서 모든 인원을 돌려보냈다.
그 후에 난 홀로 집무실에 남아 통신구를 꺼냈다.
* * *
호진이 폴그룬에 돌아온 지 약 일주일이 지났다.
폴그룬은 왕국 선포 및 호진의 즉위식을 진행하기 위해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후우. 저긴가?”
그리고 폴그룬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약 스무 명이 넘는 인간들이 걷고 있다.
무리의 맨 앞에 서 걷고 있는 사내는 혼잣말을 하더니 뒤를 돌아 물었다.
“저기 맞나?”
그의 뒤에 서 있는 날렵한 몸을 가진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럴드 님이 알려 주신 좌표와 일치합니다.”
“그렇군.”
게럴드. 즉, 철우는 흥미로운 눈으로 높다랗게 솟은 성벽을 보았다.
‘놀라지 말라더니.’
철우는 호진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놀라지 말고, 기죽지 말라 했던가.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직접 보니까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량한 들판 가운데 우뚝 솟은 성이라니.
누구인지는 몰라도 대단한 사람 밑에 있나 보구나, 라고 철우는 생각했다.
호진이 아직, 자신이 벼락 부족의 족장이라느니 하는 사실들을 전혀 말해 주지 않았기에 여전히 진실을 모르는 철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철우는 기대와 걱정이 반반 섞인 얼굴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철우의 뒤에 따르는 인원들은 모두 모험가 연합 소속의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수도 벵칼만이 아니라 다른 도시, 멜리움 왕국, 심지어 제국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모두 금 등급 모험가 게럴드의 명성을 보고 따라온 이들이다.
그들은 철우보다 더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 하나만을 보고 따라온 것이기에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가 많았다.
그들이 부지런히 걸어서 폴그룬의 성벽 가까이 갔을 때엔 그 불안감은 극대화됐다.
“게, 게럴드 님.”
유난히 시력이 좋아 정찰 임무를 주로 수행하는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봤다.”
철우는 굳은 얼굴로 성벽 위를 보았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성벽에 갑자기 일단의 무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오크와 고블린이 섞인 무리였는데, 기백이 넘는 이들이 그들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그 기세도 기세지만, 체격조차도 일반적인 몬스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랗다.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이들의 평균 전력이 높더라도 성벽 위에서 저만한 인원이 활을 쏴 댄다면 버틸 재간이 없다.
왜 바로 활을 쏘지 않은지는 몰라도 도망치려면 지금 당장 몸을 빼야 했다.
“잠깐 기다려.”
철우는 굳은 표정으로 양손을 풀면서 성벽 쪽으로 다가갔다.
휘하 인원들을 모두 지킬 자신은 없지만, 자신 혼자라면 적어도 다치지 않을 자신은 있었기 때문이다.
‘몬스터에게 점령 당한 건가?’
철우가 호진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5일 전이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 연락을 넣긴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단순히 바쁜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사이에 변고가 있었을지도.
철우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성벽 위에 있는 몬스터들의 기세는 흉흉했다.
‘상황만 파악한다.’
목표는 성내의 상황을 확인하고 다시 몸을 빼는 것.
철우가 그런 결심을 하며 성벽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데, 갑자기 성벽 위의 상황이 급변했다.
웅성웅성-
무언가 저들끼리 떠들더니 갑자기 가운데에 있는 이들이 양쪽으로 싹 물러나기 시작한 거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데, 그 사이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왔군!”
제법 거리가 있는데도 그 사내의 목소리가 철우의 귀에 생생하게 와닿았다.
철우는 황당, 반가움, 의아함 등등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곳엔 호진이 서 있었다.
“빨리 들어오게! 성문을 열어 둘 테니.”
호진은 철우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선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에게 활을 겨누고 있던 몬스터들도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뭐지?’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철우는 황당함을 느끼면서도 일행에게 손짓을 해 불러들였다.
“들어가자.”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누군가가 눈을 동그렇게 뜨고서 질문했다.
철우는 몇 번 입을 달싹이더니 곤란한 어투로 말했다.
“…그건 들어가보면 알 거다.”
그도 모르는 것을 설명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주변을 경계하면서 조심스럽게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으음.”
누군가가 성의 내부를 보고선 앓는 소리를 내었다.
소리를 낸 건 그뿐이지만 느끼는 감정은 모두 비슷비슷했다.
오크, 고블린, 트롤, 인간 등등. 다양한 종족들이 한데 섞여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여러 종족이 한 도시에 거주하는 게 아예 없는 경우는 아니다. 벨루곤도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엄연히 보이지 않는 선이라는 게 있다.
특히 오크, 고블린, 트롤 다 인간들이 ‘몬스터’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경원시하는 종족들.
같은 인류보다는 ‘노예’로 더 친숙한 종족들이다.
“까르륵.”
하지만 이곳에선 오크 아이와 인간 아이가 같이 뛰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거기! 거기 조금 더 올려 봐!”
오크가 인간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흔히 보였다.
그야말로 그들의 상식이 무너지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얼떨떨해하면서도 큰길을 따라서 쭉 걸었다.
큰길의 끝에 있는 신전에 호진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전력의 일부만 보여 줬던 건가.’
철우는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는 호진을 올려다봤다.
호진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상급자는?’
그는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성내의 구성원들은 모두 호진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건물 안에 있는 건가?’
길을 걷는 짧은 순간에도 철우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그들이 신전의 계단을 오를 때에야 호진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반겼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철우.”
“호진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호진은 철우를 본명으로 불렀다.
철우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공적인 자리에선 엄연히 그들은 상급자와 하급자. 둘이 있을 때처럼 격 없이 인사를 나눌 수는 없었다.
“지금 좀 바빠서 그런데 안에 먼저 들어가 있게나. 여기 대사제 케륵이 안내해 줄걸세.”
“알겠습니다.”
철우는 짧게 대답하고서 호진이 가리킨 이를 보았다.
그곳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법복을 입은 고블린이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케르륵. 안으로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철우는 다시 한 번 예의바르게 고개를 꾸벅였다.
그들은 열심히 지시를 내리고 있는 호진을 지나쳐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종족을 가리지 않는 집단이군.’
신전 안에는 종족을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하긴. 다종족 집단이 없던 것도 아니지. 오히려 나중을 생각한다면 종족을 가리지 않는 집단이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기가 쉬워.’
이 세계엔 순혈주의자. 분리주의자 등등. 타 종족을 차별하는 이들이 많았다.
단순히 개인의 가치관 수준이 아니라 국가 단위로 그것을 공식화해 놓는 곳도 많았으니.
종족 주의. 순혈 주의. 그런 게 꼭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이곳은 21세기 지구처럼 겉으로나마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곳은 오래 버티지 못했지.’
다만, 그런 곳들은 단점 또한 뚜렷했다.
나라가 멸망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도 타 종족을 배척하고,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도움을 거절한다.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노예들이 들고 일어나 몇 개의 소국으로 찢겨 나간 경우도 있었다.
‘흐음.’
철우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걸었다.
곧 그들이 도착한 곳은 꽤 넓은 방이었다.
방에는 이십 명이 앉아도 넉넉할 정도의 의자가 있었다.
“편하게 쉬시고 계십시오. 케륵.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밖에 대기하고 있는 사제에게 말하면 됩니다.”
케륵은 그렇게 말하고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철우와 모험가들은 우선 의자에 앉은 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제법 화려한걸.’
응접실로 보이는 방은 꽤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저건 정말 금인가?”
모험가 한 명은 방 한쪽에 있는 커다란 동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만 한 크기의 동상은 겉이 전부 황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종잡을 수 없군.’
철우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이 도시는 여러모로 기묘한 곳이었다.
철우가 고민하는 동안 긴장감에 굳어 있던 모험가들도 슬슬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얘기를 나누던 도중 모험가 한 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게럴드 님. 저희는 오크나 고블린들이랑 같이 일하는 겁니까?”
다분히 부정적인 감정이 섞인 질문이었다.
플레이어인 게럴드는 타 종족에 대한 편견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확 긍정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애초에 호진조차도 처음엔 고블린이나 오크 등에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 않았던가.
철우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
그는 일부러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그도 자세히 모르지만, 이들을 책임지는 입장에 있는 만큼 그 자신마저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슬슬 아무런 언질도 없었던 호진에 대한 원망을 느꼈다.
‘이럴 거면 뭐라고 말이라도 해 주지.’
그런 속마음과 별개로 게럴드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모험가들 중 불만스러운 얼굴을 내비치는 이도 있었지만, 게럴드의 그런 태도에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진 않았다.
끼익-
그렇게 모두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철우.”
바로 호진이었다.
“그리고 모두.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네.”
그는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모두 호진이 게럴드보다 높은 상급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런데 잠시 철우는 나랑 따로 얘기 좀 하지.”
“알겠습니다.”
철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진은 그가 나오는 걸 기다렸다가 앞서서 복도를 걸었다.
둘은 잠시 동안 말없이 쭉 걷기만 했다.
한참 후. 호진이 입을 열었다.
“철우 형.”
“예.”
“둘이 있을 땐 반말하세요. 삼촌뻘인 분한테 존댓말을 듣는 건 조금 그러네요.”
그의 장난기 섞인 말에 철우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진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아무런 말도 안 해서 좀 불편하셨죠?”
“뭐. 말 안 한 이유가 있었겠지.”
철우는 여상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속마음을 그대로 내비치기엔 지나온 세월이 있었으니.
호진은 약간의 텀을 두고서 느릿하게 말했다.
“네. 이유가 있었죠.”
단순히 철우에게 미리 언급을 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그가 바하트리스로 향할 때 굳이 가명에다가 얼굴까지 바꿔야 했던 이유.
호진은 느릿하게 그 이유를 말했다.
“아무래도 주변에 ‘전략가’ 그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략가.
벨루곤에서 제크와 이야기했던 그 남자의 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