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날카로운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말이나 마차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속도.
또한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승차감이다. 다만 이건 안 좋은 쪽으로 비교가 안 된다.
“우욱.”
옆에서 누군가는 토기가 치솟는지 헛구역질을 하고 있다.
“죽여 줘…….”
벤이구나.
슬쩍 보니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있다.
“조금만 참아요!”
난 새삼 해맑게 응원을 해 주었다.
사실 벤이 가장 상태가 안 좋을 뿐. 화린과 칼 또한 그리 멀쩡해 보이진 않았다.
왜냐하면 우린 지금 늑대를 타고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말을 타고 벨루곤을 나섰었지만, 중간쯤에 케륵이 보낸 늑대로 갈아탔다.
나야 맨날 펜리르를 타고 다녀서 괜찮지만, 늑대를 타는 경험이 흔하진 않을 테니까.
난 다시 고개를 돌려서 앞을 봤다. 너른 평야가 앞으로 펼쳐져 있다.
휘이잉-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 오랜만에 남의 눈치 안 보고 달리고 있으니 상쾌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이제 약 한 시간 정도만 더 달리면 폴그룬이다.
우리는 계속 달리다가 어느 정도 가까워진 것 같다고 생각될 때 내가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잠깐 여기서 쉬고 가겠습니다.”
수신호를 보내니 늑대들이 천천히 속도를 늦춘다.
저 늑대들은 펜리르처럼 영수의 일종. 간단한 수신호는 알아들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태우고 있긴 하지만 저들은 내 명령만 듣는다.
나는 주먹을 꽉 쥐어서 늑대들에게 완전히 멈추라고 명령했다.
“으우욱.”
늑대가 완전히 멈추자마자 벤은 황급히 내려서 바닥을 짚었다.
“으음.”
등이라도 두드려 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고개를 돌렸다.
알아서 해결하겠지.
“곧 있으면 도착하는 건가?”
칼도 늑대에서 내리며 내게 물었다. 그도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예. 이제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왜 멈춘 거야?”
화린도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벤 씨도 오면 말할게요.”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벤이 오길 기다렸다.
당연한 거지만 단순히 쉬기 위해서 멈춘 건 아니었다.
“으으. 나 기다리고 있었어?”
한참 바닥을 붙잡고 있던 벤이 비척거리며 돌아왔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본론을 꺼냈다.
“이제 우리는 도시 폴그룬으로 들어갈 겁니다.”
“흐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에게는 어떤 도시로 갈 거라고만 얘기했지, 그곳이 뭐 하는 곳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물론 그곳이 벼락 부족의 본거지라는 것과 내가 부족의 대족장이라는 것도 전혀 모른다.
“우선.”
난 손을 들어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갑갑했던 느낌이 사라지며 피부에 시원한 바람이 와닿는다.
화린이야 이미 한번 봤지만, 처음 내 맨얼굴을 보는 벤과 칼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본래 제 얼굴입니다.”
“그, 변장하고 있었던 건가?”
칼이 내 손에 들린 인피면구를 보며 물었다.
“예. 이걸로요.”
난 그걸 살랑살랑 흔들었다. 생긴 건 그냥 마스크팩 같지만, 얼굴에 붙이면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난 인벤토리에서 아이템들을 하나하나 꺼내 착용했다.
파측-
뇌룡갑과 뇌룡창에서 푸른빛의 전격이 튀어 오른다.
“도시에 도착하면 놀랄 일이 조금 많을 겁니다.”
뇌룡창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등에 비뚜름히 맸다.
“음. 그리고 세 분 모두 게럴드 씨의 밑에서 일하는 거긴 하지만, 게럴드 씨는 이제 제 밑에서 일할 겁니다.”
멍하니 나를 보고 있던 세 사람은 내 말에 또 한 번 놀란다.
“즉, 세 분도 제 밑이라는 거죠.”
“그건…….”
“이건 제안 같은 게 아닙니다. 통보죠. 만약 마음에 안 드시면 다시 돌아가셔도 됩니다.”
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벤과 칼에게 나쁜 감정이 있다거나 한 건 아니다.
단지 그들에게 확실히 알려 주는 것뿐이다. 부족으로 돌아가서도 이들에게 좋게 좋게 대해 줄 수는 없으니까.
“알았, 알겠습니다.”
칼은 비교적 빨리 수긍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내게 예를 표했다. 벤도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수다. 대장이라 부르면 되는 거요?”
불퉁한 말투이긴 하지만, 뭐 저건 철우 형한테도 그랬었으니까.
“아니, 호칭은 가서 알려 주지.”
뇌룡갑과 뇌룡창을 착용한 것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거다.
원래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민감하니까.
허름한 가죽 갑옷을 차고 있는 것과 척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있어 보이는 갑옷을 차고 있는 건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럼 이제 바로 도시로 들어간다. 다들 어느 정도는 긴장하고 있도록.”
난 다시 늑대에 올라탔다.
다른 이들도 모두 늑대에 올라탄 걸 확인하고선 도시를 향해 달렸다.
약 십 분 정도를 달리고 나니 저 멀리에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아니, 저건 또 뭐야?
분명 익숙한 모습일 거로 생각했는데, 폴그룬은 내 기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가장 높게 솟은 성벽 외에도 바깥으로 세 겹의 성벽이 더 솟아 있다.
이번 명월 때 개조를 해 놓은 건가?
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계속해서 늑대를 타고 달려갔다.
마침 성벽 위에 걸어 다니던 보초들도 날 봤는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타닥- 탁!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둔중한 발소리.
허공에서 은빛의 형체가 불쑥 나타난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바로 펜리르였다.
늑대의 등을 툭툭 치자 녀석은 바로 펜리르의 앞에서 멈춰 섰다.
“자식. 마중 나온 거냐?”
-헤헤. 오랜만에 오셨는데 절 타고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펜리르는 내가 올라타기 편하도록 납작 엎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난 피식 웃으며 녀석의 목 부근을 타고서 등에 올라갔다.
안장 아이템이 착용되어 있어서 그런지 승차감 자체가 남달랐다. 털 덕분에 푹신푹신 하기도 하고.
“역시 승차감은 네가 최고다.”
-감사합니다!
펜리르도 완전히 탈것으로서 세뇌됐는지 해맑게 감사 인사를 했다.
“가자.”
우리는 성문 안으로 쭉 들어갔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탈로스의 얼굴이었다.
“오, 자네 왔는가.”
“오랜만이야. 이번에 고생 좀 했겠어?”
“허허. 말도 하지 말게. 그냥 다 팽개쳐 두고 숲으로 돌아가고 싶거든.”
탈로스와 나는 동시에 싱긋 웃었다. 세 겹이나 되는 성벽만 봐도 그의 고생이 짐작 갔다.
단순히 세우는 것만이 아니라 몰려드는 마물들 때문에 계속해서 보수해야 했을 테니까.
“대족장님!”
그리고 갑자기 탈로스의 옆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손이 텁 성벽을 잡더니 그 위로 크룩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뭐야. 넌 왜 거대화를 쓰고 있어?”
“크루룩. 그게 말이죠. 저 더 커진 거 같지 않습니까?”
크룩은 약간 기대하는 눈빛으로 날 봤다.
그러고 보니 저렇게 성벽 위로 머리가 튀어나올 정도의 키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능력이 강화됐나 봐?”
“그렇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간질간질하더니 불쑥 커지더라고요.”
“하하. 그래. 축하한다.”
크룩은 내가 칭찬을 해 주자 만족스러운 듯 크루룩거리며 콧김을 내뿜었다.
우리는 그 와중에도 세 번째, 두 번째 성벽을 지나쳤고.
드디어 마지막 문 안으로 진입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대족장님 만세-!
만세!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귀가 터질 듯한 환호성에 움찔 놀랐다.
다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모여 있었구나.
너른 성내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인간, 오크, 고블린, 트롤 등등.
종족을 가리지 않고 나를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도 손을 들어 그들의 반응에 화답해 주었다.
환호하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
사라락-
그때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색색의 꽃잎들이었다. 위를 보니 크룩이 잔뜩 신난 얼굴로 꽃잎을 뿌리고 있었다.
해맑은 얼굴로 꽃잎을 연신 뿌리는 크룩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러려고 거대화하고 있었구만.’
덩치와 안 어울리게 귀여운 구석이 있다.
아예 고개를 돌려 뒤에 따라오고 있는 일행들도 보았다.
‘완전히 혼이 나갔군.’
벤과 칼은 안 그런 척 애쓰는데도 표정 관리를 하는 게 힘들어 보였다.
다시 한 번 웃고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정말로 집에 돌아왔구나.’
중앙에 있는 신전 안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도 환호성은 멈추지 않았다.
난 펜리르의 몸에서 내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크룩은 그렇다 쳐도 어느새 케륵도 내 옆에 따라붙어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별일은 없었어?”
“예. 족장님이 시키신 일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다행이네.”
나는 여전히 멍한 얼굴인 벤과 칼, 화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들은 내 중요한 손님들이야. 각자 방과 간단하게 갈아입을 옷 좀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케르륵.”
“아, 그 전에 목욕탕에서 목욕부터 하게 해.”
“예! 케륵.”
난 간단하게 지시를 내리고서 바로 중앙에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 들어가 앉으니 케륵과 크룩이 불렀는지 순식간에 중요한 인물들이 들어와 앉았다.
“그럼. 간단하게 내가 없을 동안 있었던 일 보고해 줘.”
“예. 케륵.”
케륵은 명월 기간 있었던 피해 상황 등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저번 수정 구슬로 들었던 보고대로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마지막 날엔 조금 위험한 상황도 있었지만, 이렌과 엘 리 등이 제때 도착한 덕분에 적은 피해로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렌과 엘 리 등을 비롯해 일행들을 먼저 보냈던 게 옳은 선택인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케륵과 크룩도 집무실로 들어왔다.
난 모인 이들의 면면을 확인하고서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엔 내 귀환 겸 위험한 시기를 잘 넘긴 걸 기념할 겸 술이랑 음식 좀 풀지.”
“알겠습니다.”
가장 말석에 앉아 있는 남자가 대답하며 내 말을 받아 적는다.
프란츠라고 했던가.
헥터와 함께 몇 안 되는 인간 사제 중 한 명이다.
헥터가 특유의 넉살과 친화력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면서 경계심을 푸는 역할이라면.
프란츠는 꽤 영리하게 머리를 쓸 줄 아는 남자다. 아직 완전히 부족에 녹아들지 못한 인간들을 포섭하는 다양한 방안을 보고했다고 들었다.
“인간 측은 헥터, 프란츠. 둘에게 맡길게. 오크들과 트롤들은 벨콘 네가 맡고.”
“예! 크루륵.”
벨콘은 오크족 사제다.
듣기로는 이번 명월 기간 꽤 용맹하게 싸웠다고 한다. 그래서 사제 직급을 한 단계 올리는 것도 고려 중이다.
“좋아. 뭐. 케륵과 크룩이 워낙 시킨 대로 잘 관리해 줘서 내가 신경 쓸 만한 건 별로 없네.”
“케르륵. 대족장님이 잘 이끌어 주셔서 문제없이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크루룩.”
케륵과 크룩이 바로 겸양의 말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난 픽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둘에겐 내가 따로 포상을 내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케륵.”
탁. 탁.
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현재 폴그룬에는 마경 내에 있는 제1부족을 제외한 대부분 인원이 모여 있다.
굳이 미룰 이유도 없고.
나는 시스템 창을 띄워서 마지막으로 출력됐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왕국으로 승급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벼락 부족으로 돌아가 승급 의식을 진행해 주세요.]
왕국.
그래 왕국이다.
부족과 대부족을 거쳐 슬슬 왕국으로 넘어갈 시기이다.
완전한 건 아니지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주일 후 우리 부족을 왕국으로 개편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