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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97화 (97/170)
  • 97화

    나는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내를 지목하며 물었다.

    지목당한 사내는 바로 허리를 펴며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자칼 조직의 마크라고 합니다!”

    아. 자칼.

    그러고 보니 저번에 한번 봤던 얼굴 같기도 하다.

    난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미 동료들, 특히 화린은 대놓고 게슴츠레 눈을 뜨고서 날 보고 있었다.

    “그래. 왜 왔는데.”

    “아. 두목, 아니 제크 형님이 마중 나가 있으라고 해서 왔습니다.”

    형님은 무슨. 딱 봐도 서른 살은 넘어 보이는 놈이.

    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또 뭐 시키던?”

    “넵. 저번에 묵으셨던 꿈꾸는 달 여관에 방 네 개를 잡아 뒀는데, 그쪽으로 모셔다 드리라고 들었습니다.”

    “됐어.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찾아갈 테니 너넨 돌아가라.”

    “알겠습니다!”

    마크는 다시 우렁차게 대답하며 허리를 푹 숙였다.

    뒤에 서 있던 사내들도 모두 그를 따라서 다시 구십 도 폴더 인사를 한다.

    그래. 너희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돌아갈 때도 우르르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럼 가 볼까요?”

    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응.”

    “그러지.”

    “너 엄청 능력 있는 놈이었구나!”

    “예. 예. 갑시다.”

    마지막 벤의 말은 살짝 무시하고서 바로 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크 놈. 이건 분명히 엿 먹으라고 한 짓이다.

    두고 보자, 이 자식.

    난 속으로 놈을 씹으며 걸었다.

    성문에서도 그리 멀지 않아서 금세 여관에 도착했다.

    “오! 생각보다 더 좋은데?”

    벤은 여관에 들어서며 감탄했다.

    하긴 벵칼에서 묵었던 여관도 좋긴 했지만, 이곳에 비교할 바는 못 된다.

    여긴 벨루곤에서도 손에 꼽는 고급 여관이니까.

    “자자. 우선 각자 방에 들어가서 좀 씻자고요. 일주일 내내 밖에 있었더니 다들 꼴이 말이 아니네.”

    나는 일행에게 그렇게 말하고서 점원에게 제크의 이름을 댔다.

    “네. 목욕 넷이요.”

    “그래. 돈은 제크 이름으로 달아 두고.”

    그렇게 말해 두고서 방으로 올라가니 바로 목욕물이 나무통에 담겨 왔다.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아래로 내려가니 예상외의 인물이 있었다.

    “사제님?”

    “아, 진 형제님이시군요.”

    바로 상단에서 봤던 사제였다.

    식사 때 빼고는 거의 마주치지 않았지만, 절로 행동에 품격이 드러나는 여자였다.

    자애와 헌신의 신인 레살라를 모시는 사제답달까.

    “사제님도 이곳에 머무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상단주께서 감사하게도 방을 잡아 주셔서요.”

    “그렇군요.”

    하긴. 이 사제님 정도면 그렇게 하고도 남지.

    지나가다 들은 바에 의하면 마차를 태워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며 보수도 안 받았다고 한다.

    전작을 생각하면 레살라의 사제라고 꼭 인성이 좋은 것도 아니니, 이 사람이 특별한 것이리라.

    “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요. 쉬셔야 하는데.”

    나는 잠시 그녀에 대해 생각하다가 뒤늦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제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형제님의 앞길에 신의 가호가 가득하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녀는 성호를 그은 후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그대로 로비로 나와 빈 테이블에 앉았다.

    “흐음.”

    그런데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그녀를 다시 한 번 만날 것 같은 느낌.

    ‘기분 탓이겠지.’

    난 고개를 저으며 점원을 불렀다.

    “여기 맥주 한 잔.”

    “나도 한 잔 갖다 줘.”

    바로 달려온 점원에게 주문하는데 옆에서 불쑥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그는 날 보며 씩 웃었다.

    “여행은 즐거웠나?”

    바로 제크였다.

    난 그를 보고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말했다.

    “여행은 무슨. 출장이었지.”

    “여행이든 출장이든 나도 밖으로 좀 나가 보고 싶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우리가 티격태격하며 대화하는 사이 시원한 맥주 두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오랜만에 건배나 할까?”

    그는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잔을 들어 올렸다.

    나는 말없이 잔을 부딪치고서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타악.

    “그래서 용건은?”

    “정 없긴. 동향 사람끼리 맥주 한 잔 못하나?”

    “농담하는 걸 보니 아직 여유가 있나 보군.”

    난 손을 들어 맥주 한 잔을 더 시키고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래. 상황이 나쁘지 않긴 하지.”

    우리가 지금 말하는 건 바로 변경백에 관한 이야기였다.

    현재 우리 세력의 중심 도시인 폴그룬은 멜리움 왕국 내에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마하룬 요새까지 함락시킨 후 우리 세력에 복속시킨 상태였으니.

    당장 변경백이 쳐들어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 거다.

    “어째서지? 너희가 일을 잘해서 그렇다는 헛소리 같은 건 하지 말고.”

    제크는 내 말에 피식 웃더니 테이블에 바짝 몸을 기대며 작게 말했다.

    “우선 마하룬 요새의 특수성이 한몫했어. 본래 그 요새는 왕국 내에서 나름 중요한 역할이었지만 약 일 년 전부터는 달라졌거든.”

    “왜지?”

    “그게 바로 변경백 때문이야.”

    나는 의외의 말에 바로 반문하려 했지만, 점원이 맥주를 가져와 잠시 흐름이 끊겼다.

    우리는 맥주를 한 모금씩 들이키며 대화를 이어 갔다.

    “변경백 때문이라는 건 무슨 말이야?”

    “다 말하자면 복잡한데. 우선 멜리움 정세가 근래 몇 년간 혼란한 건 알고 있나?”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작을 플레이해 봤다면 당연히 알 만한 내용이니까.

    멜리움은 전작에서도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내전과 전쟁, 각종 사건으로 혼란스러웠다.

    종래엔 약 네 등분으로 분할되어서 각각 다른 유저들의 세력으로 흡수되기까지 했었다.

    제법 큰 규모의 왕국치고 비참한 최후였었지.

    “그러면 변경백도 그것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은?”

    하지만 다음 질문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표정을 보니 모르는 것 같군.”

    “그래. 처음 듣는 얘기야.”

    나라고 멜리움 왕국의 사정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애초에 전작에서 이곳은 본래 내 주 활동 영역이 아니기도 했고.

    “간단해. 변경백은 야심도 있고, 능력도 있는 인물이야. 그런 그가 작위를 얻자마자 한 일이 바로 마하룬 요새에 대한 공작이었지.”

    “공작?”

    “그래. 대대로 마하룬 요새는 왕국에서 이름난 강자들이 주인 자리에 앉았었거든. 그런데 이번엔 애매한 놈이 주인을 차지한 거야.”

    나는 마하룬 요새에서 봤던 귀족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일개 왕국의 국경 요새 치고 별 존재감이 없는 남자이긴 했다.

    “그것 자체가 변경백이 자신의 국경 지대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려고 한 짓이라는 거지.”

    나는 거기까지 듣고 나서야 제크가 말하려는 걸 전부 이해했다.

    변경백은 일부러 마하룬 요새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 애썼다.

    그리고 우리는 우습게도 그것 덕분에 이익을 얻은 것이다.

    변경백의 무관심이라는 이익.

    “그러면 전에 말했던 거 준비하는 건 수월했겠네?”

    나는 찬찬히 현재 상황을 되짚어 본 후 제크에게 물었다.

    제크는 씩 웃더니 엄지를 올렸다.

    “완벽해. 이번에 타이밍 좋게 명월까지 겹쳐서 효과가 좋았어.”

    “다행이네.”

    난 잠시 제크를 바라봤다.

    제크는 내가 빤히 바라보자 날 마주 봤다.

    “왜. 얼굴에 뭐 묻었냐?”

    녀석은 능청스러운 태도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내가 반응이 없자 민망하다는 듯 손을 내렸다.

    오늘은 원래대로라면 변경백에 대한 이야기로 끝냈을 거다.

    하지만 벵칼에 갔다 오는 과정에서 결코 반갑지 않은 정보 하나를 알게 됐다.

    “흐음. 무슨 일이 있나 보군.”

    눈치가 빠른 제크도 내가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후우.”

    난 작게 한숨을 쉬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놈에 대한 단서를 찾은 거 같다.”

    제크가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히 그놈이라고 말했는데도 녀석은 바로 내가 누굴 말하는지를 알아챘다.

    “확실해?”

    “음. 신빙성은 팔십 퍼센트 이상. 그것도 정말 최소로 잡았을 때야.”

    그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매만졌다.

    “너무 속단하는 거 아니야? 놈의 추종자일 수도 있잖아.”

    “글쎄. 그건 따라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냐. 너도 알잖아?”

    “으음.”

    나는 그에게 그놈과 관련 있는 새로운 정보들을 낱낱이 말해 주었다.

    얘기를 다 들은 제크는 이마를 긁적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한번 나도 더 조사해 볼게. 페일이랑도 얘기해 보고.”

    “그래. 나도 나 나름대로 대비를 시작할 거야.”

    “응. 우리도 준비를 하지.”

    난 고개를 끄덕인 후 반쯤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탕.

    “알겠어. 이제 가라.”

    그리고 제크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제크는 그런 나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 아직 반도 안 마셨…….”

    “그건 마큰지 뭔지 하는 놈이랑 마저 마시고. 훠이.”

    난 진심을 담아 손을 휘저었다.

    아까 전 당했던 걸 갚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간다. 가.”

    “아. 그리고 말 네 마리만 수배해 줘. 내일 아침까지.”

    “아주 그냥 심부름꾼으로 부려 먹으려고 하는구만.”

    제크는 투덜거리면서도 잔을 한 번에 비우고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왕. 그리고 전쟁.’

    나는 계획을 재검토했다.

    마경 바깥으로 진출한 이후로 꽤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기실 큰 줄기만 보자면 마하룬 요새를 점령한 게 다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미적거리고 있을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

    그 경계를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었고.

    면밀히 따져 본 결과 슬슬 정체되어 있던 물꼬를 시원하게 틀 시기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바빠지겠네.”

    던전도 클리어했겠다 좀 쉴까 생각했는데, 그럴 여유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무엇보다 ‘그놈.’

    그 남자를 생각해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일을 진행해야 한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뇌조랑 바다 보러 가기로 한 약속은 언제 지킬 수 있으려나.’

    기분 안 상하게 폴그룬으로 돌아가면 계속 바깥에 불러 놔야겠다.

    난 속으로 그렇게 결심하면서 통신구를 꺼내 들었다.

    케륵과 연결해 내일 바로 도시로 갈 예정이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한 후 몇 가지 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알겠습니다. 케륵.

    연결을 끊은 후 난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어찌 됐든.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인적이 드문 숲.

    그곳을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다.

    새하얀 법복. 그리고 법복에는 레살라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바로 호진이 만났던 그 사제였다.

    그녀는 벨루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바로 포탈까지 이용해 가며 서부전선 근방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흐음.”

    사제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닥을 샅샅이 살폈다. 그녀는 어떤 흔적을 찾고 있었다.

    며칠 전.

    최근 서부전선으로 향하는 원정대가 있었는데, 소문으로는 그 원정대에 레살라를 모시는 사제가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종단에선 그런 사제를 파견한 적이 없다는 것.

    게다가 일반 신도일 가능성도 없다. 레살라 님을 모시는 신도가 결코 사제를 칭할 리 없으니까.

    ‘아예 아무것도 모르던 뜨내기라면 다행이지만.’

    그녀는 흔적을 살피며 앞으로 나아가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만약 다른 목적이 있다면.’

    그렇다면.

    놈은 절대 좋은 꼴은 못 보리라.

    레살라는 자애와 헌신의 신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일 뿐이다.

    멈칫.

    한참을 이동하던 사제의 몸이 멈췄다. 그녀는 조심스레 몸을 숙여 바닥을 쓸었다.

    그곳엔 희미하지만 무언가가 흙을 뭉갰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

    그녀는 성호를 그으면서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녀의 눈가에 빛이 번쩍이더니 푸르스름한 빛이 맺혔다.

    잠시 후.

    “찾았다.”

    그녀는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눈동자에 찬찬히 떠오르는 감정은…….

    희열.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번 흔적을 찾은 이상 길게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푸른빛을 발하는 눈동자로 주변을 훑어본 후 흔적이 어느 쪽으로 이어졌을지 추측했다.

    “서부전선으로 갔군.”

    그걸 계산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상대는 이런 상황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는지 흔적을 그대로 놔두고 움직였다.

    그녀는 자애와 헌신의 신 레살라를 모시는 사제이자.

    추적과 말살에 특화된 전투 사제.

    그녀가 발을 떼면서 얼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스스-

    손바닥이 다시 내려갔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검은색의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스스스-

    그리고 그녀가 걸친 새하얀 법복이 까맣게 물들어 간다.

    그녀의 다른 이름은 악마 사냥꾼 ‘알파’.

    알파는 빠르게 어딘가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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