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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96화 (96/170)
  • 96화

    “예? 아, 아니, 응?”

    벤은 당황해서 횡설수설했다.

    칼은 어찌나 긴장해 있는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데 끼기긱-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일 말인가… 요?”

    심지어 나에게 존댓말까지 쓴다!

    딱 봐도 철우 형. 즉, 무려 금 등급의 모험가인 게럴드와 친근하게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혼란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는 하하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반말 쓰셔도 돼요. 새삼스럽게.”

    칼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흠흠. 그래. 상단 호위 임무를 같이하자는 거겠지?”

    “예. 괜찮으시면요.”

    “흐음. 나는 괜찮네. 사실 의뢰를 수행하러 여기까지 왔던 거지, 애초에 본거지는 멜리움이니까.”

    “아! 그러네요?”

    하긴 처음 칼과 벤을 만났던 것도 멜리움 왕국 내의 소도시 중 하나였다.

    거기서부터 같이 마차를 타고 이곳 벵칼까지 온 거니까.

    “그러면… 벤 씨는요?”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벤을 향했다.

    벤은 몰린 시선에 당황해서 잠시 입을 떠듬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느은. 그게. 좀.”

    그는 어물쩍거리면서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딱 봐도 별로 안 끌리는 것 같은 기색이었다.

    하긴. 애초에 그는 얘기를 들어보니 멜리움 왕국이 아니라 바하트리스 공국이 본거지인 것 같았다.

    의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을 찾아서 영입하는 것도 귀찮단 말이지.’

    앞에 이렇게 딱 맞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결국 적당한 보상을 내밀면 되겠지.

    ‘흐음?’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이 둘의 전투 실력이나 성격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철우 형.”

    “응?”

    나는 철우 형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듣던 그도 곧 내 말이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철우 형은 ‘게럴드’로 돌아가 근엄한 표정으로 벤과 칼을 보았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벤과 칼은 움찔 놀라며 몸을 굳혔다.

    “철급 용병 칼. 동급 용병 벤. 맞나?”

    “예, 예! 맞습니다.”

    “예!”

    둘은 칼같이 대답했다. 특히 칼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준 거에 감격한 듯한 표정이었다.

    맨날 무뚝뚝한 표정이었던 사람이 저러니 좀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 없나?”

    철우 형의 말에 둘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모험가 연합이 기본적으로 상당히 느슨한 형태의 조직이지만, 기실 그 내부를 보면 다양한 계파가 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조직 중에 정치, 권력 싸움이 없는 곳이 어디겠는가.

    특히 모험가 연합은 일개 지부라도 한 가지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의뢰’.

    단순히 의뢰를 수행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수행하기 전에 자격이 있는지, 이 사람이 의뢰에 적합한지를 먼저 본다. 그걸 처리하는 게 바로 연합 지부장, 혹은 그 밑의 수하고.

    ‘입김이 안 들어갈 리 없지.’

    자연스레 권력에 가까운 사람은 좋은 임무를 맡기가 쉽다.

    이 벵칼에서만 봐도 권력을 지부장과 게럴드가 나눠 가지는 형태였다.

    즉, 아무런 소속도 없는 이들은 쭉정이 같은 임무만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이번에 의뢰 보고를 보니 둘 다 최근 임무가 서부전선 파견이더군.”

    게럴드는 바로 그 점을 콕 집어서 말했다.

    서부전선은 끝도 없이 몰려드는 마물을 막기 위해서 자는 시간까지 줄여 가며 싸워야 한다.

    게다가 까닥하다가 큰 상처라도 입으면 회복될 확률보다 동료의 손에 죽임을 당할 확률이 높다.

    신전이나 왕국, 모험가 연합 세 군데에 공적치를 한 번에 얻고 의뢰금까지 크다지만.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디겠는가.

    그곳은 정말 끈 떨어진 신세인 이들이 가는 곳이다.

    바로 앞에 있는 이 둘처럼.

    “아무리 임무를 수행하더라도 별로 나아지는 걸 못 느꼈을 거다. 의뢰는 항상 거지 같은 것만 주고, 의뢰금을 많이 받아도 소모품이나 장비 수리비로 나가는 돈을 생각하면 남는 돈은 별로 없지.”

    철우 형은 청산유수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양손으로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딱 악역이 작당 모의를 하는 것 같은 분위기로.

    아니, 너무 좋은 말만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해 보니 저 양반 아직 우리 부족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내 밑으로 들어와라.”

    벤과 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저런 말에 쉽게 넘어가겠어?

    라고 생각했던 나는 순진한 거였다.

    의외로 그 효과는 굉장했다!

    “하겠습니다!”

    “뭣!”

    즉답하는 칼을 보며 내가 놀라 소리쳤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저도 하겠습니다!”

    심지어 내가 말할 때까지만 해도 망설이던 벤도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대답했다.

    결국, 둘은 그 자리에서 속전속결로 철우 형의 밑에 들어가는 거로 결정되었다.

    상단 의뢰는 철우 형이 직접 연합에 신청을 넣어 두겠다고 했다.

    모든 게 다 잘 해결됐지만.

    “후우.”

    난 밝은 표정인 칼과 벤을 보며 회의감이 들었다. 칼은 그렇다 치고 벤까지 저렇게 쉽게 넘어가다니.

    게다가 철우 형은 거만한 표정으로 날 보기까지 했다.

    내가 이 정도야, 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것만 같다.

    회의감이 더 커졌다.

    * * *

    상단 의뢰는 접수부터 준비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철우 형이 직접 상단에 사람을 소개해 준다고 하니 그쪽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상단에서도 이번 벵칼 참사, 명월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일 때문에 방비를 철저히 해 둬서 우리로서도 좋았다.

    결국, 호위 임무를 맡은 건 상단과 아예 계약을 맺고 일하는 이들.

    모험가 연합 소속의 우리 넷. 게다가 무려 사제까지 한 명 고용했다고 한다.

    상단과 계약을 맺은 이들은 수가 많은 대신 그 무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반면에 우리는 수가 넷 정도지만 무력이 꽤 괜찮은 편이고.

    자애와 헌신의 신인 레살라를 모시는 사제는 치유 주문을 쓸 수 있는 3등급 사제였다.

    “이 정도면 우리는 할 일도 없겠는걸?”

    벤은 기분 좋은 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

    대형 상단인지라 우리도 우리 몫의 그럴듯한 마차 하나를 배정받았다.

    올 때는 낡고 허름한 짐마차를 타고 왔던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안락한 환경이었다.

    우리는 넷 다 마차 안에서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계속 울상이더니.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칼은 그런 벤에게 핀잔을 주었다.

    하긴 벤은 또 가다가 마물 떼를 마주치면 어떡하냐고 계속 걱정했었다.

    상단의 방비를 보고선 그런 말이 쏙 들어갔지만.

    정말로 첫인상과 다르게 굉장히 신중한 성격이다.

    나쁘게 말하면 소심한 거고.

    “뭐? 원래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키는 거야. 무리하다가 개죽음당하면 누가 알아줘?”

    하지만 벤은 아주 당당하게 칼의 말을 받아쳤다.

    칼도 흥 코웃음을 치긴 했지만, 뭐라 더 타박하진 않았다.

    덜컹-

    “아, 출발하나 보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화린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나도 그녀의 말을 받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마차는 곧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화린은 창을 닫고서 똑같이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후. 이번엔 별일 없이 갔으면 좋겠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 이상한 플래그 꽂지 마라.”

    “플래그? 깃발? 뭔 소리야?”

    나는 말 하면 안 되는 대사 탑텐에 드는 말을 내뱉는 화린을 타박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봤다.

    “그러고 보니 너 외국 살다 왔지…….”

    “왜? 그게 뭔데?”

    “아냐, 잠이나 자라.”

    나는 휙휙 손을 내젓고서 눈을 감았다.

    화린이 뭐라 더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무시했다.

    여기서 벨루곤까진 약 칠 일 정도가 걸린다.

    올 때와 비교하면 좀 더 길긴 하다. 아무래도 큰 규모의 상단이니까. 출발 지점도 벨루곤이 아니었고.

    눈을 감고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잠이 들었다.

    눈을 뜨는 건 마차가 멈추고 잠깐 밥을 먹을 때뿐.

    가끔 잠도 안 오고 심심할 때는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 떠날 때의 우려와 달리 위험한 일은 전혀 없었다.

    마물은커녕 산적이나 몬스터, 짐승조차 전혀 안 보였다.

    칼은 이번 명월로 인해서 마물들이 휩쓸고 간 것 때문에 짐승이나 산적이 아예 없는 것 아닐까 의견을 제시했었다.

    그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를 떠나서 덕분에 우리는 아주 편안하게 갔다.

    그렇게 칠 일이 지난 후.

    우리는 마차 안에서 주섬주섬 짐 등을 정리하고 있었다.

    짐 정리를 끝내고 쭉 창문 밖을 구경하던 화린은 내게 바깥을 가리키며 물었다.

    “진아! 저게 벨루곤이야?”

    나는 그녀의 말에 슬쩍 고개를 내밀어 창문 밖을 봤다.

    화린의 말대로 저 멀리 성벽이 보였다.

    “맞네.”

    “와! 진짜 국경에서 가깝네.”

    그녀는 눈을 빛내며 다시 바깥을 구경했다.

    벤도 기분이 좋은 듯 싱글벙글거리고 있었다.

    잠깐 보고 있자니 그가 휙 고개를 들어서 눈이 마주쳤다.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이런 편한 임무는 정말 오랜만인 거 같아.”

    “그래요?”

    칼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지. 보통 상단 임무를 맡으면 눈치가 보여서 잡일이라도 해야 하거든.”

    화린도 우리의 대화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무려 금급 모험가 게럴드가 소개해 줬는데 상단주도 함부로 할 순 없죠. 또 얘기를 들어보니까 게럴드 오빠가 여기 상단주도 한 번 구해 준 적 있다더라고요.”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럴드 씨는 범인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지. 보통 그 정도 무력과 자리면 거만할 법도 한데.”

    그는 열정적인 어조로 철우 형을 찬양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정말, 정말 저러는 걸 볼 때마다 부담스럽다.

    과묵하고 분위기 잡던 칼이 차라리 낫지.

    “흐흐. 게럴드 씨 만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도시에 도착하면 한 잔 어때?”

    “당신 머릿속에는 술밖에 없어요?”

    벤은 웃으며 말을 받다가 기승전술로 마무리했고.

    화린은 한심하다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오. 그래서 안 마실 거야?”

    “에이. 그럴 리가요.”

    하지만 벤이 다시 물어보자 화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나와 칼은 똑같은 마음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휴. 술쟁이들.”

    “왜! 술이 뭐 어때서!”

    내 말에 화린이 날 찌릿 노려보았다.

    “아냐, 오히려 술 좋아하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부족에 있는 이들을 떠올렸다.

    얼마 전 잠깐 통신을 했었는데 벌써부터 내가 오면 환영 축제를 해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다.

    너무 밝은 어조로 말해서 차마 말리지는 못했는데, 살짝 걱정되긴 한다.

    술을 워낙 좋아해야지.

    심지어 저번엔 벨루곤의 플레이어 장현준, 즉 자크로부터 통신으로 이런 말까지 들었었다.

    ‘아니, 뭔 놈의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는 거야! 좀 작작 마시라고 좀 해!’

    그는 술을 공급하느라 골치를 썩인다고 제발 자제 좀 해 달라고 내게 말해 왔다.

    ‘아예 맛 좋은 술을 만드는 기술을 찾아봐야겠어.’

    사 먹는 거로는 절대 소비량을 감당할 수 없다.

    나는 잠시 그렇게 삼천포에 빠진 생각을 이어 가다가 화린의 질문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우린 바로 거기로 가는 거야?”

    “아니, 벨루곤에서 하루 자고 이동할 거야.”

    내 말에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벤과 술 마시는 제스처를 교환하는 거 보니 오늘 저녁은 이미 술 파티로 정해졌나 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떠드는 사이에 상단의 행렬은 천천히 벨루곤으로 들어갔다.

    곧 완전히 목적지에 도착하고.

    우리는 상단주를 만나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고서 보수를 받았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예. 돌아가시는 길에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분 좋게 서로의 안위를 빌어 주며 큰길가로 걸어 나갔다.

    “흠. 진. 괜찮은 여관 아나?”

    벤이 목덜미를 긁으며 물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벨루곤이 처음이다.

    나에게 모이는 시선에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좋은 곳 알죠.”

    침대도 푹신하고. 음식도 맛있고.

    나는 길 안내를 맡고서 앞장서서 출발했다. 아니, 하려 했다.

    “형님!”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이 우리를 막아서기 전까지는.

    족히 스무 명은 넘어 보이는 사내들. 게다가 모두 통일된 옷을 입고 있다.

    “벨루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형님!”

    게다가 모두 허리를 구십 도로 꺾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난 멍하니 그들을 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누구냐,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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