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일찍은 무슨. 열한 시면 점심시간 다 됐지.”
철우 형은 피식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다시 몸을 기댔다.
난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 음식이라도 시킬까?”
“그러죠. 배고프네요.”
그는 손을 들어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우리는 그 후에야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제 늦게까지 일했어요? 다크서클이 찐하시네.”
“항상 그렇지.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겠어?”
그는 손으로 턱을 괴며 나를 훑었다.
아. 이번 여정에선 뇌룡갑도 모두 착용 해제한 상태이다. 아무래도 외형이 외형인지라 엄청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여정에선 처음부터 평범한 옷과 갑옷을 걸치고 출발했다.
“너…….”
“형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용병단도 설립 못 하실 텐데.”
그가 무언가 말할 기색이긴 했지만 나는 말을 끊으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철우 형은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목덜미를 긁었다.
“화린이한테 들었냐?”
“그러면 뭐 지나가는 사람한테 들었겠수.”
바로 이어서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음식이 나온 탓에 잠시 흐름이 끊겼다.
우리는 각자 수저를 들어 스프를 먹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고 보니 화린이 표식은 잘 지웠대요?”
“응. 어제 잠깐 여관 들러서 데리고 신전 갔다 왔지. 그곳 의뢰도 제법 많이 수행해서 돈 조금 쥐여 주고 바로 해결했어.”
“다행이네요. 공적치 전혀 없으면 돈을 주더라도 정화 의식은 못 받을 텐데.”
“내가 누구냐? 이래 봬도 내가 여기는 꽉 잡고 있었어.”
그의 과장스러운 말투와 몸짓에 나는 피식 웃었다가 곧 다시 그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진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어떻게 하긴. 처음부터 다시 세력 키워야지. 여긴 전작 게임이랑 달라.”
그는 입가를 훔치며 말을 이었다.
“사람 모으기도 쉽지 않고. 지지기반 다지기도 쉽지 않다. 이번 일로 내 세력의 삼분의 이가 날아갔어.”
사망한 모험가 오십 명. 그들을 말하는 걸 거다.
난 빵을 뜯어 먹으며 말했다.
“저도 알아요. 사실 전 형이 벌써 금 등급이나 단 게 더 신기한데요.”
“야. 나 몰라? 무려 그 카이저를 상대로 다섯 번이나 엿 맥인……!”
“좀! 닥쳐요. 진짜.”
나는 그를 노려보며 고기를 거칠게 뜯어먹었다.
철우 형은 키득키득하며 웃었다.
나도 짜증 내듯 말하긴 했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은 참을 수 없었다.
아는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다니.
어제도 생각했지만 정말 신기한 느낌이었다.
벼락 신의 사도.
벼락 부족의 족장.
대벼락 부족의 대족장.
처음엔 얕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었다.
그다음엔 내 밑에 있는 이들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또 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나조차 모르게 조금씩 변했었다.
가끔은 나조차도 내 사고방식에 놀랄 때가 있다.
내 성격은 원래 어땠지?
어제 화린이와 대화한 이후로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이었다.
나는 형을 물끄러미 보다가 툭 질문을 내뱉었다.
“형. 저 좀 변한 것 같지 않습니까?”
철우 형은 고개를 들어 날 봤다가 다시 시선을 내려 먹는 거에 집중했다.
그는 입안에 있는 걸 다 삼킨 후에야 대답했다.
“뭐래. 또 중이병 돋았냐? 카이저라고 불러 줄까?”
“아 진짜. 됐어요. 전 진지한 얘기도 못 해요?”
“진지한 얘기는 무슨.”
그는 수프 그릇을 싹싹 비운 후에야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는 물을 홀짝이며 말했다.
“이곳은 게임 같지. 하지만 그냥 게임은 아니야.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
“…예.”
“다른 환경. 다른 문화. 처음 보는 사람들. 괴물들. 폭력과 야만은 이런 수도 한복판에서도 흔하지. 그런 동네야 이곳은.”
그는 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너도 필 거냐?”
“나쁘지 않죠.”
담배였다.
그러고 보니 이 안에 들어온 다음엔 담배를 한 번도 안 폈었다.
처음엔 그런 걸 찾은 여유가 없었고, 나중엔 아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받아 들어 입에 물었다.
그러자 철우 형이 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서 불을 화륵 피어 올렸다.
난 연기를 가득 빨아들였다가 내쉬었다.
“후. 형 그러고 보니 테크 트리 뭡니까?”
“마전사.”
그는 짤막하게 말하며 자신의 것에도 불을 붙였다.
난 담배가 어찌나 독한지 천천히 나누어 피었다.
“게럴드가 원래 마법도 쓰덥니까?”
“왜 그 말 안 하나 했다.”
우리는 잠시 담배를 피우며 각자 생각을 정리했다.
철우 형과 화린에게 영입 제의를 하는 건 이미 결심한 일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들이나 나를 위해서라도.
나는 이곳에 단순히 친한 사람을 만나 회포나 풀려고 온 게 아니니까.
그의 말대로 이 세계는 야만적이고 폭력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함께하기 위해선 최소한 형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야 한다.
“형.”
“응?”
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한판 붙어 봅시다.”
“뭐?”
그도 담배를 비벼 끄면서 날 보았다.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 타박할 법도 한데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흠. 자신 있냐? 마우스로 컨트롤 하는 거랑은 다를 텐데?”
자신감이 풀풀 넘치는 태도였다.
“자신감은 아주 최고네요.”
난 그를 타박하듯이 말했지만, 철우 형은 자신감을 가지기 충분한 사람이다.
단순히 그가 이곳에서 금 등급의 모험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철우 형은 현실에서도 괴물이다.
그의 현실 신체 스펙은 키 195cm에 몸무게 110kg.
각종 무술의 유단자이며, 무기술을 배우기 위해 인터넷, 책, 현실 가리지 않고 익혔던 사람이다.
전작에서 게임을 하던 걸 보면 전략, 전술 같은 것도 찾아보던 것 같고.
‘그러니까 아직 결혼을 못 했지.’
노총각인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하여튼, 게임 컨트롤 자체는 내가 우세했었지만, 현실 무술 실력으로 따지면 그가 위일 거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현실에서의 이야기.
“현실에서 싸우는 거랑도 다르던데요?”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참고로 말하면 저 레벨 꽤 높습니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따라와. 레벨이 다가 아닌 걸 보여 줄 테니까.”
“예. 예. 그거 참 기대되네요.”
그가 앞장을 서며 말했고,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갔다.
우리는 여관의 뒤뜰로 나갔다.
뒤뜰엔 간단하게 겨루기엔 충분할 정도의 공터가 있었다.
바닥을 발로 밟아 보니 제법 잘 다져져 있다.
‘벤이 의외로 센스가 있네.’
여관 하나는 잘 골라 줬다.
나는 공터의 한쪽에 자리를 잡고서 칼을 뽑아 들었다.
자세를 잡고서 맞은편을 보니 철우 형이 멀뚱히 나를 보고 있었다.
“무기 안 듭니까?”
그는 내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들어와. 싸우는 게 뭔지 보여 줄게.”
그는 여전히 무방비한 자세인 채로 손을 까딱였다.
이거 날 너무 얕보는데.
원래는 가볍게 겨뤄 볼 생각이었는데…….
또 내가 어디 가서 무시당하는 걸 참는 편은 아니다.
“후회하지 마십쇼.”
나는 말을 함과 동시에 훅 몸을 날렸다.
이젠 단순한 달리기도 저레벨일 때 뇌룡 질주를 사용하는 것보다 빠르다.
54레벨. 이미 인간의 한계는 몇 번이고 넘었다.
콰앙-!
먼지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나는 그대로 검을 세로로 내리쳤다.
‘뭐지?’
거의 근접한 거리에서도 철우의 얼굴은 여유로워 보였다.
그의 손이 천천히 위로 들리며 순간 빛이 번쩍인다.
그리고 충돌.
카가가각-!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검이 위로 튕겨 올려졌다.
나는 부릅뜬 눈으로 그의 팔을 보았다.
그의 팔에는 어느샌가 라운드 쉴드가 들려 있었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여력을 해소한 후 다시 사선으로 검을 내려 베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라운드 쉴드를 내게 내던졌다.
카각-!
날아온 라운드 쉴드와 칼이 맞부딪치며 경로가 틀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그가 창을 내찔러 오는 게 보였다.
“무슨!”
나는 깜짝 놀라면서도 오른쪽으로 몸을 틀며 창대를 쳐 올렸다.
휘익-!
그런데 날 찔러오던 창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는 이번엔 검으로 나를 베어 오고 있었다.
카가각!
“크윽.”
나는 간신히 칼을 대어 그의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뒤로 몸이 몇 걸음이나 밀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이건 또 뭔.”
“재밌지?”
자세를 다잡으며 그를 보니 그는 다시 빈손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법이 아니라 마술이라도 익힌 겁니까?”
그는 내 말에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내가 화린이처럼 검으로 불꽃놀이라도 할 줄 알았어?”
“처음이라 당황한 거지, 두 번은 안 당합니다.”
“그래? 한번 확인해 볼까?”
비아냥대듯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답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스텟 격차는… 꽤 나는 편이야.’
그의 레벨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삼십 대다.
사실 처음엔 한 이십 대 중, 후반 정도일 거라 생각했기에 그것도 나름대로 놀랍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랑 약 이십 레벨 정도의 격차가 있는 건 사실.
경계해야 할 건 저 무기술과 변칙적인 공격이다.
나는 아주 천천히 그와 거리를 좁혔다. 그도 이번엔 나름 진지한 표정을 보며 나를 노려봤다.
‘마법의 일종인가.’
인벤토리는 저렇게 딜레이 없이 무기를 수납하는 게 불가능하다.
“저도 전력으로 싸웁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좀 더 빠르게 다가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풍월검.’
검이 빛나고.
‘개방.’
주변으로 훅 바람이 피어오를 때 바로 검을 휘둘렀다.
카앙!
그는 이번에도 방패를 꺼내 들며 막아 냈지만, 내 노림수도 이게 끝이 아니었다.
휘잉-
바람이 불며 내 몸이 훨씬 날렵하게 움직였다.
나는 단 몇 보만으로 그의 측후방으로 이동했다. 풍월검의 기본 능력인 ‘풍월보(風月步)’다.
속도보다는 바람처럼 자유롭고 변화무쌍한 발걸음을 가능케 하는 기술.
그가 바로 뒤돌려는 게 보였지만, 난 틈을 주지 않고 바로 검을 휘둘렀다.
검이나 창으로는 절대 막아 낼 수 없는 간격과 타이밍이다.
카앙-!
그렇기에 다시 한 번 공격이 막혔을 땐 잔뜩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톤파?’
그의 손에는 어느새 ‘ㅗ’자 모양의 톤파라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마저 휙 집어던지더니 양손에 대거를 소환했다.
두 대거가 각각 다른 각도로 나에게 짓쳐 든다.
나는 검을 U자형으로 꺾으며 둘 다 쳐내었다.
철우 형은 그다음 한 손으로는 내 하체를 베며, 다른 한 손으로는 대검을 내 가슴을 향해 내던졌다.
난 검을 역수로 하며 아래 검을 쳐내고, 고개를 돌려서 날아오는 검을 피하려고 했지만.
화륵-
별안간 얼굴 바로 앞에 화염 덩이가 피어올랐다.
파악-!
더뎌진 반응 탓에 검이 내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최대한 바람의 힘을 활용하며 그를 몰아붙이려고 노력했다.
화륵!
푸확-!
하지만 그는 틈틈이 불덩이, 물벼락 등으로 시선을 교란시켰다.
게다가 검, 단검, 봉, 창, 메이스, 몽둥이 등등. 갖가지 무기를 스왑해 가며 사용하니 상대하는 입장에선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어느 순간 난 전투 보조 스킬까지 사용해 가며 그와 합을 나눠야 했다.
검을 벤다.
카앙!
방패에 막히고. 난 그 반동을 역이용해 검을 회전시키며 올려친다.
카가각!
풀 건틀릿이 내 검을 옆으로 빗겨 친다.
파앗!
이어서 눈앞에서 라이트가 번쩍인다.
눈에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시야가 일순간 차단되었다.
빠르게 몸을 뒤로 빼었다.
파앗!
거리를 벌리니 이번엔 뭐가 또 날아온다.
‘화살?’
분명 화살이다.
설마 활까지 쏘고 있는 건가?
팟! 파밧!
연이어 서너 발이 더 날아온다. 난 간신히 청각에 의지해 가며 화살들을 쳐내었다.
그리고 드디어 눈이 떠졌을 때.
그가 바로 앞에 당도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식하게 생긴 철퇴를 들고서.
“와! 씨발!”
카각-!
콰아앙-!
“커헉!”
철퇴의 봉 부분을 때리며 속도를 늦추고, 몸을 옆으로 틀었는데도 기어코 옆구리를 얻어맞았다.
몸이 형편없이 뒤로 날아간다.
“진짜! 안 봐줍니다!”
나는 공중에서 자세를 고쳐 잡으며 바닥에 발을 디뎠다가 손잡이를 강하게 쥐었다.
그는 나를 보면서 다급하게 손을 뻗더니 무언가를 발동시켰다.
콰앙-!
귀 바로 옆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삐이-.
귓가에 이명이 들려온다. 청각이 거의 마비된 듯했다.
하지만 난 표정을 굳히며 하려던 걸 다시 이어서 했다.
“현월(弦月)!”
즉각 검이 반응하여 환하게 빛난다.
막 활을 꺼내서 쏘려던 철우 형이 움찔 놀라는 게 보인다.
난 바로 검을 가로로 휘둘렀고, 그 궤적을 따라 밝은 빛이 초승달 모양으로 쏘아져 나갔다.
모든 공간을 점하며 날아가는 빛. 철우 형은 당연하다는 듯 위로 뛰어오른다.
하지만 상대가 그렇게 단순하게 피할 수 있는 기술이라면 쓰지도 않았다.
“추(追)!”
난 검을 앞으로 뻗으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번엔 초록색의 빛이 앞으로 쏘아져 나가더니 먼저 쏘아진 빛에 나아가 엉겨 붙는다.
순식간에 거세진 기운이 철우 형을 따라서 다시 꺾여져서 돌아온다.
이른바 유도 미사일이다.
철우 형이 커다란 타워 쉴드를 꺼내 들며 기운을 막으려는 걸 보고 나도 몸을 날렸다.
이 기회에 끝을 내자!
“……!”
그의 방패와 기운이 부딪치자 그의 몸이 훨훨 뒤로 날아간다.
이제 가서 마무리만 하면…….
“……?”
그를 향해 달려가는 도중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가 무언가 말하는 것 같긴 했지만, 여전히 청각은 회복되지 않은 상태.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팔을 뻗어 위를 가리켰다.
나는 반사적으로 위를 보았고.
“……!”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무기들과 그 위에 집채만 한 바위가 있었다.
그게 전부 바닥으로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