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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93화 (93/170)

93화

게럴드, 즉 백철우는 나를 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정말, 정말… 반갑구나.”

그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날 보다가 곧 진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너에 대한 소식을 전혀 못 들었거든.”

“저도 형 소식 들은 지 얼마 안 됐어요.”

나도 마주 웃었다.

우리는 어색하고 간질거리는 분위기에 잠시 침묵하다가 곧 크게 웃었다.

철우 형은 목덜미를 긁으며 나에게 말했다.

“솔직히 근 보름간은 너무 힘들었어. 게다가 며칠 전 화린이까지 소식이 끊겼을 때는.”

그는 말하다말고 화린을 쏘아보았다. 웬일로 화린은 그의 눈을 슬쩍 피하기만 했다.

“이 녀석이 내가 그렇게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괜찮다고 우겨서 나갔거든.”

“어쩐지. 게럴드 형이 계획했으면 최소한의 안전 장치는 해 놨었겠죠. 무려 듀라한이 나타났는데.”

“뭐?”

철우 형은 듀라한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다시 화린을 노려보았다.

“아 왜 자꾸 나한테 그래! 내가 듀라한이 나타날 줄 알았나?”

“내가 감이 안 좋다고 했지! 그렇게 우겨서 나가 가지고 기어코.”

그는 뭐라 더 혼낼 기색이었지만 결국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멈췄다.

무려 모험가 오십 명이 희생되었다.

그중에는 그와 친분이 있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화린도 그녀의 파티원을 모두 잃었고.

둘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길 만한 일이었다.

나는 그 둘을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철우 형. 화린아.”

“응?”

“왜?”

동시에 나를 돌아보는 둘의 시선에 잠시 입을 떠듬거리다가 아예 다물어 버렸다.

지금 당장 꺼낼 만한 얘기는 아니다.

아직…….

아직 이 둘은 확실한 내 편이 아니니까.

나는 대화 주제를 바꿨다.

“그거 알아? 화린이한테 내가 아까 향덕이라고 불렀는데도 나 못 알아본 거?”

“야!”

내 장난스러운 말투에 화린이 바로 빽 소리를 질렀다.

모두 웃음을 터트렸고.

우리는 과거의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추억을 되새겼다.

물론 그중에는 서로에 대한 확신을 다지려는 의도 또한 있었다.

단순하게 만나서 반갑다. 하고 끝나기엔 우린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으니까.

‘의심병이 생겼을지도.’

쓴웃음이 나왔지만, 다행히 화린과 철우 형은 내가 알던 그대로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화가 끝난 후 철우 형이 나를 보며 물었다.

“그래. 숙소는 잡아 놨어? 더 얘기하고 싶긴 한데. 너도 그렇고 화린이도 좀 씻고 식사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아. 그렇죠. 아까 그 벤이 여관을 추천해 준대서 거기에 방을 잡으려고요. 술도 한잔하고.”

내 말에 철우 형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그곳에서 쉬고 있어. 내가 내일 점심쯤에 그곳으로 갈게. 나는 아무래도 이곳 지부장이랑 얘기 도 하고 처리해야 할 일도 좀 있거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화린도 같이 데려가라고 했다.

화린도 내심 빨리 씻고 싶었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웃으며 밖으로 나와 벤과 칼을 찾았다.

벤과 칼은 로비 한쪽에서 앉아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벤. 저기 잭이라는 분한테 우리가 어디 여관으로 가는지 좀 말해 주세요.”

“응? 왜?”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난 그가 놀라지 않을까 걱정하며 말했다.

“내일 점심에 게럴드 씨가 잠깐 들른다고 했거든요.”

“뭐?”

“그게 정말인가?”

놀란 건 벤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칼이 더욱 눈을 크게 뜨며 날 봤다.

“네. 같이 식사나 한번 하자고 했거든요.”

“오오!”

벤과 칼은 흡사 아이돌을 영접한 팬 같은 눈빛을 하며 날 보았다.

그렇게 좋나.

“오늘은 내가 다 쏜다!”

벤의 기쁜 외침과 함께 우리는 연합 건물을 나서서 여관으로 향했다.

우리는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하게 물로 몸을 닦아 내기만 하고 술을 시켰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씻고 싶었지만, 벤이 열렬하게 술 다 마신 후에 씻고 바로 자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마침 여관에서도 목욕물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약 두 시간 가까이 우리는 술을 마시며 벤의 모험담 삼 탄을 이어서 들어야 했다.

“정말이요?”

내내 기운이 없어 보였던 화린도 나중에는 벤의 말에 눈을 반짝이며 가끔 웃기도 했다.

우리는 거의 술을 동낼 정도로 퍼마신 후에야 술자리를 끝냈다.

* * *

여관 방 안.

나는 거의 식어 버린 물이 담긴 나무통에서 나왔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목욕을 하니 상쾌하다.

인벤토리에서 부드러운 재질의 수건을 꺼내서 몸을 깨끗이 닦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후우.”

자연스레 나른한 한숨이 나왔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우며 철우 형과 화린에 대한 기억을 회상했다.

철우 형을 처음 만난 건 전작에서였다.

그때 당시의 내 계급은 왕이었다.

그것도 기존에 있던 두 개의 왕국을 무너트리고 세웠던 왕국의 왕.

그는 당시 그런 내 왕국의 옆에 있던 공국의 공작이었다.

‘엄청나게 골치 아팠었지.’

내 왕국에 비하면 분명 상대도 안 될 규모의 공국이었다.

본래 모험가 출신이었던 자가 세운 공국이라길래 은근히 무시한 것도 있었고.

‘그 당시에는 귀족이나 군인 루트가 제일 인기 많았으니까.’

나는 당시엔 제국에서 하급 귀족으로 시작했었다. 결국 세력을 일궈서 왕국 두 군데를 점령한 후 독립 선언을 한 거고.

반면에 철우 형은 금 등급의 모험가로 정세가 혼란한 틈을 타 주 활동 범위였던 공국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의 자리를 차지했다.

딱, 그 당시에는 별로 안 유명했다.

그가 인기를 얻은 건 바로 나와의 전쟁에서였다.

‘별명이 카이저의 대적자였던가.’

그 당시에 나로선 매우 치욕적인 기분이었다.

철우 형의 공국과 내 왕국은 무려 다섯 차례나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이 형이 전략 전술이 어찌나 기가 막힌지, 몇 배의 병력 차를 두고 번번이 승리를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직접 지휘하는 본대는 어찌나 요리조리 피해 다니던지.

한 번은 수도까지 진격했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무려 ‘용’을 불러왔다.

바로 볼테른 제국의 수호룡 ‘세프로스’.

‘악몽이었지.’

그 용은 먼저 나서서 공격해 오진 않았다.

다만 조금이라도 수도 성을 공격하려면 바로 죽여 버렸을 뿐.

그야말로 최종 수성 병기였다.

그때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그걸 ‘카이저의 굴욕’이라고 불렀다.

물론 난 패배라고 인정 안 했다.

솔직히 용을 불러온 건 반칙이지.

난 진 적 없다.

하여튼,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전쟁을 해 댔다.

그런 전쟁이 멈춘 것은 바로 마물의 공습이 격화되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이번의 명월과 비교가 안 되는 규모의 대공습.

그때부터는 유저 간의 전쟁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마물의 공습을 막아 내기도 급급했으니까.

철우 형과는 바로 옆에 붙어 있다 보니 한 번씩 도움을 주기도 하고, 나중에는 아예 동맹을 맺어 버렸다.

그렇게 처음엔 원수와 같은 관계에서 시작해 나중엔 아주 친해졌다.

‘거기서 끝날 수도 있었지만.’

난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픽 웃었다.

서버 종료를 앞둔 어느 날 철우 형이 나보고 정모를 하자고 했다.

고작 두 명이서 보는데 정모라고 하는 것도 웃기지만.

어찌 됐든 그렇게 철우 형을 보러 갔고, 그 자리에서 바로 ‘화린’도 같이 보게 됐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어. 내 조카인데. 얘도 더 리얼 하거든. 그런데 카이저 만나러 간다니까 꼭 자기도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맞아. 그렇게 말했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왔다던 화린.

‘마, 마나서 반가스니다.’

그녀는 어눌한 말투로 인사를 했었다.

한국어는 거의 몰라서 철우 형이 계속 통역을 해 줘야 했다.

철우 형과는 게임 상에서 자주 얘기를 해서 그런지 금방 어색함을 풀었고, 화린도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눈을 반짝이며 들었었다.

그리고 난 그녀한테 ‘향덕’이라고 별명을 붙여 줬다.

화린은 아무것도 모르고 엄청 좋아했다. 자기를 애칭으로 불러 준다고.

그 이후로도 자주 만났고, 심지어 일 년 전에도 셋이서 만났었다.

“둘은 여전히 그대로네.”

난 중얼거리며 창문을 보았다.

항상 밤이 되면 외롭고 우울했었다.

이 낯선 세계에 나 혼자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외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같이 가자고 하면 되겠지?’

철우 형에게도 이곳 보단 내가 있는 곳이 나을 거다.

안전하고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으니까.

나는 제법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분명히 그럴 거다.

난 그렇게 생각하면서 잠을 자려고 했다.

똑똑-

그런데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상체를 일으키며 물어보자 한참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나야. 화린.”

“어. 향덕아. 잠깐만.”

나는 인벤토리에서 옷을 꺼내 입으며 문을 열었다.

바깥에는 물기 어린 머리칼을 한쪽으로 넘긴 화린이 서 있었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눈을 치뜨며 말했다.

“향덕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왜. 예전엔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이젠 안 좋아해. 그러니까 닥쳐.”

난 어깨를 으쓱하면서 방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이 밤중에.”

화린도 나를 따라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그냥. 잠이 안 와서.”

“덜 피곤했나 보네.”

그녀는 나를 다시 찌릿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넌 그대로네. 철 좀 들었을 줄 알았는데.

그대로라.

나는 바로 웃으면서 대답하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뒤늦게 억지로 입꼬리를 울렸지만, 씁쓸함이 배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행이네. 그렇게 보이면.”

화린이 날 슬쩍 보면서 눈꼬리를 올렸다가 다시 착 가라앉은 표정을 지었다.

“응. 그래 보여. 여전히 장난기 많고, 짓궂고. 바보같이 여유로워 보여. 예전의 너처럼.”

마치 나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들리는 건 내 착각일까.

그래도 그녀의 말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칭찬 고마워. 그래서 너는 어떻게 지냈어? 처음부터 철우 형이랑 같이 있던 거야?”

“그저 그랬어. 그리고 철우 오빠랑 만난 건 이제 겨우 한 달 반쯤? 난 원래 볼테른 제국에서 시작했어.”

화린은 여상한 말투로 말했다.

볼테른 제국.

멜리움 왕국, 바하트리스 공국은 물론이고 많은 나라와 접해 있는 커다란 제국이다.

나는 그녀가 볼테른 제국을 말할 때 슬쩍 눈빛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난 그것을 물어보려다가 꾹 참았다.

그게 무슨 기억이든 굳이 좋지 않은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네. 철우 형만큼 든든한 사람도 없잖아?”

“그렇긴 하지. 좀 바보 같은 면이 있긴 해도.”

다행히 그녀는 살짝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나서 구해 주기도 했고?”

“넌 정말 그 입만 안 열면 좋을 텐데. 이런 놈이 그 카이저였다니.”

“카이저는 무슨. 흑역사다. 흑역사.”

“킥. 하긴. 지금 생각하면 좀 오글거리긴 하네.”

그녀는 웃으면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너는 좀 괜찮아?”

“응?”

화린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곧 알아듣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나보단 철우 오빠가 걱정이지.”

“철우 형이 왜?”

그녀는 내 말에 잠시 뭔가를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철우 오빠. 용병단을 만들려고 했었거든.”

“용병단?”

“응. 아무래도 모험가 연합 소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나 봐. 솔직히 백금 등급을 단다면 모를까. 금 등급은 애매하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애매하긴 하다.

금 등급이 아무리 높은 등급이라도 모험가 연합을 좌지우지할 정도는 안 된다.

정말로 백금 등급이라도 된다면 모를까.

“그래서 아예 단체를 만들려고 한 거구나. 하긴. 용병단이 없던 것도 아니니까.”

용병.

게임에선 모험가 연합처럼 용병 단체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돈을 받고 의뢰를 수행하거나 전쟁에 나서는 ‘용병’ 일을 하는 걸 뜻할 뿐.

일종의 무력 단체였다.

“응. 그런데 이번에 모험가가 많이 사망했잖아. 그중에는 오빠가 공을 들였던 사람들도 많거든.”

“이번 일 때문에 계획이 많이 틀어졌겠네.”

“아무래도 그렇지. 몇 달, 아니 거의 일 년 정도는 늦춰질지도 몰라.”

그녀는 머쓱하게 웃으며 날 봤다.

“그래서 사실 너에게도 큰 힘은 못 되어 줄지도 몰라. 세력이 많이 축소돼서…….”

아. 그러고 보니 이들에게도 아직 내 정체에 대해선 말해 주지 않았다.

하긴 내 소문이 그리 널리 퍼지지 않기도 하거니와, 퍼졌다 해도 벼락 부족의 족장과 나를 연결시키는 건 힘들 거다.

애초에 정보가 퍼져 나갈 틈을 거의 차단해 놨으니까.

“미안해.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별로 도움도 안 될 것 같네.”

그녀는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나 누군지 몰라? 더 리얼 카이저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는 일부러 과장된 말투로 말했다.

그녀는 픽 웃더니 말했다.

“언제는 흑역사라면서?”

“흑역사는 흑역사고. 그건 그거지.”

우린 동시에 킥킥 웃었다.

좀 더 얘기 좀 나누다가 화린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나도 침대에 누웠다.

“흐음.”

내일 할 얘기들을 생각하다 보니 곧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 층으로 내려가니 먼저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어. 일어났냐.”

나를 향해 반갑게 인사하는 그를 보며 나도 마주 웃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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