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잠깐 눈을 깜빡인 것 같다.
주변이 한순간 어둡게 변했다가 천천히 밝아진다.
“아.”
곧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놀라웠다.
풀, 나무, 심지어 카린쿨까지 모든 것이 초토화되어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약 삼 미터 정도가 모두.
“엄청난 걸 줬네. 엘 루 영감.”
이 풍월(風月)검은 때와 환경에 따라 그 위력이 달라지는 검이다.
아무래도 숲 한복판인데다가 안개가 가득 껴 있어서 태양 빛이 별로 안 들어오는 환경인 게 영향을 준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사용할 걸 그랬네.”
저번엔 칼 길이를 제외하면 고작 일 미터 정도였는데.
나는 카린쿨에게 다가가 확실하게 죽은 걸 확인하고선 허리를 숙였다.
“카린쿨.”
아까 전 화린에게 카린쿨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난 표정 관리를 하느라 힘들었다.
카린쿨이 나타난 것 자체는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다.
흔한 일이라는 게 아니라,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난 계속, 내 뒷덜미를 간질이는 음습한 기운이 날 꽉 죄여 오는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난 여러 조각으로 토막 난 카린쿨의 시체를 꼼꼼히 살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놈의 몸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 있을 거다.
“이런 씨발…….”
그리고 잠시 후, 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는 카린쿨의 시체 토막 일부를 내려다보다가 칼로 겉 표피를 도려 내었다.
“후우.”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계속 설마설마하면서도 바라지 않던 일이었다.
난 주머니 하나에 그 표피를 넣어 둔 후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지룡의 용안이 해제됩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 보니 용안의 지속 시간이 끝났다.
아직 안개가 가득 껴 있긴 하지만 다행히 풍월검 덕분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우선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어차피 지금 당장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은은한 빛이 나는 검을 들고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압!”
곧 벤과 칼, 화린이 열심히 무기를 휘두르며 전진하는 게 보였다.
카린쿨의 죽음과 별개로 안개는 아직 남아 있어서 고전하는 게 보였다.
나는 잠시 무거워졌던 마음을 티내지 않기 위해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흐음. 풍월검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효과가 있으려나?’
그러다 보니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한번 확인해 볼까 하다가 나는 풍월검의 능력을 거뒀다.
왜 처음부터 사용 안 했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으니까.
사악-
능력을 거두자마자 오감이 삽시간에 무뎌지기 시작한다.
난 본래 봐 뒀던 방향으로 쭉 걸어가며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벤! 칼!”
“진이냐!”
“예!”
나는 자연스레 그들의 근처로 다가갔다.
곧 누군가의 몸과 부딪쳤고, 자세히 보니 칼이었다.
난 큰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카린쿨을 죽이고 왔습니다! 좀 더 이동하면 안개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정말?”
바로 옆에 있는 벤이 밝은 얼굴로 소리쳤다.
나는 다시 대답을 해 주었고, 우리는 전보다 더 힘 있게 앞으로 전진했다.
카란쿨이 살아 있을 때와 달리 이동할수록 안개가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푸욱!
바로 옆에서 벤이 휘두른 도끼가 마물의 머리통을 가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마물의 몸에서 나는 큼큼한 냄새도 맡아지고 시야는 선명하다.
온통 하얗게만 보이던 세상이 다시 총천연빛을 띠기 시작했다.
“하아.”
화린이 약간 감탄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내리쬐는 햇빛.
안개 속에 있던 건 짧은 순간이었는데도 묘한 감흥이 일었다.
그때 갑자기 마물 한 마리가 나무 위에서 불쑥 뛰어내렸다.
파악!
칼은 망설임 없이 놈을 베어 넘겼다.
그는 칼을 털어 내며 말했다.
“슬슬 마물들이 안 보이는군.”
칼의 말대로 주변엔 이제 마물이 안 보였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표식을 억눌러 놨으니까요.”
다들 얼굴이 밝아졌다.
우선 한차례 위기는 넘겼다.
나는 일행의 상태를 쭉 둘러봤다.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군.’
마물의 체액들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데다가 잔상처도 많았다.
또 다들 중간에 넘어지기도 해서 흙도 많이 묻어 있었다.
나는 한 명씩 확인하다가 벤의 옆구리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발견했다.
“벤 씨. 이거 받으세요.”
“응?”
인벤토리에서 포션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오. 고마워.”
그는 바로 받아 들어서 그것을 쭉 마셨다. 상처에 바르는 게 더 좋긴 하지만, 갑옷을 벗었다가 다시 입을 정도의 여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웃는 얼굴로 수도에 가면 술을 한 잔 사겠다고 했다.
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서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 이동하죠.”
내 말에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화린의 표식을 따라 몰렸던 마물들이 있는 구역을 지나와서인지 마물은 거의 없었다.
퍼석!
“케엑!”
가끔씩 튀어나오는 놈들은 우리의 합공에 빠르게 정리되었고.
계속 이동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무성했던 나무와 풀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푸스스-
모두 다리에 더 힘을 주며 빠르게 달렸다. 그리고 곧 우리 앞에는 너른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굳이 멈추지도 않았고,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기쁨이 역력해 있었다.
드디어 챠트 숲을 벗어났다.
다들 지쳤을 텐데도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평원을 열심히 달리다 보니 곧 저 앞에 높은 성벽이 보였다.
바하트리스 공국의 수도. 벵칼.
우린 성벽과 일부러 거리를 두고서 문이 위치한 곳으로 쭉 이동했다.
곧 성벽만큼이나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모두 무기를 집어넣으시오.”
성문을 본 칼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예.”
나는 검을 바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성문에 무기를 빼들고 접근해서 좋을 일은 없다.
난 아예 천까지 꺼내서 모두에게 건네주었다. 몸 전체를 닦을 수는 없지만 얼굴 정도라도 닦으라고.
원래 사람은 보여지는 게 다다.
아무리 모험가 패가 있다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성문으로 가까이 접근하자 경비병들이 흠칫 놀라며 우리에게 소리쳤다.
“거기 정지!”
성벽 위를 보니 병사들이 활을 겨누고 있는 게 보였다.
우리는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가만히 있자 경비병이 살짝 경계심을 누그러트리며 물었다.
그는 우리에게 창을 겨누며 다가와 물었다.
“신분을 밝혀라.”
“모험가 연합 소속 모험가입니다. 철 등급 화린. 철 등급 진. 동 등급 벤. 그리고 저는 철 등급 칼입니다. 괜찮으시면 모험가 패를 꺼내 보여 드려도 되겠습니까?”
경비병은 모험가라는 얘기를 듣자 좀 더 안도한 표정이다.
하긴 피, 체액, 흙먼지를 뒤집어쓴 수상한 사람 네 명이 접근하면 누구라도 놀랄 거다.
특히 성문에 근무하는 경비병들은 더할 테지.
그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꺼내 봐라.”
“예. 감사합니다.”
우리들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품을 뒤져서 각자의 패를 꺼내 들었다.
칼이 먼저 패를 바닥에 내려놓고 뒤로 물러났고, 나머지도 똑같이 따라 했다.
경비병은 우리를 흘깃 보고선 패에 가까이 다가가 내려다봤다.
“흐음.”
그는 유심히 패 네 개를 다 확인한 후에야 창을 내렸다.
“좋아. 신분이 확인되었다.”
경비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 다음 화린을 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화린 양, 무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게럴드 씨가 걱정하시던데 다행입니다.”
그러고선 꾸벅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하긴. 금 등급의 모험가는 웬만한 귀족만큼의 대우를 받는다.
금 등급 게럴드와 화린의 관계를 생각하면 경비병들도 당연히 화린에게 함부로 못 대하겠지.
“아니에요. 이렇게 철저하시니 벵칼이 안전할 수 있는 거겠죠. 감사해요.”
화린도 공손한 말투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와 경비병의 대화 덕분에 우리는 좀 더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성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줄을 안 서고 바로 들어갈 수도 있었고.
나는 슬쩍 성벽 위의 사내를 보았다.
활을 겨눈 병사 옆에 있던 남자.
바로 사제였다. 그의 눈이 화린에게 향하긴 했었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생각보다 효과가 더 좋았나 보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예. 수고하세요.”
화린과 경비병이 인사를 나눈 후 우리는 긴 숨을 내쉬었다.
성 안으로 들어오니 다들 비로소 안전해졌다는 걸 실감하나 보다.
곧 벤이 활기찬 어조로 말했다.
“좋아. 그럼 바로 모험가 연합으로 가자고.”
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잘 정비된 대로를 따라 걸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며칠 동안 불편한 마차에 있다가 오늘은 숲을 헤집고 다니기까지 했었으니까.
오늘은 누가 뭐라 해도 고급 여관에서 잘 거다.
마침 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걷는 동안 내게 말했다.
“진. 오늘 괜찮은 곳에서 술 한잔 어때?”
“괜찮은 곳이요?”
“응. 여관 겸 일 층에서 술집도 하는 데가 있거든. 침대도 푹신하고 목욕도 할 수 있어.”
“저야 좋죠. 안 그래도 어느 여관이 좋은지 모르거든요.”
“하하. 다행이군. 포션 빚도 있고, 또 네 덕분에 사지 멀쩡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 오늘은 내가 다 낼게.”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벤은 곧 칼에게도 붙어서 뭐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난 둘을 슬쩍 보다가 자연스레 화린에게 붙었다.
“향덕아.”
“……!”
내 부름에 그녀의 몸이 움찔 떨린다.
보면 볼수록 재밌는 반응이다.
화린은 입술을 깨물며 날 휙 째려보았다.
“당신, 어떻게 그 이름을 아는 거죠?”
“그래도 부정은 안 하네? 예전엔 그렇게 부르면 욕이란 욕은 다 늘어놨으면서.”
난 빙글거리면서 말했다.
“그건…….”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날 빤히 봤다.
“혹시…….”
“다 왔다!”
화린이 무언가 말하려는데 갑자기 벤이 크게 소리쳤다.
고개를 돌리니 우린 어느새 모험가 연합의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도 약간 김이 샌 듯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가지.”
칼이 나서서 건물의 문을 열었다.
건물의 내부가 보이고, 동시에 우리를 향해 집중되는 시선이 느껴졌다.
일국의 수도에 있는 연합 건물이라 그런지 내부는 벨루곤에 것보다 훨씬 넓었다.
칼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곳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나도 자연스레 그쪽을 보았고.
그를 보았다.
“게럴드 씨.”
칼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회색빛의 머리칼. 똑같은 색의 수염.
눈가에는 칼자국이 나 있고, 얼굴은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역시.’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확신했다.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우리는 게럴드에게 다가갔다.
게럴드는 우리를 쭉 훑어보더니 칼을 향해 말했다.
“보아하니 이미 의뢰를 수행하고 있었나 보군. 다른 이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래?”
게럴드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난 그의 눈가에 씁쓸함이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덤덤한 말투로 답했다.
“안타까운 일이군. 시체라도 회수해야겠어. 자세한 얘기는 저기 잭에게 말해 주겠나?”
게럴드는 뒤쪽에 접수대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칼과 벤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화린은 당연히 게럴드의 앞에 남았다.
그리고 나도 멀뚱히 그의 앞에 남아 있었다.
게럴드는 화린에게 말을 걸려다가 여전히 남아 있는 나를 보고선 멈칫 했다.
“…내게 용무가 있나?”
약간 짜증이 섞인 말투였다.
자신과 한마디라도 섞어 보려는 뜨내기로 보였을지도.
난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서운합니다. 백 형.”
게럴드가 내 말에 눈을 찌푸렸다가 크게 눈을 떴다.
“설마 카이저?”
그의 말에 이번엔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카이저가 뭡니까. 카이저가. 본명도 아시면서. 여긴 빈방 없습니까? 따로 얘기하죠?”
약간 툴툴거리는 듯한 말투로 말하자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게럴드는 잭에게 다가가 방 하나를 쓴다고 했고, 난 벤과 칼에게 잠시 게럴드랑 얘기를 나누고 오겠다고 했다.
그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바로 옆에 서 있는 게럴드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게럴드, 그리고 화린과 함께 건물 내부의 방으로 이동했다.
테이블과 의자만 놓여 있는 방 안에 들어가자 게럴드가 바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나는 그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하면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갑갑한 느낌이 가시며 본 얼굴이 드러났다.
인피면구.
꽤 비싼 아이템이다.
이거 살 포인트면 신전 몇 채는 지을 수 있으니.
“뭘 어떻게 돼요. 백 형 만나러 온 거죠.”
나는 인피면구를 테이블 위에 올리며 의자에 앉았다.
게럴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옆에 앉은 화린은 내가 인피면구를 벗은 순간부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보고 있었다.
“호진이 너도 들어와 있었구나. 아니,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에이. 어떻게 알긴요. 그렇게 ‘마녀’ 중독자 티를 내고 다녔으면서.”
난 어이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의 이름. 생김새.
그것은 과거 유명했던 게임 ‘마녀’에 나왔던 주인공과 똑 닮아 있었다. 난 그걸 말한 거다.
“흠흠. 좀 닮았나?”
그는 약간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은근 슬쩍 물어왔다.
아까 전 로비에 있을 때 온갖 근엄한 티를 다 내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이게 게럴드. 본래 이름은 ‘백철우’인 형의 본 모습이다.
“네. 커스터 마이징 엄청 하셨네요. 향덕이는 머리색만 바꾼 거 같은데.”
“누가 향덕이야!”
내가 말하자마자 화린이 소리를 빽 질렀다.
나는 잔잔히 떠오르는 추억을 떠올리며 하하 웃었다.
“왜. 내가 맨 처음 이름 지어 줬을 땐 이쁘다고 좋아했으면서.”
“그땐 한국말에 서툴러서 그랬지!”
그녀는 날 무섭게 노려봤지만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였다.
백철우. 이화린.
드디어 처음으로 현실에서부터 알던 사람들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