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의외로 마물들은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걷는 동안엔 그저 평화로운 숲을 걷고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더욱 불안함이 커졌다.
화린에게 들은 대로라면 마물의 수는 좀비 포함 최소 이백 마리.
‘불안한데.’
아마 모두 말은 안 했어도 머릿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다.
사아아-
그리고 곧 그 생각은 현실로 다가왔다.
돌연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화린이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더니 바로 우리를 보며 물었다.
“줄. 줄 같은 거 없어요?”
“줄 말이요?”
“예. 밧줄 같은 거.”
우리는 이유를 묻기보다 서로를 보았다.
벤과 칼은 딱히 없는 눈치였기에 난 바로 가방을 뒤지는 척하며 상점을 열었다.
예전에 마경에서 마물을 사냥할 때 샀던 적이 있어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깄습니다.”
화린은 기꺼운 표정으로 밧줄을 받아 들었고, 벤과 칼은 희한하다는 눈으로 내 가방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내 가방이 무슨 도라에몽 주머니처럼 보이겠네.
뭐, 대충 공간 마법이라도 걸려 있겠다고 생각하겠지.
“자. 밧줄을 이렇게 자기 몸에 묶으세요. 전투할 때 방해되지 않게 좀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요.”
곧 화린의 말에 다시 주의가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녀는 어느새 허리춤에 밧줄을 단단하게 묶어 놨다.
칼이 밧줄을 받아서 자신의 허리에 묶기 시작했고, 화린은 빠르게 설명했다.
“이 안개는 보통 안개가 아니에요. 마물 카린쿨. 다들 아시죠?”
“카린쿨. 놈이 만들어 낸 거겠군요.”
이번에 대답한 건 나다. 나도 카린쿨에 대해선 제법 잘 알고 있으니까.
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본래는 산악지대에 서식하는 놈이죠.”
그녀는 빠르게 설명했다.
“중하(中下)급인 데다가 전투 능력은 하급 정도밖에 안 되지만 상당히 귀찮은 능력을 갖추고 있어요.”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시각, 청각, 후각을 둔하게 만드는 안개를 만들어요. 워낙 희귀한 놈이고 평소엔 굳이 나서서 다른 마물들이랑 같이 행동하지 않아서 별로 위협적이진 않지만.”
밧줄을 다 묶은 벤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상당히 위험하겠군그래? 주변에 우릴 족치려는 놈들로 바글바글하니.”
나와 화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다 끝났습니다.”
나까지 밧줄을 다 묶고 나자 화린이 칼과 벤을 보았다.
벤과 칼은 카린쿨에 대해 잘 모르는 듯해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해 주기 위해서다.
“오감이 둔해지겠지만, 주변을 철저하게 경계해야 해요.”
그녀는 말하다가 밧줄을 톡톡 쳤다.
“그리고 밧줄이 잘린다면 급히 움직이려 하지 말고 차라리 제자리에서 소리를 질러요.”
“알겠소.”
짙은 안개 속에서 동료를 찾으려고 급히 움직이다 보면 고립될 우려가 컸다.
화린은 그 외에도 밧줄을 한 번 당기면 적 출현.
두 번 당기면 정지.
세 번 당기면 전력으로 달려서 도망치라는 신호라고 말했다.
아직은 청각은 크게 둔해지지 않았지만, 안개가 더 심해지면 바로 앞에서 말해도 잘 안 들릴 테니.
“그런데 안개가 심해지면 방향은 어떻게 알고 움직일 거요?”
출발하기 직전 벤이 의문을 제기했다.
화린은 그 말에 손을 들어 보였다.
어느새 그녀의 손엔 나침반 같은 게 들려 있었다.
“아티팩트에요. 여기. 이쪽 빛이 나는 곳이 북쪽을 가리키는 거고요.”
그녀의 말대로 한쪽이 희미하게 푸른색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한 손에 밧줄을 쥔 상태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걷는 순서는 화린-칼-벤-나.
주변을 경계하면서 계속해서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화린의 판단이 시기적절했다는 걸 알았다.
안개가 매우 심해진 것이다.
내 위치에서는 화린은 아예 안 보였고, 칼은 겨우 형태만 보였다.
또 한 코끝에 닿는 냄새와 귀에 들리는 소리마저 둔해졌다.
그나마 손끝에 닿는 밧줄의 감촉만이 선명할 뿐.
“벤.”
나는 벤을 불러봤다.
그리 작지 않은 소리인데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벤!”
약간 크게 부른 후에야 그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뒤를 보았다.
벤은 나를 보며 입을 벌렸다.
“…….”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목에 핏줄을 세워 가며 말했다.
“나 불렀어?”
그제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큰 소리로 대답했다.
“화린이랑 칼 잘 보여요?”
“칼은 잘 보여. 그런데 화린은 흐릿하게 보인다. 너는?”
“저는 칼 씨까지만 보여요! 화린 씨는 아예 안 보이고요!”
벤은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대략 적으로 시야 범위가 계산됐다.
이 정도 범위면 내 몸 하나 건사할 정도는 되겠지만.
‘다른 사람들까지는 무리겠어.’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왼쪽 눈을 손으로 가렸다.
‘용안.’
눈이 따끔거린다.
손을 다시 내리니 약간 달라진 시야가 보였다.
‘오.’
나는 살짝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런 식인 줄 알았으면 진작 썼을 텐데.
완전히 시야가 트인 건 아니지만 저 앞에 화린의 몸 윤곽선이 희미하게 보였다.
쿨타임과 지속 시간만 아니라면 항상 사용하고 있을 텐데.
‘흐음.’
나는 눈을 돌려 안개를 보았다.
그냥 봤을 땐 회색빛이었는데 용안으로 보니 살짝 달랐다.
‘검은색.’
검은색의 기운이 안개에 조금씩 섞여 있었다.
‘카린쿨의 기운이 섞인 건가?’
용안에는 마물의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 또한 있다.
아직 주변에는 마물이 접근하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카린쿨조차도.
나는 용안을 계속 지속한 상태로 걸었다.
지금 상태론 약 삼십 분 정도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어차피 쿨타임이 있으니 껐다 켜긴 그렇고.
변화가 감지된 건 왼쪽 눈이 살짝 뻑뻑해졌을 때쯤이었다.
전에 시험을 기준으로는 약 15분이 경과되었다는 소리.
난 집중해서 변화를 느낀 곳을 노려보다가 목청 높여 소리 질렀다.
“좌측 전방 마물 출현! 전달!”
동시에 밧줄도 적당히 힘을 줘서 한 번 잡아당겼다.
모두의 움직임이 삽시간에 굳었다.
“좌측 전방 마물 출현! 전달!”
벤이 내 말을 따라서 소리 질렀고, 이어서 희미하게 칼의 목소리도 들렸다.
가장 전방에 있는 화린의 윤곽선이 크게 움직이는 거 보니 그녀도 들은 것 같다.
나는 시선을 떼 좌측 전방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걸 봤다.
윤곽선은 인간의 모습.
반면에 내부에는 검은색의 기운이 요동치고 있다.
‘아마도… 좀비.’
나는 자세히 관찰하고서 또 알게 된 내용을 전파했다.
하지만 난 곧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한 번 더 주변을 훑고선 아예 화린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움직였다.
즉, 우리의 대열이 원형이 되도록.
곧 화린이 날 보고 화들짝 놀라는 게 보인다.
그녀뿐만 아니다. 칼과 벤 또한 비슷한 거리에 있었다. 거의 등을 맞댈 정도로 가까워진 상태다.
화린이 나서서 나에게 뭐라 말했다.
“……!”
뭐라 소리치지만 들리진 않는다.
“크게 말해요!”
난 크게 소리쳤다.
“왜 여깄냐고요!”
“주변에 몬스터가 쫙 깔렸어요! 점점 늘어나고 있고요!”
용안으로 보는 시야에 검은색 기운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좀비뿐만이 아니다.
짐승의 형태를 하는 놈들도 다수 섞여 있다.
놈들은 우릴 포위하듯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물 전체가 쫓아온 건 아닌 듯 아직 수가 적다는 것.
‘그런데 카린쿨은 아직도 없군.’
카린쿨은 자신의 무력이 약하다는 걸 안다.
안개, 그리고 은신에 특화된 만큼 분명 기습을 노리려 할 거다.
“쳇.”
카린쿨을 잡아야 전투가 편해질 텐데.
우린 아예 등을 대고서 섰다.
나는 빠르게 설명했다.
“전방 우측이 제일 얇아요! 그쪽으로 뚫고 가죠!”
어떻게 안 거냐고 묻는 눈치 없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죠!”
화린도 크게 소리치며 바로 발을 옮겼다.
우선은 지금 주변이 보이는 건 나밖에 없기에 나도 그녀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전방!”
난 검을 들며 소리쳤다.
전방 좀비 세 마리.
화르륵-!
내가 소리치자 바로 옆에서 화르륵 불길이 뿜어져 나온다.
슬쩍 보니 그녀의 검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괜히 이름을 화린이라고 지은 게 아니군.’
난 픽 웃으면서 검을 왼쪽으로 휘둘렀다.
스윽-!
검이 좀비의 안면을 깊게 벴다.
꼭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어차피 목적은 빠르게 치고 나가는 거니.
화린도 불길을 최소화해 주로 머리 어림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고.
나도 거의 베는 공격 위주로 안면을 벴다.
칼과 벤도 보진 않았지만 잘 따라오고 있는 것 같다.
‘카린쿨. 카린쿨.’
나는 계속해서 눈을 돌렸다.
우리는 빠르게 걷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카린쿨도 안개를 계속 우리 근처로 퍼트리려면 따라와야 할 터.
그 움직임을 포착해야 한다.
퍼억!
그 와중에도 마물들은 끈질기게 달려들었다.
나야 윤곽이라도 보이지, 다른 사람들은 굉장히 답답할 거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곳에서 갑자기 괴물이 튀어나오니.
휘이익-!
순간 시야에 나와 거리를 두고 돌았다가 벤을 향해서 달려드는 놈이 보였다.
난 모른 척하고 있다가 놈이 가까이 온 순간 뒤로 검을 확 찔렀다.
푸욱!
검이 마물의 두개골을 뚫고 뇌를 휘저었다.
난 검을 회수하며 다시 앞에서 달려오는 마물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바닥을 낮게 기며 빠르게 움직이는 어두운 기운.
‘카린쿨!’
놈이다.
놈은 마물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며 우리와 일정 거리를 두고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짙은 안개 속에서 저렇게 날렵한 몸놀림을 보일 만한 놈은 거의 없었다.
뭣보다 그 모습이 딱 카린쿨과 비슷하기도 했고.
난 슬쩍 옆을 돌아보며 고민했다.
벤과 칼, 화린은 여전히 고전하며 싸우고 있었다.
‘으음.’
하지만 곧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계속 안개 속에서 싸우며 이동하다간 더 피해가 커질 수도 있다.
카린쿨이 아예 모습을 감추면 더 곤란하기도 하고.
“카린쿨 발견했습니다! 다시 제가 찾아올 테니 쭉 전진하세요!”
썩둑-!
나는 바로 날 엮은 밧줄을 잘라 냈다.
“어!”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서 빠르게 달렸다.
카린쿨이 움찔 놀라더니 나를 빤히 보는 게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놈은 내가 자신을 향해 뛰어온다는 걸 확신했는지 빠르게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더 속도를 높였다.
놈의 속도는 그렇게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만약 용안이 없었다면 안개 때문에 절대 못 따라잡았을 거다.
타악-!
나는 도중에 허공으로 훌쩍 몸을 띄웠다.
밑에 카린쿨이 보인다. 떨어져 내리며 그대로 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팍-!
하지만 놈은 날렵하게 옆으로 피해 냈다.
쉬이이익-!
바로 앞에서 보니 놈의 몸에는 구멍이 악 열 개 정도 나 있었다.
저기서 안개를 뿜어내는데 가까이 오니 그 효과가 더욱 심해졌다.
‘귀신을 상대하는 기분이군.’
분명 적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눈이 흐릿하고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희미하게 나던 풀이나 흙냄새 또한 아예 자취를 감춘 상태.
팍!
놈이 다시 도망가려는 듯 옆으로 몸을 날렸다.
나는 그냥 뇌기를 쓸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검의 능력을 쓰기에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으니까.
나는 검을 부여잡고 속으로 강하게 생각했다.
‘풍월(風月)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걸 느꼈는지 검 면에 환한 빛이 일었다.
그곳에는 빼곡하게 고대의 문자가 적혀 있었다.
‘개방.’
휘이이잉-!
나를 중심으로 강한 바람과 함께 은은한 빛이 퍼져 나갔다.
쿠웅-
검에서 강한 진동이 울린다.
그것에서 나는 빛은 점점 강렬해지고, 그럴수록 둔해졌던 내 오감이 점점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설마 카린쿨의 안개를 밀어 내는 효과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후욱-
내가 카린쿨이 도망간 방향으로 발을 떼자 훅 바람이 불어 왔다.
순식간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마치 이렌의 정령술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리가 쭉쭉 뻗어 나가고, 카린쿨의 몸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조금 거리가 남은 상태이긴 하지만 나는 그대로 검을 들어 올렸다.
검 끝에 하얀빛이 맺힌다.
마치 달과 같이 은은한 빛이.
“삭월(朔月).”
그리고 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을 때.
빛이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