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뭐라고?”
“정확히 말하면 화린 파티에 있던 궁수인 것 같군.”
“허…….”
벤도 할 말을 잃고서 바닥에 쓰러진 좀비를 보았다.
좀비.
영화나 게임 등에 나오는 것처럼 죽었던 시체가 다시 되살아난 경우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다만, 그 요인은 바이러스 같은 것이 아니라 마물과 같이 ‘어둠’에 의한 것이다.
마물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 가끔 발생하는 현상인데, 사람이 죽거나 큰 부상을 입은 후 짙은 농도의 어둠에 접했을 때 종종 저렇게 되살아나곤 한다.
아까 벤이 말했던 서부전선이 그런 장소의 대표적인 에다.
그곳에선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바로 화장을 한다. 여의치 않은 상황에선 시체를 한곳에 모아 모두 불태우고.
큰 부상을 입었을 경우엔…….
대부분 동료의 손에 의해 죽는다.
벤은 복잡한 눈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칼을 보았다.
“마부와 말은 죽어 버렸고. 길 한복판에 좀비의 습격이라.”
그의 눈이 슬쩍 죽은 마부와 말을 향했다.
곧 그는 바닥에 침을 퉤 뱉으며 칼을 향해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칼은 눈을 내리깔고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화린이 누구인지 아는가?”
“여기서 그년 이름이 왜 나와?”
벤은 바로 그렇게 쏘아붙였다가 뒤늦게 바닥에 쓰러진 좀비를 슬쩍 보았다.
그러고 보니 칼은 저 좀비가 본래 화린 파티의 소속이었다고 했었다.
“아니, 그래. 철급 용병에 얼굴이 꽤나 반반한 거 정도는 알지. 그리고 아까 저 좀비 새끼가 화린 파티라는 것도 들었고.”
벤은 빠르게 말한 후 눈을 번뜩였다.
“근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왜 얼굴이 반반하다고 하니 백마 탄 왕자님이라도 돼 보려는 건가? 응?”
그는 약간 모욕적인 언사까지 내뱉었지만 칼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화린은 본래 게럴드의 밑에 있었어.”
“뭐?”
“사실 지금도 완전히 독립했다고 보긴 힘들지. 게럴드가 화린에게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직접 파티를 이끌어 보라고 시켰다는 얘기가 있거든.”
이제까지 쭉 화가 나 있는 것 같던 벤의 얼굴이 점점 묘하게 변했다.
“친남매라는 소문도 있지만. 그건 확인되지 않는 얘기니 제외하고.”
칼은 벤과 나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 정도까지 말하면 무슨 뜻인지 이미 알아들었지 않나?”
“제길! 그래! 알아들었어. 알아들었다고. 그래도 이건 미친 짓이야. 고작 세 명으로 수색을 한다고?”
벤은 여전히 크게 소리쳤지만, 아까보다는 많이 성질이 누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그 게럴드에게 ‘큰 빚’을 지울 기회야. 큰 빚 말이야.”
게럴드.
무려 금 등급의 모험가.
단지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된다.
백금 등급의 모험가는 전 대륙에 고작 세 명. 그것도 거의 전설적인 인물들이다.
그렇기에 금 등급은 실질적으로 모험가들이 바라볼 수 있는 제일 높은 등급이다.
그 수도 백금보다는 아니지만 그리 많지 않은 편이기도 하고.
일국의 수도인데 금 등급의 모험가가 고작 게럴드 한 명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미친 짓이 아니라 이건 미친 기회를 잡는 일이지. 다시없을 기회.”
항상 냉정하던 칼의 눈에 처음으로 묘한 열기가 드러났다.
“하.”
벤은 약간 힘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곧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할 수 있긴 해?”
“철 등급 둘에 동 한 명이야. 그리고 나라고 무리하게까지 수색할 생각은 없어. 위험하면 빠질 거라고.”
칼은 그렇게 말하고서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무엇보다 흔적이 저렇게 선명하잖아.”
그가 가리킨 것은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한 땅이었다.
바로 저 좀비가 걸어오면서 찍힌 발자국이다. 그것은 땅을 따라서 숲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나도 강요할 생각은 없어. 둘 중에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포기하지.”
칼은 우리 둘을 번갈아보며 딱 잘라서 말했다.
벤은 아직도 살짝 고민하는 기색이었고.
“저는 하겠습니다.”
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뭐?”
내 빠른 대답에 벤은 물론이고 칼조차 살짝 놀란 듯 나를 보았다.
“칼 씨 말대로 그리 위험한 일이 아니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죠.”
우선은 ‘화린’이라는 이름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확실히 기억에 있는 이름은 아니지만…….
언젠가 들어봤던 이름인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직접 사건의 진상을 확인할 기회가 왔는데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약 이 일이 그놈 짓이라면 단서를 확보할 수도 있겠지.’
나는 그렇게 마음속으로도 결론을 내렸다.
결국, 벤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겠다고 했다.
칼은 그 말에 바로 짐을 챙겨서 출발하자고 말했다. 우리는 마차에서 약간의 짐 등을 챙겨 나왔다.
“그럼 이 발자국을 따라 이동한다.”
“그래. 빌어먹을…….”
칼은 좀비가 남긴 흔적을 따라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뒤를 따르며 주변을 경계했다.
본래 실종 사건들과 마물의 대규모 준동이 일어났던 곳은 서쪽의 보르헤트 숲이다.
하지만 이곳은 수도의 동쪽 방면인 챠트 숲.
좀비의 상태가 비교적 멀쩡한 걸 보면 죽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보였다.
즉, 남자가 화린 파티와 계속 같이 있었다면 이곳 근처까지 와서 죽고 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도대체 왜?
나는 외부의 개입은 우선 배제하고서 생각했다. 벌써부터 그걸 넣고서 생각하면 잘못된 추측을 할 수도 있으니까.
‘단순히 보르헤트에서 여기까지 도망 왔다는 건 말이 안 돼.’
애초에 도망을 칠 거면 더 가까운 수도로 도망쳐야지, 굳이 여기까지 도망쳐 올 이유가 없으니까.
‘확실한 건 무언가 더 단서를 얻어야 알 수 있겠네.’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을 이어 가면서도 주변을 경계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언제 또 좀비나 마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거니까.
“으음.”
계속 이동하던 중 칼이 침음성을 흘리더니 손을 들었다.
“잠시.”
그는 멈춰 서서 바닥을 유심히 살폈다.
나도 그걸 지켜보다가 슬쩍 탐색 스킬을 써 보았다.
눈앞이 초록색으로 빛나더니 꽤 흐릿해져 있던 발자국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무엇보다 의외의 요소들도 몇 가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칼이 살펴보고 있는 것도 보았다.
곧 그것의 정보가 나타났다.
[인분]
[사람의 똥이다]
‘……?’
응?
사람의… 뭐?
“흐음.”
칼은 그것을 손으로 눌러 보기도 하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아 보기도 했다.
설마 맛까지 보는 건 아니겠지?
“사람의 흔적이다.”
다행히 칼은 거기까지 가진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우리에게 말했다.
“자세히 보면 이것을 기점으로 발자국이 두 개가 나뉘지.”
칼은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전 나도 탐색 스킬로 확인했던 점이었다.
인분 근처로 두 명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그리고 내 생각엔 우리가 슬슬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되는군.”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발자국 두 개가 다 이어져 있는 쪽으로 걸어가 시야를 가로막는 풀숲을 확 거둬 냈다.
“오.”
벤이 작은 탄성을 흘렸다.
그곳에는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짐 일부가 놓여 있었다.
게다가 주변으로 발자국 몇 개가 어지럽게 찍혀 있는데, 내가 봐도 무언가 급박한 상황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명이 볼일을 보는 도중 좀비의 습격을 받았다. 그 좀비는 높은 확률로 큰 부상을 입거나 시체 상태였던 그들의 동료였을 거다.”
그는 발자국 두 개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찍혀 있다고 했다.
볼일을 보러 간 사람이 먼저 가고, 좀비로 변모한 사람이 뒤따라갔다는 것.
“이제부턴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약 한 시간 이내로 따라잡을 수 있을 테니.”
칼은 네 명의 발자국이 이어진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전보다 더 빠른 발걸음으로 흔적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만큼 우리의 신경도 더욱 곤두서 있었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살아 있는 인간 네 명을 찾는 것.
하지만 네 명의 좀비를 마주할 확률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
“쉿.”
흔적을 따라가던 중 벤이 슬쩍 입을 열었다. 칼은 바로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캬아아아아아-!
그리고 나는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아마 칼도 이 소리를 들은 듯했다.
칼은 등에서 활을 푸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전투 준비. 앞으로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이동한다.”
우리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다시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나는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이번 여정에선 뇌기(雷氣)는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단순히 수련이 목적인 건 아니고,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최근에 벼락 부족의 족장으로서의 나를 겨냥한 것 같은 위협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엔 모습을 바꿨다.
평범한 철 등급 모험가 ‘진’.
아직 모험가 ‘진’으로서 나는 전혀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니 아예 벼락 부족의 족장으로서의 나와 지금의 나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게 할 생각이다.
그걸 위해서 아예 얼굴까지 변장 아이템을 사서 바꿨다.
또한 이번엔 본 전력을 숨기고 최대한 이 검의 능력만을 활용해서 싸울 계획이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거다.
나는 한 번 더 그것을 속으로 되새기며 검을 꽉 잡았다.
캬아아아악-!
점점 다가갈수록 소리가 선명해졌다. 벤도 완전히 얼굴이 굳어 있었다.
칼이 손을 들며 다시 한 번 멈췄다. 그는 손으로 자신을 한 번 가리켰다가 나무 위를 가리켰다.
올라가서 한번 상황을 본다는 뜻 같았다.
우리가 동의하자마자 그는 빠르게 나무를 타고 올랐고, 어딘가를 빤히 보더니 이번엔 손짓이 아니라 입을 열어 직접 말했다.
“좀비 셋! 인간 한 명! 바로 진입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바로 앞쪽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우리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아압!”
풀숲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파악-!
풀숲을 박차고 나가자마자 전방을 보니 여자 한 명이 좀비 둘과 싸우고 있었다.
칼은 바로 멈춰 서며 화살을 한 발 쐈고, 벤과 나는 각자 무기를 들고 좀비에게 달려들었다.
“키이이익!”
화살은 좀비의 어깨에 박혔다. 놈이 갑자기 획 몸을 튼 까닭이다.
그놈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몸을 틀었다가 우연히 화살을 피한 듯했다.
좀비가 나를 향해 팔을 들어 올린다. 나는 바로 옆으로 몸을 틀었다.
“캬악!”
놈의 팔이 아슬아슬하게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대로 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
서걱-!
좀비의 팔 한쪽이 그대로 떨어진다. 놈도 좀비라고는 하나 본바탕은 인간.
팔 한쪽이 없어지자 그대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다.
난 길게 고민할 것 없이 좀비의 왼쪽 다리를 걷어찼다.
그대로 놈의 몸이 앞으로 쏠린다.
칼 손잡이로 좀비의 관자놀이를 찍었다.
빠각!
둔한 소리와 함께 좀비가 풀썩 넘어진다.
칼을 다시 역수로 잡고서 몸을 틀며 넘어진 좀비의 뒤통수를 향해 칼을 내리찍었다.
푸욱-!
칼날이 뼈마저 베어 버리고 파고든다.
고개를 들어 나머지 두 놈을 보니, 한 마리는 벤이 거의 다 끝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아직…….
푹!
방금 죽었다.
보니까 머리통에 화살을 세 대나 맞은 상태였다. 방금 여자가 머리통에 검까지 꽂아서 확실히 죽었고.
“후우.”
곧 이어 벤까지 좀비를 죽이고 나자 분위기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여자는 혼란스러움과 경계심이 섞인 눈으로 우리를 보았다.
뭔가 말을 꺼내기 힘든 분위기에서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칼이었다.
“화린 씨 맞으십니까?”
“…당신은 누구시죠?”
여자는 칼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역으로 질문을 해 왔다.
“하이고. 기껏 도와줬더니 개눈깔 뜨는 것 보소.”
벤은 도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경계심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여자에게 비아냥거렸다.
화린으로 추정되는 여자는 그런 벤을 강렬하게 째려봤다.
그때 다시 칼이 나서서 말했다.
“저는 철급 모험가 칼이라고 합니다. 게럴드 씨의 보르헤트 숲 부근에서 발생한 실종된 모험가 연합 소속의 파티들의 흔적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중간에 마차를 타고 가다가 좀비에게 습격당했다는 것.
이전에 안면이 있던 사람이라 실종자와 관련이 되어 있다는 걸 알고서 흔적을 쫓아왔다는 것.
그리고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까지.
중간에 모험가 연합의 패까지 꺼내서 보여 주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여자의 경계심도 점점 누그러졌다.
그녀는 칼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짧게 대답하고 품속을 뒤적이더니 모험가의 패를 꺼내 들었다.
자세히 보니 화린이라는 이름이 양각되어 있었다.
“저는 철급 모험가 화린입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자, 즉 화린과 칼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벤과 나는 멀뚱히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멀뚱히 서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이상하게 그녀의 얼굴이 익숙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진홍빛의 머리카락.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이목구비.
처음 봤을 땐 약간 신경질적이던 인상이 지금은 좀 누그러져 있었다.
나는 목덜미를 긁으며 그녀의 얼굴을 더 자세히 봤다.
꽤 화려한 느낌의 미인이라 쉽게 까먹을 만한 인상이 아닌데.
왜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지?
“흐음.”
아. 생각해 보니 머리칼이 다른 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로 그녀의 머리칼을 검은색으로 바꿔 생각하면서 다시 그녀를 봤다.
“근데 저분은 누군데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죠?”
그때 갑자기 그녀가 나를 향해 톡 쏘는 말투로 말했다.
“아, 여기는…….”
칼이 나를 설명하려는데, 그녀의 얼굴이 정면으로 날 향한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확 떠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향덕이니?”
말해 놓고 아차 싶었지만, 그 말을 들은 화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열린다.
“어, 어떻게?”
그녀의 반응에 난 확신했다. 자연스레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맞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