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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87화 (87/170)
  • 87화

    곧 그들은 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나무에서도 한 무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엘 루 님.”

    “오! 오랜만이네.”

    호진이 나서서 인사하니 엘 루도 웃으며 인사했다.

    그는 이어서 마틴을 가리켰다.

    “여긴 저번에 보셨었지요?”

    “아. 그 소년? 그런데 안 본 사이에 많이 컸군? 아무리 인간이 성장이 빠르다지만.”

    엘 루가 미심쩍은 얼굴로 마틴을 바라봤다. 마틴은 머쓱하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처음 말씀드리는 것 같군요. 마틴입니다.”

    “그리고 이젠 제펠 왕국의 왕이지.”

    “호오?”

    호진이 덧붙여 말하자 엘 루는 약간 놀랍다는 듯 마틴을 보았다.

    “제펠이라면 그? 그렇다면 그놈, 아니 그분은…….”

    엘 루는 던전을 지배하던 왕을 떠올리며 말했다가,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는지 호칭을 바꾸어 말했다.

    그도 던전 내의 유적을 조사하며 왕국에 얽힌 이야기를 약간이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틴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라고 할 필요 없습니다. 그 자식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놈이었죠.”

    “흠, 흠. 그런 놈이긴 했었지.”

    “예. 그 자식은 죽었습니다. 제가 왕위를 계승했죠.”

    엘 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얼굴에 남아 있던 약간의 장난기와 웃음마저 싹 지우고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그는 잠시 후 고개를 들어 호진을 보았다.

    “저번에 자네와 얘기한 게 있었지. 호진.”

    “그랬었죠.”

    호진도 엘 루가 무슨 말을 꺼낼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이렇게 되니 신기하군. 아, 물론 자네를 못 믿은 건 아니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잖나.”

    “그럼요. 다른 사람이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호진은 장난기가 섞인 말투로 그리 답했다. 엘 루도 그제야 표정을 조금 풀었다.

    ‘기분 좋은 날에 심각해질 필요는 없지.’

    특히 이어질 대화를 생각하려면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게 좋았다.

    “그럼 제펠의 왕, 마틴. 자네는 우리의 동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

    마틴은 의아한 표정으로 호진을 보았다.

    “아. 아직 얘한텐 말 안 했어.”

    “뭐? 아니, 자네는 뭐 그리 숨기는 게 많나? 이 친구한텐 말해 줬어야지.”

    호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걸 꼭 여기서 삭막하게 얘기해야겠어? 사람들도 멀뚱멀뚱 서 있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잔을 입에 털어 넣는 손짓을 했다.

    “좀 쉬면서 축하 좀 해 보자고.”

    마틴과 엘 루가 동시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엘 루는 기꺼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직도 그러고 서 있나? 우리는 아껴 뒀던 술 좀 들고 가지. 왕궁에 파티할 만한 공간이 있을 거 것 같은데?”

    그 말을 끝으로 양 무리는 각자 보금자리로 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요정들은 술과 음식 등을 들고 왔고, 나도 마틴에게 빚으로 달아 두라고 농담하며 음식들을 풀었다.

    축제는 흥겨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모두 힘들었던 일을 잊기 위해 더욱더 활기차게 웃고 떠들었다.

    남은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각자 지닌 슬픔을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웃어야 한다. 비록 힘들지라도.

    그렇기 때문일까.

    모두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 *

    축제가 끝나기도 전 새벽. 호진 일행은 떠났다.

    엘 루와 마틴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바로 엘 루의 방 안에서.

    마틴은 그래도 지난밤 동안 많이 기분이 나아졌는지 나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엘 루는 그런 마틴을 빤히 보다가 툭 말했다.

    “자네 너무 많이 퍼 준 거 아닌가?”

    “하하. 글쎄요. 마음 같아선 왕궁 창고를 다 주고 싶었는데요.”

    “쯧쯧. 너무 사람이 무르구먼. 아무리 그래도 왕궁 창고의 반을 털어 주는 사람이 어딨나?”

    마틴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는 짓궂은 표정으로 엘 루에게 물었다.

    “그러는 엘 루님은 왜 그 귀물을 주셨습니까? 그건 돈을 줘도 못 구할 물건인데요.”

    “험험. 아니, 뭐 애초에 그게 내 물건이었나? 자네 왕국의 물건이었지. 애초에 자네에게 돌려준다고 했었지 않나?”

    “에이. 전 분명히 그것은 제 물건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요. 마음대로 하시라고.”

    엘 루는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무표정이었지만 어쩐지 민망함이 느껴지는 듯한 태도로.

    하지만 마틴은 아직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손녀분까지…….”

    “그만!”

    엘 루가 당황한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우선 자네도 차 한 잔 받게. 우리 슬슬 동맹에 관한 얘기 좀 하지. 너무 오래 떠들고 있었군.”

    그는 가타부타 마틴에게 잔을 떠밀었다.

    마틴은 싱긋 웃으면서 잔을 받아 들었다.

    “자네, 인제 보니 꽤 능글맞군. 안 그렇게 봤는데 말야.”

    “이게 원래 성격입니다.”

    마틴의 말대로 그의 성격은 본래 밝은 편이었다.

    지난 시간이 웃음 한번 짓기 힘들 정도로 여유가 없었을 뿐.

    “그럼 정말 동맹에 관해 얘기해 볼까요.”

    “그러지.”

    곧 둘은 제펠 왕국과 그림자 요정 간의 동맹에 대한 깊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호진이 심어 둔 씨앗이 슬슬 새싹을 틔우려 한다.

    * * *

    한밤중.

    때아닌 비명과 고함, 소음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이곳은 바로 세 겹이나 되는 성벽에 둘러싸여 있는 도시.

    폴그룬이다.

    “서쪽! 서쪽 막아!”

    “삼 조 사격!”

    “헬리온! 헬리온이다!”

    성벽 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

    갖가지 마물들이 외곽 성벽들을 파괴하고 뛰어넘으며 본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명월(冥月)의 마지막 날.

    십오 일째 밤이었다.

    마물들의 공세는 첫날부터 지금까지 갈수록 거세졌고, 이들은 장장 십오 일이나 제대로 된 휴식을 못 취한 상태였다.

    심지어 탈로스마저 무리하게 성벽과 방어 시설을 증축하다가 탈진해 버렸다.

    케륵은 성의 가장 높은 곳에서 연이어 지시를 내리며 주술을 쓰고 있었다.

    “벼락이여어!”

    케륵이 손을 높이 들어 올리자 막 성벽을 기어오르던 마물의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진다.

    하지만 전황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케륵은 초조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다 소리쳤다.

    “케르륵-. 펜리르! 크룩! 한 번 더!”

    그의 외침에 성벽 위에서 한참 도끼를 휘두르던 크룩이 돌아봤다.

    “오케이!”

    크룩은 대답을 함과 동시에 성벽 아래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가 아래로 떨어지는 도중 허공이 일렁거리더니 늑대가 나타났다.

    크허엉-!

    펜리르의 울음소리가 전장을 뒤흔들었다.

    늑대는 성벽을 타오르며 크룩에게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좀 생각하고 움직여라. 근육 돼지 놈아.

    그러나 크룩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호탕하게 말했다.

    “크루룩! 짜증은 저 마물 새끼들한테나 내라고!”

    펜리르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성벽을 건너갔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마물의 한복판.

    펜리르는 다시 모습을 숨긴 상태였기에 크룩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좋아! 한바탕 놀아 볼까!”

    크룩은 거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그의 눈에 유난히 큰 덩치의 마물이 보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내던졌다.

    “받아라!”

    도끼가 일직선으로 날아가며 마물의 머리에 닿는다.

    콰앙-!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마물의 몸이 옆으로 넘어갔다.

    크룩은 만족스러운 듯 어금니를 씰룩이더니 크게 소리쳤다.

    “간- 다-!”

    그는 펜리르의 등을 힘껏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몸이 점점 거대해지더니 그가 땅을 밟을 때쯤엔 주변에 그보다 큰 마물은 하나도 없었다.

    크룩은 거대해진 팔과 다리로 주변을 휩쓸며 함성을 내질렀다.

    크라아아아아-!

    그의 오른쪽 팔에서 빛이 나더니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감싸는 화려한 건틀릿이 생겨났다.

    크룩은 말 그대로 마물들을 짓누르며 뛰어다니다 오른팔을 높이 들었다.

    “덤벼 이 개- 새- 끼- 들- 아-!”

    콰르르릉-!

    건틀릿에서 전격이 확 튀어 오른다. 그의 팔이 맹렬한 속도로 땅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아앙-!

    그의 팔이 땅에 닿는 순간 주변에 거대한 진동이 일었다. 그 진동만으로도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놈들이 생겼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건틀릿에서 땅으로 퍼져 나간 전격은 그의 주변으로 원을 그리며 넓게 퍼져 나가며 마물들을 괴롭혔다.

    그가 주먹으로 내려찍은 지점은 심지어 크레이터처럼 움푹 파여 있기까지 했으니. 어마어마한 파괴력이었다.

    크룩이 화려하게 날뛰는 동안 펜리르는 은신한 상태로 기습을 하며 실익을 챙겼다.

    둘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천천히 전황이 유리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전장의 한쪽에서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

    크룩은 황급히 그쪽을 보았다.

    “이런 씨발!”

    그는 그쪽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주변에 있던 마물들은 크룩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무리 크룩이라도 마물들 수십이 달려드는데 바로 떨쳐 낼 재주는 없었다.

    “이거 놔!”

    꽈아아앙-!

    크룩은 다급한 눈으로 놈들을 보았다.

    맹렬하게 날아오르고 있는 수십 마리의 비행체들.

    키록스.

    독수리와 비슷한 생김새의 마물인데, 그 크기는 드레이크만큼이나 커다랗고,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가진 놈들이었다.

    활과 주술이 놈들에게 집중되고 있긴 했지만, 완전히 저지하기엔 역부족이다.

    하필 크룩과 펜리르가 성벽 아래로 내려와 있을 때라서 마물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스으아아아아아-!

    하지만 키록스 놈들도 모르는 게 있었다.

    허공을 가르는 수십 개의 검은 연기. 그것들이 키록스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변은 맨 앞에 있던 놈부터 시작되었다.

    키이이이-?

    그 키록스는 날갯짓을 하다 말고 갑자기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키이이-!

    직후 놈은 아예 날갯짓을 멈추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콰앙-!

    키록스가 떨어진 자리에 먼지구덩이가 피어오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줄지어서 키록스들이 추락하기 시작한다.

    키이이이!

    키이이이이익-!

    키록스들은 속수무책으로 바닥으로 추락했고, 검은빛의 연기들은 게걸스럽게 마물들의 목숨을 탐했다.

    “바람이여-!”

    “파멸의 염화!”

    이어서 저 멀리에서부터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장의 한쪽이 밝게 빛난다.

    “멀티(MULTY)- 그리스!”

    “칼날 회오리!”

    마물들 수십 마리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고, 그 자리를 칼날 같은 바람이 휩쓴다.

    새로 나타난 이들은 말 그대로 마물들을 분쇄하며 전진해 온다.

    바로 이렌과 바하토프, 엘 리였다.

    단 세 명이 추가됐을 뿐이지만, 키록스를 완전히 몰살시킨 시점부터 전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기실 그들이 점점 강한 적을 상대하느라 인지하지 못했을 뿐, 모두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비해 괄목한 성장을 이뤄 낸 상태.

    특히 엘라의 그림자술(術)은 대단위 적을 상대하는 것에 큰 효율을 발휘했다.

    높은 곳에서 지휘를 하는 케륵은 그들을 보자마자 황급히 그 주위를 훑어보았다.

    ‘족장님이……!’

    당연히 대족장님이 함께 왔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곧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없네?’

    그 어디에도 대족장. 호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케르륵.”

    케륵이 느낀 당혹감과 별개로 전쟁은 계속 이어졌고, 동이 터오를 땐 모두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길고 긴 명월의 밤이 끝나간단 신호였으니까.

    하지만 호진은 끝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 *

    작은 비탈길을 따라 마차 한 대가 달리고 있다.

    그 마차 안에는 짐덩이 몇 개와 함께 사람 서너 명이 타고 있었다.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 둘과 비교적 호남형의 얼굴인 사내 하나.

    그중에서도 호남형의 사내는 바닥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바닥 쪽에 있는 작은 창을.

    [왕국으로 승급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벼락 부족으로 돌아가 승급 의식을 진행해 주세요.]

    사내는 그 창을 뚫어지라 보다가 곧 고개를 들며 기지개를 켰다.

    “하암-”

    아예 하품까지 쩍 한 그는 뒤에 등을 푹 기대며 생각했다.

    ‘언제 도착하려나.’

    사내, 호진은 지루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곧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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