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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86화 (86/170)

86화

으음.

난 비장한 목소리로 말하는 마틴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 말은 좀 위험한데.

“네가 감히… 아니, 근데 어떻게?”

마틴은 검을 들고서 한 발씩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걸을 때마다 발밑에 하얀색의 파문이 인다.

황제를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이 점점 하얀빛에 스러진다. 난 그 모습을 보며 묘한 감흥이 일었다.

빛과 어둠이라.

참으로 유치하면서도 고전적인 대비 아닌가.

용사와 마왕? 아니, 그렇게 보기엔 상대가 너무 약하군.

현재 황제는 겉보기로는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실상은 속 빈 강정이나 마찬가지다.

본래 지니고 있던 기운은 상실한 지 오래고, 그슨대의 핵조차 깨진 상태이니까.

그의 주변에 둘린 어둠은 어디까지나 찌꺼기.

내가 마무리를 지을 수도 있었지만 그를 처리하는 건 마틴의 몫이다.

던전을 ‘완전’공략하기 위해선 꼭 그래야 한다.

-안 돼. 안 돼!

마틴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황제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를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이 점점 사라질수록 황제의 본 모습이 드러났다.

쭈글쭈글 주름진 얼굴. 피부에는 검버섯이 올라와 있고, 하얗게 센 머리에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다.

어이없을 정도로 과했던 자신감마저 잃어버린 그는.

‘정말로 시골의 촌부나 다름없군.’

그저 무력한 늙은이일 뿐.

“으아아아아아아!”

결국, 점점 뒤로 물러나던 황제가 발악을 시작했다.

검은색의 기운들이 몽글몽글 뭉치더니 갖가지 형상들을 만들어 낸다.

사자, 늑대, 인간 등등.

하지만 마틴이 검을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기운들은 산산이 흩어졌다.

마틴은 황제를 지긋이 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하지만 황제는 그 말을 듣지도 않고 계속해서 기운을 난사해 댔다. 광기 어린 비명을 지르면서.

“아아악!”

“아버지. 그만하십시오.”

마틴은 입술을 질근 깨물며 점점 더 속도를 높였다. 둘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진다.

그는 마지막엔 거의 전력 질주처럼 뛰어가 황제에게 몸통 박치기를 했다.

황제가 처참하게 나가떨어지며 바닥을 구른다. 그는 그 상태에서도 손을 내저으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끄으윽. 나는, 나는 널 죽이려던 게 아니다. 아들아. 아들아! 나는, 나는 그저!

마틴은 발악하듯 소리치는 아버지의 비명을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걸 바라보는 마틴의 눈에 점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른다. 곧 그는 결심한 듯 얼굴을 굳혔다.

“황제여.”

황제는 계속해서 무어라 소리쳤지만, 마틴은 그의 가슴팍을 팍 발로 짓밟았다.

“너무 긴 시간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당신에게도. 그리고.”

마틴은 슬쩍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을.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린 후 입을 열었다.

“백성들에게도.”

마틴은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황제의 비명이 점점 더 커진다.

“그만 끝냅시다.”

검이 황제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푸욱-!

황제의 눈이 부릅떠진다.

“부디 죽어서도 죗값을 치르시길 바랍니다.”

“……!”

그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완전히 흩어진다.

이윽고 남은 건 그저 욕심 많던 노인의 시체뿐. 그리고 곧 그마저도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사르르르-

일국의 왕이자, 자신을 황제로 자칭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의 비참한 최후였다.

“와아아아아!”

그때 누군가가 환호성을 질렀다. 의아한 마음에 슬쩍 보니 바하토프였다.

나는 바로 다가가 놈의 머리를 때렸다.

“아악! 왜, 왜 그러십…….”

“넌 가만히 있어. 그게 도와주는 거니까.”

바하토프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제 바로 불만을 안 터트리는 걸 보면 얘도 많이 나아졌다.

난 다시 마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마틴도 고개를 들어 날 보고 있었다.

“호진… 님. 맞습니까?”

호진이라. 그러고 보면 마틴이 내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인 것 같다.

나는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척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하하. 안 그러셔도 됩니다.”

마틴의 만류에 다시 고개를 들어서 그를 마주 봤다.

마틴의 입가에 웃음기가 걸려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눈가에 담긴 슬픔과 괴로움, 회한 등의 감정이 더 눈에 띄었다.

나도 결국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해야 할 일이었어.”

“…그렇겠지요.”

“네가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될 거로 생각했겠지.”

나는 그를 향해 걸어가며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그가 죄책감을 느끼기엔 황제는 너무 쓰레기 같은 놈이었으니까.

“놈이 주술을 펼치려 할 때 넌 막으려고 했었겠지. 하지만 결국 왕은 널 유폐시키고 주술을 펼쳤어. 게다가 주술이 끝난 후 네가 여전히 인간의 모습인 걸 보고 널 아예 봉인시켜 버렸고.”

나는 그의 앞에 멈춰 섰다.

마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두운 어조로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털었다.

“그냥, 그냥 잠시 감상에 젖었었나 봅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마틴은 씩 웃었다.

그의 웃음엔 여전히 처연함이 담겨 있었지만, 나도 그냥 마주 웃어 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자. 그럼.”

나는 우릴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봤다가 마틴에게 말했다.

“이제 니가 밥값 할 차례다.”

“예?”

“널 그냥 데리고 다닌 줄 알아? 다 지금을 위해서 데리고 다닌 거거든.”

마틴이 입을 벌렸다.

“무엇을…….”

하지만 그의 질문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릉-!

갑자기 사방이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했으니까.

사람들은 당황해서 우리를 올려다봤다. 물론 그중에는 이렌, 바하토프, 엘 리, 엘 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리 말 안 했으니까.

나는 짝- 손뼉을 치며 마틴에게 말했다.

“자! 황제님. 힘 좀 써 주십시오.”

마틴은 내 말에 거의 혼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제, 제가 무얼?”

한껏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더 놀려 주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그러다가 정말 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나를 포함해서.

“간단해. 애초에 이 왕궁은 건물이면서 또한 ‘아티팩트’의 일종이다.”

“아티팩트요?”

마틴은 의아한 듯 물었다. 하긴 건물이랑 아티팩트는 절대 안 어울리는 이름이지.

그그그그그긍-!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공간이 뒤흔들리고 있다. 나는 더욱 빠르게 말했다.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야. 하여튼 이 공간을 통제하려면 인증 절차가 필요해. 자신이 주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단.”

“그게 무엇입니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그에게 던져 주었다.

“왕족의 피다.”

“아……!”

“참고로 황제는 석인이 된 이후로 이 공간에 대한 통제를 대부분 상실했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놈이 아니라 우리가 죽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턱짓으로 마틴의 팔을 가리켰다.

마틴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단검을 팔에 가져다 댔다.

촤악-!

그가 망설임 없이 팔을 긋자 피가 치솟아 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피는 몽글몽글 방울져 떠다녔다.

그리고 잠시 후. 핏방울에서 환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피가 더 흐를수록 그 빛은 더 강해졌다.

콰가가가각-!

그때 거센 진동이 느껴졌다. 획 고개를 돌리니 바로 아래쪽에서 바윗덩이 하나가 날아와 사람들이 서 있던 곳에 부딪힌 듯했다.

“큭!”

마틴은 그걸 보더니 갑자기 단검으로 팔을 한 번 더 그었다.

“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이러면 더 빨리될 것 같아서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빨리 되면 좋지, 뭐.

곧 빛이 점점 더 강해졌고, 어느 순간 환한 빛이 구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그 빛의 구체는 허공을 배회하다가 돌연 마틴의 이마로 날아갔다.

파악!

그리고 마틴의 이마에서 빛이 한 번 번쩍.

“아!”

이내 빛이 가신 그의 이마에는 문양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바로 왕가의 문양이.

“아아!”

마틴이 더 큰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그의 눈이 푸른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눈뿐만이 아니다. 머리, 팔, 다리. 온몸이 푸른빛으로 빛난다.

그는 왕이 되었다.

마틴이 휙 손을 휘젓는다.

그러자 순식간에 위협적으로 울리던 진동음이 멎었다.

다들 그제야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신기한 눈빛으로 마틴을 보면서.

아마 저들 중 기억을 되찾은 이들은 감회가 새로울 거다.

본래 대관식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으니까.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 일행을 제외한 사람들의 몸에도 푸른빛으로 옮겨 갔다.

모두 파란색 빛으로 이어져서 공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굉장히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난 마틴에게 슬쩍 말했다.

“속으로 강하게 생각해.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모두 함께.”

내 말을 들은 건지 마틴의 고개가 미미하게 움직였다.

곧 그가 천천히 양손을 하늘 위로 올렸다.

쿠구구구구궁-!

다시 진동이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엔 공간이 다시 무너지는 게 아니라 다른 진동이었다.

모두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천장에선 한 줄기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 * *

무너진 건물들이 널려 있는 폐허. 주변에 있는 것이라곤 그저 모래와 돌뿐.

이 일대는 사막지대인 데다가 저주받은 땅으로 유명해 거의 사람이 오지 않는 곳이다.

마치 세월이 멈춰 있는 듯한 장소.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드드드드드-!

땅이 거세게 진동한다.

폐허의 건물들은 해묵은 먼지들을 허공으로 피워 올리며, 주변의 모래들은 어지럽게 튀어 오른다.

잠시 후, 갑자기 땅이 높이 치솟았다.

푸화아악-!

폐허를 구성하고 있던 돌무더기들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흩날리는 모래와 먼지들 때문에 땅에서 치솟아 오른 것은 한참 후에야 정체를 드러냈다.

꽤 높은 건물과 그 건물과 비슷한 높이의 나무. 그리고 곧 건물 쪽에서 소란스러운 대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콜록. 콜록. 무슨 모래가 이리 많아?”

“으… 주변에 있던 모래들인 거 같아요.”

“아! 입에 들어갔어!”

건물의 입구 쪽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있는 사내, 호진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다시 뒤로 돌아 건물을 올려다봤다.

잠깐 사이 흙먼지가 꽤 가라앉아서 건물이 훤히 보였다.

“오. 꽤 멋있는데.”

건물의 정체는 바로 왕궁.

왕궁은 순백색이었고, 자연스레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어느새 그의 옆에 선 마틴도 감상 어린 말투로 그리 말했다.

다들 밖으로 나와 건물을 올려다봤다. 감동한 듯한 눈을 한 사람도 있었고, 분노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활짝 웃는 사람도 있었다.

바하토프는 왕궁을 올려다보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호오. 외벽에 있는 저 무늬는 마법진의 일종인 것 같군요. 건물 전체가 아티팩트라고 한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그래. 왕국의 정수가 담긴 건물이지.”

호진도 흥미로운 눈으로 왕궁을 구경했다.

기실 그도 왕궁의 진면모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전작을 플레이했었을 땐 왕궁을 복원하는 걸 실패했었기 때문이다.

‘황제 놈이 자폭했었지.’

그땐 그슨대라는 놈도 없었고, 그림자요정이랑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지도 못했었다.

마틴을 파티로 영입하지도 못했고, 사람을 구할 생각도 못 했었고.

‘이를 테면 베드엔딩이었지.’

각 단계를 거쳐 마지막에 왕궁을 입성했었다. 이번과 달리 그슨대가 아닌 병사, 기사단, 그리고 황제와 전투를 했다.

결과는 호진 파티의 승리.

이번보다 난도가 더 낮았기에 한 명도 죽지 않고 황제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다음.

황제는 죽기 직전 왕궁을 말 그대로 ‘폭발’시켰다.

호진을 비롯해서 몇 명은 살아남는 데 성공했지만. 파티의 2/3는 그대로 죽어 버렸다.

반쪽짜리 성공이라고 할까.

퀘스트를 진행하는 도중 주어졌던 힌트를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그래도 뭐, 이번엔 성공했으니까.’

반면에 이번엔 그때 주어졌던 힌트를 모조리 분석해 최적의 결과를 이뤄냈다.

호진은 상태창도 슬쩍 확인했다.

이름: 이호진

레벨: 54

직업: 대부족 ‘벼락’의 대족장 / 벼락 신의 계승자

세력: 대부족 ‘벼락’

특성: 뢰신(雷身)

스킬: 기본 창술(Lv.9), 둔기술(Lv4) 전격 방출(Lv.9), 전투 보조, 탐색, 지도 작성.

고유 스킬: 뇌룡섬(창술 파생 스킬), 뇌령(Lv.4), 뇌룡 질주(Lv.4), 쇼크웨이브(Lv.3), 신기 뇌룡(雷龍), 지룡의 용안(龍眼)

레벨이 무려 25나 올랐다.

그가 올리기 힘들어 하던 스킬도 많이 올랐고.

특히 그는 기본 창술과 전격 방출은 레벨이 한계에 달했으니 다음 단계로 올릴 방법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호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기뻐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는 찬찬이 사람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마틴이 있었다.

호진은 마틴에게 말을 걸었다.

“마틴.”

“예?”

그는 멍한 표정으로 있는 마틴의 어깨를 툭 치며 옆을 가리켰다.

“우선 옆집에 사는 이웃 좀 보러 갈까?”

바로 커다란 나무가 있는 방향이었다.

“아. 그러는 게 좋겠네요.”

마틴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호진은 한마디를 덧붙이며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같이 내 보수에 관한 얘기 좀 해 보자고.”

“아… 네?”

마틴은 왠지 모르게 불안감을 느꼈다.

포식자 앞에 선 먹잇감과도 같은 불안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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