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한순간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다급히 방어막을 몇십 겹씩 생성하며 주변에 있는 자원을 모조리 끌어모아 방어막을 만드는 황제를 보았었다.
창끝이 벽을 부수고, 이내 한 겹 한 겹 방어막을 깨며 점점 황제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다.
황제의 일그러진 얼굴과 다급한 손놀림.
무어라 소리치는 입.
그것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었다.
창끝이 황제의 얼굴에 닿는 순간.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강렬한 폭발이 있었고, 나도 그에 밀려서 훅 밀려났다.
아쉬운 건 황제가 그 일격에 죽지 않았다는 것.
확실한 치명타를 입힌 것 같긴 한데, 공격을 받은 직후 놈의 몸이 일렁이더니 훅 사라졌었다.
멀리 가진 못했을 텐데…….
삐이이이이-
이 와중에도 귀에선 이명이 울려 퍼지고 있고, 시야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기술을 사용한 반작용이었다. 아직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을 반작용.
뇌령을 각성하고, 뇌조의 힘을 빌려 강제로 한 단계 더 나아간 힘.
아직 불완전한 기술이었다.
나는 픽 웃었다. 아니, 웃으려다가 결국 실패했다. 몸에 감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뭐, 이랬던 적이 한두 번인가.
삐이이-
그래도 점점 이명이 가라앉고 있었다. 또한, 몸의 감각도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
난 정신을 집중하며 손가락을 꿈틀거려 보았다.
응? 근데 무슨 소리가 들린 거 같았는데?
-…빠!
이번엔 확실히 들었다.
난 누군가의 목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아빠 일어나!
두근.
갑자기 심장이 거칠게 뛰고 온몸의 감각이 한꺼번에 깨어났다.
키루루루루루-!
난 눈을 떴다.
“헉. 허억!”
숨이 거칠게 터져 나온다. 나는 정신없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빠! 괜찮아?
하지만 이내 내가 뇌조의 등 위에 있다는 걸 깨닫고는 그냥 상반신만 일으켰다.
뇌조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대답하려는데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다.
“으… 커헉.”
몇 번 잔기침을 더 한 후에야 난 피를 쏟았다는 걸 깨달았다.
속이 완전히 진탕 됐나 보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온몸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쑤시고 으슬으슬 떨린다.
생각보다 부작용이 더하다.
바람 부족과 전쟁이 막 끝났을 때와 비슷한 정도.
“괘, 괜찮아.”
하지만 나는 뇌조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정말? 그래도…….
“정말 괜찮아.”
한 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녀석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
뇌조의 몸은 불투명하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아마 곧 역소환될 거다. 이렇게라도 말해 주지 않으면 돌아가고 나서도 계속 걱정만 하고 있을 거다.
“이제 돌아가서 쉬고 있어. 아빠가 금방 끝내고 다시 돌아갈게.”
-그래두!
“뇌조야.”
나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뇌조의 깜박거림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다치지 마.
결국, 그녀는 그 말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몸이 바로 아래로 꺼지는 일은 없었다. 내 몸은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난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타악-
발을 디딘 곳은 넓은 바위다. 벽을 이루고 있던 것 중 하나겠지.
“으윽.”
잠시 쉬면서 기운을 진정시키긴 했지만, 여전히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개판이네.”
말 그대로 개판이다. 아까 전엔 그나마 황제가 앉아 있던 옥좌 근처는 멀쩡했는데, 지금은 그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 편조차도 아무도 없으니.
“이거 원.”
예상하긴 했지만,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했다.
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숨을 골랐다.
‘아직도 각성을 못 했으면 완전 나가리인데…….’
난 그런 생각을 하며 우선 몸을 훌쩍 띄웠다.
다른 이들을 찾으러 가기 위해.
* * *
이렌은 멍하니 주변을 보았다.
그녀의 주변에는 작고 큰 돌덩이와 바위들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까 전 황제가 공간을 뒤흔들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모든 자재와 기물들이 명확한 목적성을 띠고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황제가 죽은 건가?’
이렌은 생각했다.
대족장님과 황제가 맞부딪친 순간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눈을 감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건 견뎌 낼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으윽…….”
그녀는 곰곰이 생각을 이어 가다가 어디선가 들린 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이렌은 바로 위에 넓은 바위가 있는 걸 보곤 그쪽으로 몸을 띄웠다.
그녀의 몸이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둥실 떠서 움직였다. 바위 위에 착지한 그녀는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엘 리 님!”
바로 그림자 요정. 엘 리였다.
엘 리의 옆구리에선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떠서 이렌을 보았다.
“이렌?”
“네.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한 손으로 옆구리를 꾹 누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으윽… 다행히 장기는 다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엘 리는 그렇게 말하고서 손을 살짝 휘저었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검은색의 그림자가 날아오더니 그녀의 옆구리에 들러붙었다.
“응급조치는… 됐으니까 움직이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이렌도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이렌도 마음 같아서는 쉬고 있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짐작도 안 가거니와 엘 리 그녀의 능력이 굉장히 도움 되리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곧 그녀들은 그림자와 정령을 이용해 가며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공간 자체가 기이하게 뒤틀리고 엉켜서 찾아다니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그들은 약 팔십 명이 넘는 사람들을 찾았을 때쯤 꽤 넓은 바닥을 찾아서 휴식하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한 무리가 빠르게 이렌들에게로 다가왔다.
“엘 리. 이렌. 여깄었군.”
바로 엘 라였다. 그는 약 삼십이 넘는 무리를 데리고 왔다.
총원은 115명.
이렌과 엘 리, 엘 라는 셋이 모여서 얘기를 나누었다.
가장 먼저 얘기를 꺼낸 건 이렌이었다.
“사람들은 거의 다 찾은 것 같아요.”
“예. 못 찾은 사람이 있다 해도 아마 열 명 내외일 겁니다.
본래 맨 처음 4단계 진입 때 총인원은 209명이었다.
그중에서 서른두 명이 키메라 습격 때 죽었다. 중상자 열여섯 명 중 다섯 명은 이후 후유증으로 사망.
그리고 이곳에서 그 괴물과 접전을 벌일 때 최소 서른이 넘는 사람들이 더 죽었다.
즉, 남은 인원은 아무리 넉넉하게 잡더라도 130명 이하일 거다.
이렌은 어두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대족장님을 아직 못 찾았다는 겁니다.”
대족장뿐만이 아니었다. 바하토프와 마틴 또한 보이지 않았다.
기실 이렌에겐 다른 사람들 따위는 아무 상관 없었다.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던 것도 오롯이 대족장님을 찾기 위해서일 뿐.
‘대족장님…….’
이렌은 우울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씨앗도 못 받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엘 리와 엘 라가 그림자를 동원하여 주변을 수색하는 동안 이렌은 속으로 새로운 결심을 하고 있었다.
대족장님을 찾아서 이곳을 나간다면 꼭 씨앗을 받아 놓자고.
모두 수색에 여념이 없을 때 이렌의 근처로 초록색의 빛줄기가 날아왔다.
-이렌.
‘응.’
바로 그녀의 정령. 바람이었다.
바람은 약간 시무룩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 사람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 같긴 한데 어딨는지는 모르겠어. 공간이 뒤틀려 있어서 어느 방향인지 전혀 감이 안 잡혀.
이렌은 바람의 말을 듣다가 얼굴을 활짝 펴며 말했다.
“기운이 느껴진다고?”
-응. 분명히 느껴져.
“그렇단 말이지.”
그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빠른 속도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심지어 머릿속으로는 한 발 더 나간 생각까지 했다.
‘이것도 대족장님의 계획이었을 거야.’
대족장님이 계획 없이 행동하셨을 리가 없다. 분명 이것도 대족장님의 큰 그림일 거다.
이렌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으… 으음…….”
그때 옆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바로 엘 리가 내는 소리였다.
이렌은 눈을 치뜨며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무슨 일이 있나 걱정되긴 하지만, 아직 그림자를 조종하고 있을 테니 따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떴다.
“허억!”
엘 리는 눈을 뜨자마자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다들 당장 무기 들어요!”
그녀의 말에 앉아서 쉬고 있던 이들은 흠칫 놀라면서도 모두 무기를 집어 들었다.
엘 리는 그 말을 하자마자 바로 가슴을 쥐고서 헐떡였다.
상태가 심상치 않은 건 엘 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끄윽!”
그는 곧 몸부림을 치다가 눈을 번쩍 떴고, 엘 리와 마찬가지로 무언가 말하려다가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있는 걸 보곤 입을 다물었다.
엘 라도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로 숨을 골랐고, 먼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엘 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제. 황제가 오고 있어요.”
“황제?”
이렌도 그 말을 듣고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엘 라와 제가 최대한 막아 내려고 했어요. 하지만 도저히 저지할 수가 없었어요.”
엘 라도 곧 합세해서 말했다.
“크흐. 아마 바로 여기로 올 거다. 무시무시한 놈이더군. 그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놈을 상대로 그렇게 싸웠던 거지…….”
엘 라가 말한 ‘그’는 바로 호진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게다가 이렌의 정령 바람 또한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녀에게 소리쳤다.
-누군가 오고 있어!
모두 불안한 얼굴로 무기를 쥐었다.
마지막에 황제가 보였던 힘은 거의 신과도 같았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손을 한 번 휘저을 때마다 폭풍이 몰아치는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
그들의 불안감을 자극하듯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왔다.
후우우우우웅-!
귓가를 자극하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
저 앞에서부터 모든 공간이 어두워지고 있다.
모든 것이 어둠에 침식되고 있다.
그 중앙에 있는 것은 거의 뼈밖에 남지 않은 노인.
바로 황제였다.
“여기 모여 있었구나. 버러지들아.”
그의 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본래 노인의 모습에다가 회색빛의 몸이긴 했지만, 저렇게 피골이 상접한 모습까진 아니었다.
게다가 모습은 더 볼품없어졌는데 오히려 기세는 더욱 위협적으로 바뀌었다.
마치 재앙을 앞둔 것 같은 느낌이 사람들의 몸을 자극했다.
“크윽.”
엘 리와 엘 라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이렌은 입술을 깨물며 주변에 초록색의 막을 둘렀다.
다른 이들의 안위엔 전혀 관심 없는 그녀였지만, 대족장님이 있었다면 그렇게 명령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두 황제가 다가오는 걸 보고 최대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
황제가 그들의 지척까지 다가온다.
그리고.
그들도 돌아왔다.
후우우우우우웅-!
황제의 반대편. 사람들의 뒤쪽.
그쪽에서 환한 빛이 다가온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마틴?”
바로 마틴이었다.
모두 다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단순히 그가 나타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신이 황금빛에 둘러싸이고 주위로는 새하얀 오오라가 퍼져 나온다.
그야말로 신성스럽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본래 앳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던 마틴이 지금은 멀쑥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틴의 뒤에서 불쑥 머리가 하나 튀어나왔다.
“어. 다들 잘 있었어?”
바로 호진이었다.
그 뒤에선 바하토프도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족장님!”
이렌이 황제를 뒤에 두고 있는 것도 잊고서 호진을 향해 마구 손을 흔들었다.
“이, 이……!”
이상한 것은 황제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처음엔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가 곧 대경실색한 듯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도.
“아아…!”
돌연 왈칵 눈물을 터트리는 이들이 있었다. 거기다가 마틴을 향해 절까지 하기 시작했다.
호진은 다른 이들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슬슬 지겹잖아. 그만 끝내자고. 황제 새끼야.”
-거, 건방진. 아, 아니. 도대체 어떻게?
호진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마틴의 어깨를 툭 쳤다.
“마틴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가 갑자기 과장되게 두 손을 든다.
“아, 이젠… 황태자님이라고 해야 하나?”
“괜찮습니다. 편하게 부르세요.”
그 모든 소란의 중심에 선 마틴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마틴의 눈에는 후회, 회한, 분노. 등등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고대 마도 왕국 제펠.
적합한 왕위 계승자이며, 왕자의 위를 받은 자.
마틴이라는 이름보다 광휘의 사자라는 칭호로 더 자주 불렸던 남자.
마틴 3세.
그를 향해 부복하여 있는 이들은 마틴의 과거를 비로소 떠올렸기 때문이다.
마틴이 이제야 기억을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
황제는 눈물을 흘리며 부복하고 있는 자들을 향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익! 어딜 보고 있는 거냐! 황제는 나란 말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호진은 슬쩍 마틴의 귓가에 속삭였다.
“야, 저거 지금 겉모습만 요란하지 힘 다 빠졌거든? 할 수 있지?”
마틴은 호진의 말에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서 검을 치켜들었다.
황제는 그걸 보고는 마치 겁에 질린 듯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왕위를 계승 받겠습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