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한 줄기의 벼락이 내리쳤다.
위에서 아래로가 아닌, 나에게서부터 왕에게까지.
절대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꽈르릉-!
소리는 뒤늦게 울렸다. 무기를 휘두르며 싸우고 있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까맣게 변해 버린 옥좌 쪽으로.
끼아아아아아아아-!
캬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악!
하지만 무언가를 확인하기도 전에 다른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갑자기 사람들과 싸우던 어둑시니의 파편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 무기를 든 채로 그림자들을 노려봤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애초에 옥좌의 근처에는 그림자들이 아예 없었다.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왕은 소탈하고 평범한 노인네처럼 행동했다.
일부러.
자기는 아무런 능력이 없어 보이려는 것처럼 그리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잊힌 왕국. 그 옥좌에 앉아 있는 왕이 단순히 권력을 가진 노인네가 아니란 걸.
이 고대 마도 왕국의 왕좌에 앉아 있는 이가 마도사의 정점을 밟은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과거 게임에서 접했었으니까.
저 왕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고 있었으니까.
또한, 어둑시니의 정체.
-너.
-너. 너. 너.
까득. 까득. 까득.
모든 파편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가운데 오직 소년만이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시퍼런 귀화를 피어 올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다.
마물. 특이종.
“그슨대.”
녀석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애초에 녀석의 이름 자체도 함정이었다.
비슷한 놈들이긴 하지. 어둑시니. 그슨대. 하지만 엄연히 다른 존재이고, 심지어 그슨대는 실제로 과거 게임에서 위명 세를 떨쳤었다.
바하트리스 공국을 통째로 집어삼키면서.
“온전한 놈은 아니군. 분명 그슨대의 일부. 힘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하니 다른 놈들을 흡수해서 힘을 키운 건가?”
-이익.
어둑시니, 아니 그슨대가 나를 더 죽일 듯이 노려본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옥좌가 있던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서 노인 한 명이 막 몸을 일으키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알았지? 단순히 견제용으로 공격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최소한 절반. 아니, 그 이상을 쏟아부은 공격이야.”
분명히 아까 전 우리에게 말을 걸었던 목소리와 같은 목소리다.
하지만 느낌이 달랐다.
동네 촌부 같은 느낌은 온데간데없고, 시릴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권력을 위해, 영생을 위해 왕국을 통째로 제물로 바친 남자.
비정한 권력자이자 탐욕적인 왕.
“하여튼. 아쉽게 됐군. 그슨대는 더는 써먹을 수 없겠어.”
그는 슬쩍 재가 되어 버린 옥좌를 보더니 손가락을 탁 튕겼다.
후웅-
그러자 푸른빛이 반짝이더니 멀쩡한 모양의 옥좌가 생겨났다. 수인도 주문도 없이 마법을 부린 것이다.
본래 그는 일국의 왕보다 마도사로서 더 명성이 드높았다. 아니, 애초에 그는 본래 왕도 아니었다.
형제였던 왕을 죽이고 대신 왕좌를 차지했으니까.
-안, 안 돼.
내 앞에 있는 그슨대가 돌연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수고했다.”
왕이 그슨대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는다.
-안 돼에에에에에!
그리고 이어지는 비명.
놈의 몸이 한 올 한 올 풀려 나간다. 그것은 주변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던 파편들도 마찬가지.
그슨대였던 모든 것들이 왕의 손으로 빨려 들어간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구슬로.
투웅-
그림자들이 모두 빨려 들어가자 구슬이 살짝 빛났다.
구슬은 갈라지고 깨진 흔적이 역력했는데, 아까 전 왕이 뇌룡섬을 막는데 저 구슬을 썼기 때문이다.
아무리 왕이더라도 그냥 막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기세가 등등하군. 그슨대를 키우는데 남은 병력을 모두 쏟아부었을 텐데 무슨 자신감이지?”
“자신감이라.”
왕은 빙글거리며 웃었다.
“몇 년 전 누군가가 이 구슬을 주고 갔지. 유용할 거라면서. 그리고 며칠 전 침입자들이 왔다는 걸 들었다.”
어느새 우리의 호칭은 손님에서 침입자로 격하되어 있었다.
“본래는 별로 쓸 생각이 없었는데… 생각보다 꽤 하더군. 자네들 말이야.”
나는 왕이 말하는 도중 이렌에게 슬쩍 눈짓했다.
곧 이렌이 사람들을 한데로 모았다. 부상자들을 돌보고, 대열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
“그래서 생각이 바뀌었지. 손에 있는 패를 굳이 놀려 둘 이유는 없으니까.”
“악수를 뒀군. 변변찮은 방어 마법 하나 못 쓴 걸 보니 네놈의 힘도 상당수 나눠 준 것 같던데.”
그슨대는 막강한 마물이다.
특이종으로 분류됐지만, 일각에선 상급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명확한 약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왕의 손에 들려있는 핵이다.
핵을 부수기 전까지는 마치 불사신 같은 모습을 보이며 끊임없이 증식한다.
그렇다는 건 반대로 보면 핵만 부수면 죽일 수 있단 것과 같다.
‘본래는 그슨대의 몸체 내부에 있어야 할 텐데.’
그렇기에 그슨대에게 일정한 타격을 입혀 핵을 드러내기 전까진 죽이기 힘들었을 텐데.
왕은 그걸 자신이 들고 있었다.
“통제를 위해서 들고 있었겠군. 마법으로 놈을 지배하고 있었겠지? 그리고 그게 깨진 순간 쏟아붓고 있던 마력은 모조리 증발했을 테고.”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굴리는구나.”
“머리 굴리긴. 정곡 찔린 거 같은데.”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로 한껏 비아냥댔다.
마력을 대부분 소모한 마도사.
얕잡아 볼 수도 있다. 또한, 놈도 일부러 그렇게 보여 주고 있다.
도대체 머리를 얼마나 굴리는 건지.
내가 도발을 해도 웃으면서 받아넘기는 것도 계산된 행위.
마치 힘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손을 썼을 텐데, 지금 약해졌으니 봐준다. 같은 느낌을 풀풀 풍기면서도.
손에 들린 검은 구슬은 안 놓고 쥐고 있다.
나 또한 놈이 본색을 드러내길 기다리면서 천천히 기운을 회복하고 있다.
아까 전 뇌룡섬에 전력을 쏟아붓느라 힘이 많이 상실한 상태니까.
그냥 마음 편하게 치고받고 싸우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머리 굴릴 필요 없이.
하지만 그건 바란다고 되는 일이 아니지.
“그래서 언제까지 입만 털 거야?”
이제 움직일 때다.
“진(眞) 뇌룡 질주.”
쾅-!
공간이 압축된다.
바로 앞에 왕이 보인다. 창을 일점으로 내질렀다.
콰가가가가각-!
창날이 일렁거리는 막에 빗겨진다. 크게 흔들리긴 하지만 바로 깨질 기미는 없었다.
뇌룡 질주의 힘을 그대로 실은 일격이었는데.
“함부로 짖지 말게.”
왕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개새끼 같으니.”
그가 옥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쾅! 쾅! 쾅!
나는 계속해서 막을 내려찍었다. 하지만 왕이 손을 내민 순간. 막은 그대로 거대한 손의 형태로 바뀌더니 나를 내려찍었다.
꽈앙!
“크윽.”
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창대를 밀어 올렸다.
내 위에 있는 거대한 손이 나를 그대로 찍어 누르려는 것처럼 압박해 왔다.
“모두!”
나는 뒤로 몸을 빼며 뇌룡섬을 앞으로 쏘아 보냈다.
“공격!”
손은 다시 일렁이는 막 형태로 바뀌어 뇌룡섬을 흡수한다.
“인제 보니 개새끼도 아니라 개미 새끼들이군.”
왕이 마치 벌레를 쫓듯이 손을 휘젓는다.
키리리릭-
쿠르르르릉-
그러자 내 뒤에서 달려오던 이들의 앞 바닥이 쑥 꺼진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벽이 산산조각 나서 큐브의 형태가 되더니 사방을 위협적으로 날아다녔다.
“나는 왕이 아니다.”
놈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른다.
“나는, 아니 짐은.”
전조도 없이 갑자기 바닥이 갈라지며 나를 향해 양쪽에서 짓쳐든다.
이 공간 전체가 살아 숨 쉬는 무기가 되어 우리를 위협해 온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각-!
뇌룡 질주의 힘을 이용해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벽들을 쳐내었다.
본래 진행대로라면 3페이즈에 해당하는 방식이다.
어긋나고 뒤틀렸던 길이 비로소 본래의 궤도로 돌아온 것이다.
1페이즈. 수하들을 이용한 공격.
2페이즈. 마법을 통한 공격.
3페이즈…….
“짐은 황제이니라.”
공간 전체를 수족처럼 부리며 공격해오기.
이 왕궁 전체가 그의 영지이며, 권속이며, 그 자신이었다.
“황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니 밑에 아무도 없는데 혼자 황제라고 하면 그렇게 되냐?”
나는 급히 움직이면서도 비아냥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백성은 다시 만들면 된다.”
물론 황제는 여전히 정신병자 같은 대답을 들려줬다.
휘이이이익-!
황제가 기습적으로 자신의 뒤쪽 벽 전체를 송곳의 형태로 만들어 내게 쏘아 보냈다. 검은 기운까지 일렁이는 게 보통의 공격은 아니었다.
“바람이여!”
그때 이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휘이이잉-
내 전신에 초록빛의 기운이 맴돌았다. 정령의 기운이었다.
“스트랭스! 헤이스트! 쉴드!”
또한, 이어서 들리는 바하토프의 목소리.
전신에 힘이 차오르고 몸이 가벼워지며, 초록빛의 기운 위로 푸른색의 막이 한 겹 더 씌워졌다.
“이런 거 있으면 진작 쓰지.”
물론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는 건 알고 있다. 파편들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급박했을 테니.
나는 나에게 날아오는 송곳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송곳이 내 창과 맞부딪친다. 그리고 곧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깨져 나갔다.
예상보다 쉽게 막아 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거대한 송곳에 들러붙어 있던 기운이 일렁거리더니 내 몸 감싸든 것이다.
끈덕거리며 내 몸을 파고들려고 한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군.’
나는 떨쳐 내려 애썼지만. 기운은 쉽사리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고작해야 전력을 방출해 기운이 침식해 오는 걸 늦추는 정도.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생각했다.
‘써야 되나?’
슬쩍 황제를 봤다.
놈은 그슨대의 구슬을 꽉 쥐고 있었다.
핵에 타격을 입었으니 다시 소환하는 것은 불가. 그래서 놈은 대신 그 기운을 흡수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거다.
그 전력은 아마도…….
‘본래의 황제보다 더 강해.’
나는 한 번 더 전력을 방출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이렌과 엘 리, 엘 라의 도움을 받아서 버티고 있었다.
이렌이 사람들의 무게를 가볍게 하고, 엘 리와 엘 라가 그림자를 사용해서 그들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힘을 극한으로 발휘하고 있는지 셋 다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나는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리고 곧 그를 보았다.
‘아직이야.’
마틴. 그는 검을 들어 주변의 사람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 아직이다. 겨우 저 정도로는 안 된다.
‘해야겠어.’
결정했다. 더는 미룰 수 없다.
나는 힘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힘은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내 몸의 한곳으로 몰려들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껴 두고 있던 힘을 끌어내기 위해서.
곧 반응이 왔다.
둥-
두웅-!
마치 잠이 덜 깬 아이가 투정 부리는 것 같은 반응.
나는 그녀를 살살 달래며 말했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촤르르르르-
퍼져 나오는 전격은 그 전까지와 다르다. 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뇌조!”
내 외침과 함께 찬란한 빛의 새가 모습을 드러내며 날아올랐다.
키루루루루루-!
-아빠!
나는 활짝 웃었다.
“오랜만이야.”
촤르르-
내 몸에 끈덕지게 붙어 있던 기운들은 거칠게 튀어 오르는 전격에 천천히 사라진다.
나는 뇌룡 질주를 해제했다. 순간 몸이 바닥으로 훅 떨어지려고 했지만, 곧 엉덩이에 무언가가 닿았다.
키루루루-!
뇌조가 나를 태우고 위로 날아올랐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모습은 이전보다 약 서너 배는 커져 있었다.
다행히 너무 급하게 부르지 않았나 보다. 진화가 이미 끝난 거로 보였으니까.
“가자!”
-응!
그녀의 목소리도 전보다 훨씬 성숙해져 있었다.
이거 자식이 크면 어색하다더니. 언제 이렇게 컸는지도 모를 정도로 빨리 컸구나.
난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창을 들어 올렸다. 마치 랜스차징을 하는 기사처럼 황제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어느새 이 공간은 몇십 배는 넓어져 있었다. 왕궁을 이루던 벽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넓은 공동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뇌조의 속도 덕분에 놈에게 날아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타악-!
어느 정도 가까워진 후 나는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니가 무슨 황제냐!”
나는 창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뇌조가 나에게 다가와 날개로 감쌌다.
키릭- 키릭-
뇌령이 한 번 더 들썩인다. 마치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창하며 달아오른다.
키잉-!
몸 주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
[뇌령 – 오버클럭(Over clock)]
전신이 하얀빛에 둘러싸이며 메시지가 하나 더 떠오른다.
[전설급 특성 뢰신(雷)이 신화급 특성 뢰신일섬지체(雷身日閃肢體)로 격상합니다.]
전신에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힘이 차오른다.
나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는 황제를 향해 창을 내리찍었다.
“이 패륜 왕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