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다르다.
나는 확신했다.
모든 게 다르다.
“하하. 아들이 부끄러움이 많아서 인사를 안 하는군.”
옥좌에 앉아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저 왕.
다르다. 그는 본래 저런 소탈한 느낌이 아니었다.
수십의 기사와 마법사, 수백의 병사들을 거느린 채 오만하면서도 강렬한 기세를 내뿜고 있던 왕.
그게 본래 그의 모습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게임 속에서 봤었던 모습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
말하자면 이 보스는 대규모 레이드전이었으니까.
지원, 버프형 보스에 수백 단위의 부하를 상대하는 레이드.
그러나 양상이 아예 바뀌었다.
보이는 것은 저 왕과 소년 둘뿐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저 소년.
소년의 뒤로 늘어져 있는 그림자는 지금도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줄어들었다, 늘어났다를 반복한다.
그 형태도 일정치 않아서 어느 순간은 개의 머리 같았고, 또 호랑이의 머리 같았으며, 새의 날개를 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자연스레 아까 전 문에서 봤던 괴물이 생각났다.
키메라.
그리고 어둑시니.
두 이름이 하나로 이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그나저나 손님을 계속 세워 둘 수는 없지. 마침 우리 아들도 심심한 것 같은데.”
까드득-
소년의 입이 우물거리는 듯하더니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어둑시니. 녀석은 우리를 보며 이를 까득거리며 갈고 있었다.
까득. 까득. 까드득. 까득. 까득. 까드득. 까득.
“한번 여흥을 즐겨 보는 게 어떤가?”
왕은 웃으며 그리 말했지만, 우리는 그저 침묵으로 답을 했다.
터벅.
까득. 까득. 까드득.
소년이 처음으로 발을 떼었다.
한 발자국씩 계단을 내려온 놈은 우리를 빤히 보았다.
씨익. 녀석의 입이 위로 말려 올라간다.
-놀자.
동시에 커다란 대실 안이 왕왕 울려 댔다.
소년. 즉, 어둑시니의 목소리다.
-노올자.
어둑시니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리고 놈의 몸도 점점 커다래졌다.
“주문 외워! 모두 방어 태세! 이렌 보호막!”
나는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순식간에 놈의 몸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커졌다.
후웅-!
소년이 양팔을 들어 올린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몸을 훌쩍 뛰었다.
‘뇌룡 질주!’
콰르르르릉-!
몸이 한 줄기 빛이 되어 놈을 향해 쏘아진다.
후우우우우웅-!
어둑시니가 팔을 아래로 휘둘러 온다.
꽈아아아앙-!
창과 놈의 팔이 맞부딪쳤다.
‘어?’
다음 순간 나는 눈을 깜빡였다.
꽈아아아아아앙-!
뒤늦게 귀에 폭음이 들리더니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울렸다.
통증이 느껴진다.
등에서부터 시작한 통증이 허리와 머리, 목, 다리 전신을 격렬하게 뒤흔든다.
“끄, 으윽?”
나는 몸을 부들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뒤늦게 내가 밀려 날아갔었다는 걸 깨달았다.
“커헉.”
입에서 피가 한 움큼 튀어나온다.
-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
-너무 약해.
어둑시니는 웃으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힘에서 일방적으로 밀린 건 아니었다.
창을 내지르는 순간 녀석의 팔에 내 몸통보다 큰 구멍이 생겨 내 창은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그다음 그 구멍에서 팔 수십 개가 생겨나서는 나를 잡아 벽에다가 날려 버린 거다.
기괴한 방식이었고, 전혀 예상 못 한 공격이었다.
“이 개새끼가.”
나는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그 와중에도 녀석은 이어서 공격을 하지 않고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명백하게 나를 얕잡아 보고, 내려다보는 기색이었다.
“សត. ការឃាំ ង ។!”
콰드드드드득-!
핀이 주문을 외웠다. 식물들이 땅을 뚫고 어둑시니를 중심으로 급격히 생장한다.
어둑시니가 핀이 있는 곳을 본다.
놈의 팔이 길게 늘어진다.
콰르르르릉-!
나는 기운을 몸으로 되돌리고.
목덜미 쪽에 기운을 집중한다.
[뇌룡의 숨결이 활성화됩니다.]
목덜미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온다. 나는 한 번 더 집중했다.
몸 안에 있는 뇌령을 자극한다.
키릭-
[뇌령 각성]
[일시적으로 뇌령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뢰신이 한층 강화됩니다]
준비가 끝났다.
훌쩍 몸을 띄웠다.
어둑시니의 팔이 순식간에 채찍처럼 대열의 한복판을 노리고 달려든다.
나는 창을 던졌다.
콰드드드드드득-!
뇌룡창이 어둑시니의 팔을 살라 먹으며 아예 옆으로 크게 튕겨 내었다.
-끄아아아악!
어둑시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나는 뇌룡 질주를 연속으로 사용하며 창을 따라가 잡아챘다.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주길 거야. 즈길 거야. 지길. 직, 지직.
어둑시니의 음성이 갈라지고 찢기며 기괴한 소리로 변한다.
녀석의 모습을 확인하니 그 변화가 음성보다 훨씬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아까 전 문에서 확인했던 그 모습이다.
몸통에서 수십, 수백 개의 머리가 튀어나오고, 그뿐만 아니라 팔과 다리 또한 수백 쌍이 생겨났다.
-살려 줘. 살려 주세요. 살, 살려…….
-죽여 줘! 날 죽여! 죽여 줘어어어어어어어어어!
-꺄아아아아악!
-키르르르르르를.
-케아아아아!
수백 개의 머리가 각각 다른 말을 한다.
비통한 비명을 내지르며 끊임없이 뭐라고 소리친다.
문에서 봤던 것처럼 짐승의 머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개중에는 인간의 머리 또한 상당히 많았다.
“역겨워…….”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심정을 대변했다.
말 그대로 역겨운 존재였다.
저건 고작 키메라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나는 문득 떠올렸다.
과거의 기억 한 조각을.
쿠웅-!
놈이 발을 굴렀다.
콰득- 콰직-
그와 동시에 녀석의 발 부분에서 뻗어 나와 있던 팔이나 다리, 머리 등이 으깨진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녀석에게로 몸을 날렸다.
“하아압!”
전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녀석의 몸통에 전격을 쏟아붓는다.
전격이 녀석의 거대한 몸을 살라 먹으며 끝도 없이 퍼져 나간다.
하지만 그래 봤자.
순식간에 머리나 팔, 다리 등이 또 그 빈자리를 뚫고 나온다.
-그에에에에에-!
“모두 공격! 공격해!”
나는 끝없이 녀석의 머리통, 아니 머리통이 있던 부위에 창을 내질렀다.
바닥에선 이렌이 사람들을 이끌고 녀석의 몸통에 달려든다.
크어어엉-!
녀석의 몸 한쪽이 길게 늘어지더니 나를 향해 날아온다.
그것은 호랑이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창을 휘두르니 녀석의 몸이 쭉 반으로 갈라졌다.
-으아아아아악!
-죽어어!
하지만 반으로 갈라진 몸은 다시 형태를 바꾸며, 각각 여자와 기사의 모습으로 바뀐다.
콰드드득-!
기사가 온몸을 날려 내가 검을 휘둘렀다.
창으로 막으니 금속성이 아니라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악!
기사의 머리통을 날리는 순간 여자가 내 몸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내 몸에 그녀의 몸이 닿는 순간 끈적한 액체의 형태로 바뀌더니 이내 굵은 동아줄처럼 바뀌었다.
-키야아아아아!
꽈드드득-!
“끄읍!”
뱀. 뱀이다.
내 몸을 그대로 으스러트리려는지 나를 콱 조이며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전격 방출!”
꽈아아아아앙-!
나는 전격을 사방으로 방출했다. 뱀은 그대로 터져 나가며 사라져 버렸다.
난장판이다.
어둑시니는 끊임없이 형태를 바꿔 가며 나와 사람들을 동시에 공격했다.
하지만 모두 상대하는 데 난색을 보였다.
스으으으으으으-!
그나마 침착하게 상대하는 건 이렌과 엘 리, 엘 라 셋뿐.
이렌은 한쪽을 점하고서 나와 마찬가지로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고, 엘 리와 엘 라는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그림자를 다루고 있었다.
스야아아아아-!
수십의 그림자가 어둑시니의 몸에 달라붙었다.
조금씩 굼떠지는 몸을 보면 분명히 유의미한 성과를 내는 거로 보였다.
놈의 몸이 수십 갈래로 갈라지기 전까지는.
꽈드드득- 꽈직. 콰득.
어둑시니의 몸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삼분지 이 정도는 다시 형체를 갖춘다.
모두 다 다른 모습이다.
녀석들은 다시 사람들을 향해 뛰어갔다.
큰 형태를 하고 있으면 효율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모습을 바꾼 듯했다.
문제는…….
반 정도는 바로 사람들에게 달려들지 않고 벽이나 바닥에 녹아들었다는 점.
“으아아아악!”
곧 갑자기 벽을 뚫고 튀어나온 공격에 당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까득. 까득. 까드득.
하지만 나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나머지 삼분지 일은 하나로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뭉쳤다.
-안녕?
획 눈앞으로 대가리가 나타났다.
난 반사적으로 창을 찔렀다.
휘이익-
녀석의 몸이 그림자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뭉쳐서 나를 향해 쏘아져 온다.
범의 아가리가 나타난다.
콰득!
창을 휘둘러 깨부수니 액체들이 하나하나 거미로 바뀌어 내 몸에 다다닥 달라붙는다.
촤르르륵-!
전격을 내뿜으며 거미를 녹이니 이번엔 팔 여섯 개가 각각 검, 창, 도끼 등을 휘둘러 온다.
“으아아아아아아!”
나는 창을 풍차처럼 휘두르다가 훅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쇼크웨이브!’
내가 있던 곳을 중심으로 전격이 방사형으로 퍼져 나간다.
키이이이이익-!
사람들이 상대하던 괴물들이 몸을 바르르 떤다.
끼이익!
또한. 벽을 넘나들며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던 괴물들도 내 전격에 반응하는 걸 확인했다.
까득-
콰앙-!
소리가 들리는 순간 바로 몸을 돌리며 창을 내질렀다.
그런데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채로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까득- 까득, 까득.
창날이 놈의 이빨에 물려 있었다. 녀석은 씨익 웃으며 내 창날 물고 있었다.
난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창끝으로 기운을 쏘아내었다.
“이거나 쳐 먹어!”
‘뇌룡섬!’
부지불식간에 창끝에서 거대한 기운의 폭풍이 쏘아진다.
녀석도 이건 예상 못 했는지 피하지 않고 그대로 얻어맞았다.
순식간에 놈의 몸이 흩어진다.
후우우우웅-!
나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리고 이채를 띠는 것보다 빠르게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과거의 기억.
거의 잊혀졌던 그 기억이 갑작스레 수면 위로 올라왔다.
기억해 내야 한다.
확실하게 기억해 내야 한다.
나는 놈을 알고 있다.
샤아아아아-!
고개를 드니 흩어졌던 놈의 몸 주위로 그림자들이 빠르게 흡수되고 있었다.
사람들을 상대하던 그림자들 일부를 회수한 것이다.
즉, 녀석의 회복도 무한한 게 아니었다.
나는 뭉치고 있는 그림자를 향해 계속해서 창을 휘둘렀다.
그림자들이 쉽사리 뭉치지 않고 흩어졌다가 뭉치기를 반복한다.
-이익.
까득.
소년의 분노에 찬 음성이 들리고.
-방해하지 마!
갑자기 내 주변에 있던 그림자들이 주먹의 형태로 변하더니 나를 향해 날아온다.
꽈득.
왼발을 앞으로 뻗고, 허리를 반 자퀴 회전시키며 그대로 앞으로 창을 내찔렀다.
꽈앙-!
그러고서도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굉장한 힘이다.
뇌령 각성을 한 상태인데도 이 정도의 힘인 건.
‘녀석의 힘은 다 흩어진 게 아니야.’
그렇기에 나는 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저렇게 몸이 흩어져 있으면 아까 전보다 힘이 약해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별 변화가 없다는 건?
-죽어!
어느새 다시 소년의 형태를 빚은 놈이 나를 향해 날아든다.
갖가지 기상천외한 공격을 막고, 튕겨 내며 나는 아까 전 했던 생각을 이어 갔다.
애초에 놈의 본체라는 게 있나?
그러고 보면 난 놈의 본체를 무의식적으로 확정 짓고 있었다.
처음엔 소년.
그다음은 거대한 형태.
다시 눈앞의 소년.
하지만 과연 그럴까?
크라라라라-!
드레이크의 형태를 한 그림자가 내게 날아든다. 몸을 작게 낮췄다가 그대로 위로 창을 찌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 와중에도 사람들은 계속 당하고 있다. 이대로 있으면 점점 불리해지는 건 순식간.
생각했다.
기억. 그 속에서 봤던 것들을. 이건 절대 처음 겪은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놈의 정체를. 저 그림자. 어둠. 그 집합체의 정체를.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을.
나는 슬쩍 한쪽을 보았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우선…….
‘용안.’
[지룡의 용안이 발동됩니다.]
왼쪽 눈이 스르르 감겼다가 떠진다. 한순간 달라진 시야가 달라졌다.
나는 슬쩍 한곳을 바라본 후 행동을 개시했다.
“이 개자식아아아!”
내 몸을 중심으로 전격이 반구 형태를 이루며 퍼져 나간다.
난 일부러 분노한 티를 팍팍 냈다.
꽈드득-
이를 악물며 광전사를 발동시켰다. 뜨거운 숨이 입을 통해서 빠져나왔다.
혈관이 투둑 튀어나오고, 온몸의 근육이 달아오른다.
“으아아아아!”
뇌룡 질주를 전력으로 쏟아 내며 소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소년이 형태를 흩트리며 사방으로 퍼진다.
예상했다.
이제는 제법 선명해진 기억 속에서 떠올린 공략법이 있었다.
나는 그대로 놈을 지나쳤다가, 다시 소년이 있던 방향을 보며 창을 치켜들었다.
“진(眞)!”
꽈르르르르르릉-!
뇌령을 한계까지 혹사한다.
기운이 내 주변 몇 미터를 휩쓸며 퍼져 나갔다가 다시 한 점으로 강하게 압축된다.
창극에 맺힌 한 방울의 기운.
창을 허리가 꺾일 정도로 뒤로 당긴다.
소년이 몸을 사방으로 흩트렸다가 갖은 형태를 만들더니 수십 방향으로 내게 쏘아져 온다.
심상치 않아 보이니 조금쯤은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나는 창을 천천히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창극이 슬쩍 오른쪽을 향했다.
정확히 옥좌가 있는 방향으로
“뇌룡섬(雷龍閃)!”
모든 부정한 것을 살라 먹는 벼락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