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곧이어 문이 스르르 열렸다.
마치 범의 아가리 속을 보는 기분이다.
주술이나 마법적인 처리를 하는 건지, 광원이 충분한데도 문의 내부는 까만 어둠으로 보였다.
나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생각했다.
방금 본 키메라.
심상치 않은 기세와 외형이었다.
어쩌면 중간 보스도 저놈이 죽인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왜?”
그럴 필요가 있나?
아까 전 일로 키메라가 왕의 통제를 받는 게 확실히 드러났다.
그러면 굳이 마법사를 비롯한 기사들을 죽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놈들도 모두 왕의 전력일 텐데.
이대로면 보스전 양상이 바뀌리라는 건 당연지사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모두 주목.”
“예.”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기가 눌린 듯해 보이는 사람도 많고.
나는 상점 창을 열어서 몇 가지를 구입한 다음 바로 사용했다.
[용기의 오오라를 사용합니다]
[회복의 오오라를 사용합니다]
[활력 증진의 오오라를 사용합니다]
그들의 몸 주위로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의 오오라가 생겨났다.
그러자 약간 겁에 질려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나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왕궁에 진입한다.”
문의 안쪽.
그곳에는 왕궁이 있다. 왕의 안마당이자, 이 타락한 왕국의 중심.
“위험하지 않은 거라는 말은 안 하겠다.”
충분히 준비했다고 생각하지만, 변수가 너무 많다. 분명히 예상 못 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위험할 거다. 죽을 수도 있고. 팔다리 하나가 날아갈 수도 있지. 반면.”
나는 사람들을 쭉 보았다.
“얻을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이 더러운 왕국을 무너트리는 것. 비로소 자유를 얻는 것.”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 망설이는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 특히 보스의 능력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니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말하라. 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도 되니까. 안으로 들어가는 건 확신을 가진 사람뿐이다.”
지금까진 계속해서 몰아붙이며 틈을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풀어 줄 때다.
애초에 최대한 사람을 많이 남기려고 했던 이유도, 그래야 한 명이라도 더 데리고 보스룸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같이 가겠습니다.”
마틴은 굳은 표정으로 바로 앞으로 나왔다.
이어서 약 스물에서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앞으로 나섰다.
‘이 정도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인원에서 지원자가 나왔다.
한참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었다.
“어차피 늙은 몸인데 남아 있어 무엇 하겠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실패한다면 저희도 무사하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겠지.”
맞는 말이다.
만약 실패한다면 왕이 이들을 가만히 둘 리 없으니까.
“저도,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저도요.”
그런데 그 말이 기폭제가 된 듯 사람들은 자청해서 앞으로 나섰다.
망설이던 이들도 어차피 뒤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전원 자청해서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들을 천천히 훑어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들어간다.”
등을 돌렸다.
구태여 잘했다고 칭찬해 줄 생각은 없었다.
축하는 모든 게 끝난 후에 해도 되니까.
“가자!”
우리는 대열을 갖춘 후 바로 문의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내가 문을 지나는 순간 기묘한 감각이 몸에 퍼져 나갔다.
마치 깊고 질척한 늪에 들어온 것만 같다. 또한, 주변은 완전히 캄캄한 어둠에 싸여 있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파앗-!
하지만 몇 걸음을 더 걸어가자 눈앞이 대번에 환해지며 몸이 가벼워졌다.
나는 바로 주변을 훑었다.
화려하게 생긴 복도였다. 벽에 쭉 등불이 걸려 있다.
뒤돌아보니 문은 온데간데없고, 캄캄한 어둠이 가득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일종의 공간 마법과 비슷해 보였다.
과거 게임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생각해 보면 이 왕국은 마법이 고도로 발전된 곳이었다.
이와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두 번째, 세 번째 문을 통과할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던전 내에서 통로를 따라서 쭉 일직선으로 걸어간 것뿐이지만, 실제로는 각각의 구역은 일직선 구조가 아닐 거다.
‘일부러 반발을 억누르고 통치를 수월하게 하려고 왕국 전체에 강력한 공간 마법을 설치했다고 했었지.’
이 왕궁이 가장 마지막에 있긴 하지만, 아마 지리상으로 보면 가장 중심에 있을 거다.
“전원 진입했다.”
곧 엘라가 뒤에서 걸어 나와 내게 말했다.
“그래. 이동하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발을 떼었다. 이번엔 마틴을 앞세우지 않고 대열의 중간쯤에 세워 두었다.
복도는 쥐죽은 듯 조용하다.
어쩐지 기묘한 기운이 감도는 공간이다.
피부가 간질간질한 느낌.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한동안 적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긴장감을 늦추진 않았다.
아까 전의 키메라가 갑자기 벽을 뚫고 튀어나올 수도 있고, 왕이 수작질을 부릴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왕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온 상태나 마찬가지다.
탁탁탁-!
쩔그렁-
곧 기척이 들려왔다.
내가 손을 들자 모두 알아서 무기를 치켜세웠다.
대열의 양옆은 앞이 아니라 옆을 보고 있게 했다.
특히 강력한 주술을 사용하는 어린아이는 마틴의 바로 옆에 있게 시켰다.
아까 전 키메라를 상대할 때 아이는 보호를 받지 못한 탓에 대단위 주술을 전혀 사용하지 못했었다.
강력한 전력인 만큼 이젠 철저한 보호 아래 주술을 사용할 거다.
“으아아아아아!”
그러나 나타난 것은 키메라가 아니었다.
피부가 회색빛인 석인 기사들.
약 육칠십은 되는 기사들이었다.
아까 전 미로에 배치되어 있었을 기사들의 수를 생각하면, 저들이 왕국의 남은 기사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왕을 위하여!”
“위하여!”
놈들은 전에 만났던 이들과 달리 가타부타 검을 들고 덤벼들었다.
“바하토프! 핀!”
핀은 주술을 사용하는 아이의 이름이다.
내가 소리치자 둘은 바로 무언가를 외기 시작했다.
먼저 주문을 끝낸 건 바하토프.
“그리스!”
그가 앞으로 확 손을 뻗었다.
“크으윽!”
콰앙!
기사들 몇 명이 나동그라졌다. 그런데 그다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직!
우직!
뒤에 있던 기사들이 쓰러진 기사들을 그대로 밟고 달려든 것이다.
우연히 그런 게 아니라 분명히 그리스를 피하고자 일부러 밟고 지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저렇게까지 할 놈들이 아닌데?’
석인이 됐다지만, 저놈들 정도 되면 인간일 때의 지능과 감정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맨날 입으로 기사의 명예니 뭐니 나불거리고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 동료들을 밟아 버리면서까지 덤비다니.
‘뭔가 이상한데.’
나는 더욱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목이 터지라 소리치면서 달려드는 걸 보고 바로 못 알아챈 건데…….
놈들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흥분보다는 겁에 질린 것같이 보였다.
“하아압!”
그러나 길게 생각을 이어 갈 틈은 없었다.
금세 거리를 좁힌 기사 하나가 내게 검을 내려찍었다.
카가각-!
나는 검의 중간 지점을 창으로 찍어 각도를 비틀었다.
녀석의 검이 그대로 왼쪽 아래로 꺾인다.
창대를 회전시켜 녀석의 목을 가격하고, 비틀거리는 놈의 다리를 걷어찼다.
콰앙!
기사의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처박힌다. 바닥을 짚으며 일어나려는 놈의 손을 창날로 내리찍은 후, 발뒤꿈치로 머리를 강하게 찍었다.
콰득!
파스스스-
놈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이어서 뒤쪽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សត. ការឃាំ ង ។!”
고대의 주술 언어.
그 소리와 함께 뒤이어 달려오는 기사들의 근처에 초록빛의 기운이 터져 나왔다.
콰드드드득-!
순식간에 식물들이 생장하며 기사들의 몸을 감싼다.
이전의 놈들보다 수준이 높은 기사들인지 몸을 빼는 이들도 꽤 많긴 했지만, 그래도 유효한 공격이었다.
“바하토프! 너도 달려들어!”
“네, 네!”
이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이렌, 바하토프와 함께 기사들의 대열 한복판으로 뛰어올랐다.
왕궁에 진입한 이상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최대한 속전속결로 깨부수며 앞으로 나간다. 그게 전력을 조금이라도 더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다.
“파멸의 염화!”
바하토프는 파멸의 손길의 다음 단계인 마법을 시전한다.
손을 넘어서 녀석의 몸 전체에 검붉은색의 불길이 퍼져 나온다.
녀석은 그 상태로 기사들에게 정신없이 덤벼들었다.
기사들은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나도 미친 듯이 날뛰며 기사들의 머리를 터트리고, 더는 근처에 적이 없을 때에야 멈춰 섰다.
“후우.”
숨을 작게 고르고 뒤를 보았다.
남은 기사는 이제 겨우 둘.
그중에도 한 명은 바로 이렌에 의해 가루가 되었다.
“잠깐!”
나는 나머지 한 마리도 처리하려는 걸 잠깐 막아섰다.
바로 놈에게 달려들어 무력화시킨 후 녀석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싸우고 있었기 때문인지 녀석의 회색빛 얼굴에도 전투의 흥분이라는 게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난 녀석의 눈에 주목했다.
눈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공포의 기운에.
“말해.”
“뭐, 뭘 말이냐.”
나는 놈의 한쪽 발을 내려찍었다. 발이 그대로 산산조각 난다.
“반말하진 말고.”
녀석은 몸을 수그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끄, 끄아아아아악!”
“너희들은 왜 겁을 먹은 거지? 왕 때문에? 고작 그 정도로?”
“흐, 흐으으.”
나는 다시 한 번 발을 들어 놈의 팔 한쪽을 부숴 버렸다.
보통 상태의 기사라면 고작 이런 정도로 털어놓을 리 없지만.
나는 녀석이 제정신이 아닐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곧 그 결과가 나왔다.
“괴물. 괴물이…….”
“괴물?”
“어, 어둑시니가 온다. 놈이 올 거야. 우린 다 죽을 거야.”
어둑시니.
나는 그 단어에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재차 물어보려는데 갑자기 기사는 눈을 부릅뜨더니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파각-!
그와 함께 놈의 몸에서 검은색의 연기가 빠져나왔다.
“조, 족장님!”
바로 앞의 기사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죽어서 남은 기사들의 돌가루. 그것에서도 검은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휘이이잉-!
이내 돌풍이 불더니 연기가 한 방향을 향해서 휙 날아갔다.
아까 전 기사들이 달려왔던 방향이다
‘어둑시니.’
나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상대로 앞을 보았다.
익숙한 이름이다.
전작에서 접했던 놈은 아니다. 다만 놈의 이름을 한국의 신화에서 접한 적이 있을 뿐.
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면 점점 커지고, 계속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더 커지다가 마지막에는 사람이 깔려 버릴 정도로 커진다는 괴물.
하지만 그게 키메라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놈의 모습은 한국민담 속의 그 요괴와 전혀 달랐다.
“다시 전진한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전진을 지시했다.
어느새 하나둘씩 쌓인 변수들은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다.
이래선 과거의 공략 정보고 뭐고 무의미하다.
애초에 공략 대상이 달라졌으니까.
우리는 복도를 걸었고, 더 이상의 습격은 없었다.
잠시 후 우리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전신에 전격을 끌어올린 상태로 망설임 없이 문을 밀어 재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넓은 대전이 나타났다.
시선을 위로 올리니 누군가가 보였다.
대전의 정중앙의 옥좌. 그곳에 앉아 있는 한 노인.
온몸이 회색빛이었지만, 그의 눈은 특히 하얘 보였다.
눈이 먼 것이다.
“환영하네.”
노인은 고개를 아래로 내리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일국의 왕. 이 왕국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 영생을 꿈꾸며 저주받은 주술을 펼친 남자.
하지만.
“오랜만에 손님들이 많이 와서 기쁘군. 한동안 손님이 전혀 없어서 말이야. 좀 적적했거든.”
어쩐지 왕에게선 강렬한 기세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소탈한 말투와 행동 때문에 왕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촌부처럼 보였다.
“아, 이거 기쁜 마음에 깜빡할 뻔했군.”
노인은 혼자서 뭐라뭐라 중얼거리더니 손뼉을 딱 쳤다.
그리고 그의 손뼉과 함께 대전을 밝게 비추고 있던 등불들이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웅-
키키킥-!
카르르.
이상한 소음. 벽을 휘젓는 검은색의 그림자들.
모두 심상치 않은 기색에 무기를 들고서 주변을 경계했다.
그림자는 벽을 빠른 속도로 맴돌더니 곧 왕의 옆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림자는 하나의 형태를 갖추었는데.
마치 그 모습이 그림자 요정들이 평소 사용하는 위장법과도 비슷해 보였다.
엘 리와 엘 라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굳어 있었다.
“자. 소개를 해 주겠네.”
왕은 활짝 웃으며 거의 형체를 갖춘 그림자를 가리켰다.
“나의 아들. 어둑시니일세.”
나는 소년을 보았고.
이윽고 시선을 위로 올려 소년의 뒤를 보았다.
그의 그림자.
천변만화하는 그 그림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