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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79화 (79/170)
  • 79화

    “이곳에서 나가고 싶지 않으…….”

    “맞네.”

    “예?”

    말이 끝내기도 전에 돌아온 대답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엘 루는 장난기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로 다시 말했다.

    “나가고 싶네. 바깥으로.”

    “아… 그렇군요.”

    나는 멍하니 대답하면서도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본래 이 던전에서 노렸던 건 광렙과 득템이다.

    이곳이 첫 번째 휴식처인 만큼 그림자 요정 족과 우호 관계를 쌓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쉬울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과거 게임을 했었을 때.

    -우리는 당신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대가 정당한 거래를 하러 왔으니 응했을 뿐. 딱 거기까지입니다. 이틀간의 체류 허가. 그 이후에는 다시 나가 주십시오.

    어떻게 다가갈 방법이 없었으니까.

    귀한 아이템을 주려 해도 받지 않는다. 도울 일이 없냐고 해도 없다 한다.

    아예 관계를 맺지 않으려 배척하는 태도. 딱 거기까지인 관계였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뭘 하기도 전에 현재 이곳의 그림자 요정들을 이끄는 엘 루를 만났고, 그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것 때문에 일말의 희망을 품었던 건 사실.

    “이미 명월이 떠오른 이상 이곳에 박혀 있는 것도 무의미하지. 그들이 활동을 시작했다는 얘기니까.”

    하지만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이야.

    나는 천천히 이어지는 엘 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라면……?”

    “어둠.”

    엘 루는 저번처럼 그림자를 끌어모아 각가지 형상들을 만들어 냈다.

    바로 마물들이었다.

    “마물, 마수라고도 하지.”

    “마물들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 아닙니까?”

    “물론 그랬지. 하지만 그들은 명확한 목적이 없었어. 그렇지 않나?”

    나는 그의 말에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마물들은 인간에게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활동하긴 하지만, 무리 지어 활동하는 일은 없었다.

    첫 명월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그랬었죠.”

    “그래. 하지만 이제는 다를 걸세. 그들은 이제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일 걸세.”

    첫 명월 이후.

    많은 게 바뀌었었다.

    ‘더 리얼’에 메인 시나리오라고 할 만한 게 시작됐었으니까. 어디까지나 유저들 사이에서 통용될 뿐, 게임사에서 정식으로 발표한 건 아니었지만.

    ‘마물들의 집단화. 전선의 확대.’

    자신의 서식지 내에서 어슬렁거리던 놈들이 군세를 이뤄 곳곳을 타격한다.

    그것의 전조가 바로 명월.

    명월이 진 후에는 한동안 잠잠해지긴 하지만, 놈들은 그 전처럼 다시 흩어지지도 않았다.

    특히 동부전선은 끝없이 확대되어 바하트리스 공국의 1/3선까지 물러나야 했다.

    “그렇다면 이곳이 더 안전한 것 아닙니까?”

    난 떠름한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단순하게 그들의 힘을 원하는 거라면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는 얘기였다.

    이미 그들은 나를 따라오겠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단순히 힘을 빌리려는 게 아니다. 원하는 건 완전히 우리의 편으로 만드는 것.

    그렇기 위해선 상대의 진의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안전이라. 그렇긴 하겠지.”

    엘 루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건 고작 우리 일족의 보신(保身)이 아닐세.”

    “그럼…….”

    “짓궂군. 자네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나는 그의 말에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 이어질지 짐작이 갔으니까.

    “우리의 잊힌 아버지를 찾는 것. 지상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을 돕는 것.”

    “형제… 군요.”

    잊힌 신의 사제들.

    그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들에게 합류할 생각입니까?”

    “아니네.”

    내 질문에 엘 루는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비록 같은 형제이긴 하나, 그들에게는 그들의 역할과 방법이 있을 터. 인제 와서 억지로 합치려 해 봤자 혼란만 불러올 뿐이네.”

    “그렇다는 말은?”

    “자네도 이곳에 대해 알고 온 것이겠지?”

    이번엔 질문에 질문이 돌아왔다.

    “조금은요.”

    “잊힌 신의 유적을 따라 우리는 이곳으로 이주했지. 그러나 다시 나가려 했을 때 문제가 생겼다네.”

    “왕 때문이군요.”

    “그렇네.”

    나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엘 루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자네가 이곳에서 목표한 바를 이룬다면 우리도 자연스레 바깥으로 나갈 방법이 생길 것이네.”

    그는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세계수가 지상으로 뻗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세계수라.

    크기나 생김새가 평범하진 않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우리도 세계수를 중심으로 움직일 수 있겠지. 내가 알기론 이곳 지면 근처엔 별다른 도시가 없는 것 같던데.”

    나는 턱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완전히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지만, 목표에 대해 한 번 더 환기할 정도는 되었다. 결국, 지금 필요한 건 하나였으니까.

    최대한 빨리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게.”

    나는 최대한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무임승차 하시진 않을 거죠?”

    * * *

    -멈춰!

    앞장서서 걷고 있던 사람이 손을 들어 수신호를 보낸다.

    나는 멈춰 서서 가만히 앞을 보았다.

    그녀는 왼쪽과 오른쪽을 차례로 살피더니 곧 왼쪽을 가리켰다.

    나는, 아니 우리는 다시 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커다란 공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말하셔도 됩니다.”

    여자는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곧 뒤돌아서 나에게 말했다.

    “후우. 이것도 꽤 빡세네요.”

    “여기까지 도착했으니 이제 추격은 없을 겁니다. 편히 쉬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앞장서서 걷고 있던 여자는 바로 엘 리.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리의 가장 뒤에서 따라오던 남자도 나에게 다가왔다.

    “총원 250명. 모두 확인했다.”

    그는 바로 엘 라.

    엘 리와 함께 우리 일행에 합류한 요정이었다.

    나는 며칠 전 엘 루의 말을 떠올렸다.

    ‘무임승차라.’

    ‘우리를 도와줄 사람인데 그럴 수야 없지.’

    ‘수색과 정찰에 능한 이 한 명과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 한 명. 총 두 명을 붙여 주겠네.’

    ‘혹시 부족한가?’

    엘 루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아니오’였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바로 4단계의 초입.

    2, 3단계를 거쳐 가면서 억류돼 있었던 사람들을 200명 넘게 발견했으며, 그러면서도 한 명의 인원 손실도 발견하지 않았다.

    엘 리와 엘 라의 능력이 그만큼 출중했기 때문이다.

    만약 바하토프와 이렌,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진행을 했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특히 예상했던 기간을 절반이나 단축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하면서 말이다.

    통과는 할 수 있었겠지만, 분명히 피해가 발생했을 거다.

    뭐, 이제는 슬슬 그럴 걱정도 없지만.

    나는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엘 리를 향해 물었다.

    “그러면 이제 완전히 4단계로 넘어온 건가?”

    “예. 이 공터를 빠져나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이 나올 겁니다.”

    “그렇군.”

    나는 창과 단출한 갑옷 등을 걸친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모두 다 이곳에서 구출한 사람들이지만, 조금씩 차이점들이 있었다.

    특히 가장 앞에 서 있는 약 스무 명의 사람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교해 여유가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손에 든 무기도 제각각이었다.

    창, 검, 활, 지팡이 등등. 마치 용병 같은 모습이다.

    저들이 바로 첫 도시인 바하렌에서 데려온 이들이었다.

    아예 초반부터 합류했기에 자연스레 전투를 겪을 일도 많았고, 자연스레 그 기세도 처음과는 달라졌다.

    꽤 흉흉한 모습이다.

    나는 그들을 보며 턱을 삐뚜름히 기울였다.

    ‘솔직히 사기지.’

    나는 픽 웃었다.

    그래. 처음부터 합류하긴 했다.

    하지만 저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고작 며칠 만에 변화한 모습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다.

    무엇보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저 아이.

    손에는 자신의 몸만큼이나 커다란 대검이 들려 있다.

    ‘이런 건 없습니까?’

    3번째 구역에 막 진입했을 때 내게 와서 요청했던 모양의 검이었다.

    그 검을 들고 석인 병사들을 말 그대로 부숴 버리던 모습이란.

    소년 마틴.

    그가 바로 변화의 핵이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다 되찾을 때면 마틴은, 저들은 어떻게 변화할까.

    “후우. 다들 일어납시다.”

    나는 잘은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4번째 구역에 진입한 순간부터 케륵이나 크룩 등과 연락을 할 수 있는 구슬이 말을 안 듣는다.

    이제 바깥의 상황을 확인할 수 없으며, 점점 더 왕국의 심처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엘 리. 안내해 주세요.”

    병장기들을 챙기며 일어나는 이들을 보다가 엘 리에게 말했다.

    “미로로.”

    4번째 구역의 본 스테이지로 진입할 시간이다.

    공터를 빠져나와 다시 입을 꾹 다물고 이동하다 보니 곧 주변 통로의 재질이 바뀌기 시작했다.

    “미로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그렇군요.”

    마지막 스테이지로 향하는 통로이면서, 동시에 이 미로 자체가 하나의 문이다.

    나는 바로 마틴을 불렀다.

    “길이 보여?”

    마틴은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눈을 감고 있었다.

    “으음. 네. 그런데 다 보이는 건 아니에요. 뭔가 희미하게 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눈을 떴다.

    “우선 보인 곳까지 안내할게요.”

    “그래.”

    엘 리는 마틴의 뒤에 붙어서 주변 탐색에만 집중했다.

    그녀가 잠시 집중하는 듯하더니 주변에 그림자가 몰려들었다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림자 요정은 그 이름값을 하듯 ‘그림자’들을 다룰 수 있다.

    듣기로는 마법보다는 정령술에 더 가깝다고 하더라.

    궁금해서 물어보니 엘 리가 장황하게 설명해 주긴 했지만, 결론은 ‘일족이 아니면 배우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였다.

    아직 내가 가진 힘조차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는 처지였기에 그 말을 듣고 아예 관심을 끊었다.

    “으음. 잠시만요.”

    한참 걷던 중 마틴이 손을 들어 무리를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지?”

    “이 앞에 매복해 있는 적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길이 안 보여요. 무조건 그 길을 뚫고 가야 하는데……. 어떡할까요?”

    “뭘 그런 걸 물어봐?”

    나는 입을 비뚜름히 기울이며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뚫고 가면 되지.”

    마틴도 내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에게 전투 준비를 명하고 우리는 쭉 앞으로 걸어갔다.

    “멈춰라!”

    적들은 우리가 눈치챈 걸 알아차렸는지 매복을 그만두고 밖으로 나와 있었다.

    1단계에서 보았던 병사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화려한 갑옷을 걸친 석인들.

    바로 기사 계급의 석인들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다들 뒤로 물러서. 마틴 너는 빼고.”

    “예.”

    나는 깔끔하게 석인의 말을 무시하며 대열을 바꾸었다.

    바하토프와 이렌, 엘 리, 그리고 나는 대열의 맨 뒤로 향했다.

    자연스레 가장 앞에 선 건 마틴.

    “이, 이것들이!”

    기사는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떨고 있었지만, 마틴은 고요한 눈빛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석인 주제에 저렇게 풍부한 감정 표현이라니. 던전 깊숙이 들어오긴 했나 보다.

    마틴은 곧 부지불식간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기사 수십 명을 상대로 달려드는 모습은 일견 무모해 보였지만.

    꽈아아앙-!

    그가 검을 휘두르자 한 번에 석인 세 명이 뒤로 튕겨 나갔다.

    그중에 한 명은 아예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걸 보니 일격에 즉사했나 보다.

    “크아아아악!”

    마틴은 종횡무진으로 날뛰며 석인들의 머리를 부수고, 몸을 부스러트렸다.

    그러나 용맹하게 싸운다 해도 혼자서는 중과부적의 일이었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 한 명이 비집고 나왔다.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까. 맞은 갑옷이 없어 여전히 평상복 차림에 손에는 창 대신 지팡이가 하나 들려 있다.

    주변에서 말릴 만도 하지만 그 아이는 아무런 방해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특이한 점은 무어라 계속 중얼거린다는 것.

    “សត្រូវ. ការឃុំឃាំង។.”

    그리고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들더니, 아이의 눈에서 청광이 번뜩였다.

    쉬이이이이익-!

    그 결과는 곧 나타났다. 석인 기사들의 발밑에서 초록색의 새싹이 보이나 싶더니 순식간에 자라서 그들의 몸을 꽁꽁 묶은 것이다.

    마틴은 기세를 타서 더욱 격렬하게 날뛰었다. 기사들은 자신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식물에 당황한 듯 몸부림을 쳤지만,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모, 모두 돌격!”

    이내 다른 이들도 차례차례 앞으로 뛰어나갔다.

    마틴이나 아이처럼 임팩트 있는 모습은 없었지만 모두 최선을 다해서 무기를 휘둘렀다.

    최선의 공략법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

    “다 계획대로 돼 가고 있군요.”

    이렌이 슬쩍 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녀에게는 던전 공략 계획을 대략 알려 주었다. 바하토프와 달리 눈치도 빠르고 입이 무거우니까.

    “그렇지.”

    이대로만 가면 안전히 보스룸까지 갈 수 있다.

    이대로만 가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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